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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특집]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사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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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작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어떤 인연을 만났을까요?

이미지: 결

*여행은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행 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을까요?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최근에 나는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책을 출간했다. 원래 제목은 ‘내 손으로 러시아’였다. 고민을 하다가 출간 직전 이름을 변경했다. 참 잘한 일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사람들이 다들 “와아!”하고 설레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많은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설경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뜨거운 홍차 한 잔을 마시며 난생 처음 보는 사람과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 갑작스러운 사교활동! 이 얼마나 낭만적이란 말인가. 배경으로 뿌우—하는 기차 경적소리와 칙칙 폭폭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잠깐, 왜100년 전 기차 이야기를 하고 있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예매할 때만 해도 난 책이나 다큐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사교성이 없다. 사교를 꼭 해야할 때는 필사적으로 사교력을 짜내어 대응할 수 있지만, 그러고나면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이틀은 쉬어야 한다. 한 때는 외국여행을 가면 완전 반대로 작용해 미친 사교인간이 되곤 했다. 한국에서 사교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외국인과는 곧 헤어질테니 오히려 더 마음 편히 사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만났다 금방 헤어지지 않는다. 길면 이틀까지도 한 공간에 갇혀있어야하는데 어설프게 말을 텄다가 피곤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다.

‘응~ 난 안 될 거야~’

그냥 나에게 기차 안의 사교는 없다고 생각하자.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어나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도 영어를 못 한다. 이런 마당에 사교는 무슨 사교?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기차를 탄다고 해서 꼭 사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통해도 다들 한 마디도 안 한다. 비행기를 8시간 타고 가도 옆사람하고 대화 한 번 할까 말까다. 사교를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스트레스를 버리자! (내향인 특징: 말 시켜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미리 걱정함)

시간이 흘러 드디어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다. 나와 내 친구 모호연은 6인실을 예약했다. 말이 6인실이지, 사실 전체가 트여있기 때문에 54인실이나 마찬가지다.

한 밤 중에 타서 침대를 펼치고 있는데 맞은 편에 20대로 추정되는 남자가 왔다. 어쩌지?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인사를 하는 게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룰인가? 하지만 남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그래, 상대방이 먼저 인사하면 인사하도록 하자!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해 하루 동안 도시를 둘러본 다음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한참을 지나 기차는 러시아의 공업도시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잔뜩 타 기차가 시끌시끌해졌다. 우리 맞은 편 아래 칸 침대에는 통통하고 눈이 동그란 갈색머리 아저씨가, 위 칸 침대에는 무섭게 생긴 백발의 근육 할아버지가 탔다. 인사를 해야겠지? 이럴 수가. 또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아저씨들이 우리를 일절 쳐다보지 않아서 인사할 찬스가 없기도 하다. (그 후 알게 된다. 위 두 사람처럼 멀쩡한 러시아 남자들은 절대 외국인 여자를 빤히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나 지났을까. 열차 안이 이상하다. 어제만 해도 아주 조용했는데, 무슨 선술집에 온 느낌이다. 어제 울란우데에서 탄 남자들이 술병을 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잠깐, 열차 안에선 음주 금지 아니었어?


“헤이-” 


갑자기 술병을 든 남자가 훅 나에게 왔다. 잠깐, 하필 지금 ‘기차 안에서의 사교타임’ 이벤트가 발생하는 건가?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반사적으로 인사를 받아줬는데 갑자기 내 침대에 와서 앉더니 바싹 몸을 붙이고 시뻘건 얼굴을 들이밀며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이 남자 한 명 뿐이 아니었다. 서너명의 남자가 갑자기 몰려와 좁은 공간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남자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전체가 빨간 색이고, 파란 눈은 커다랗게 떠져 흰자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다. 한마디로 뺑글 돌아버린 눈 그 자체다!

나와 모호연은 처음엔 번역기를 꺼내 어떻게 말을 해보려다가 전혀 통하지 않는 분위기에 러시아어로 “니옛!(No)”을 외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도 전혀 물러가지 않는 남자들. 아니, 내가 지금 가슴 푹 패인 빨간 원피스라도 입고 있으면 말을 안 해. 목 늘어난 티셔츠에 무릎 나온 추리닝 입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사교를 원한 게 아니었다고! 급기야 어떤 남자는 모호연의 손을 강제로 잡고 손등에 키스까지 하려고 했다! 폭발한 우리는 거의 동시에 “씨X!”을 외쳤다. 역시 욕은 한국욕인가. “씨X, 개새끼야, 꺼져!!”

그 소리에 우리 맞은 편 윗층 침대의 무섭게 생긴 백발 근육할아버지가 깼다. “#$&^%#$—!!!” 앗, 이건 그냥 알겠다. 러시아 쌍욕이다. 근육할아버지는 남자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다. “이 새끼들이 어디 추잡하게 지랄들이야! 일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아까도 내가 봐주고 있었더니만 술 처먹고 시끄럽게 하고 있어! 안 꺼져? 안 꺼지냐고. 요즘 애새끼들이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우리 구역은 한 번에 정리가 되어 눈뺑글남들이 바로 사라졌다. 휴… 이게 웬 일이냐, 정말. 갑자기 기차여행과 러시아에 온 정이 다 떨어진다. (이 일은 강도와 길이를 축약한 것이니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를 참고하길 바람) 지금 당장 집으로 순간이동하고 싶다. 러시아 다시 오면 내가 인간도 아니다. 기차 안에서의 사교? 그런 헛소리는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여행은 망했다.

다음 날 이르쿠츠크에서 내릴 때보니 뻘건 얼굴들이 다들 흰 얼굴이 됐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인간들이 멀쩡하다. 

이르쿠츠크에서 이틀 있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간다. 내가 다시 기차를 탈 수 있을까? 솔직히 무섭다. 기차역에서 모호연하고 손 붙잡고 기도까지 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제발 같은 칸에 술취한 남자가 타지 않기를!

그리고 기차를 타보니, 만세! 맞은 편 침대에는 안경 낀 할머니가, 건너편 2인석에는 젊은 아이 엄마와 딸이 앉아있다. 완벽한 구성, 일단 우린 살았다!

할머니와 가볍게 목례했다. 할머니는 뭐라 뭐라 말씀을 하셨지만 역시 1도 통하지 않는다.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아주 오래된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안나 까레리나’다. 우리도 침대 1, 2층에 각기 편하게 누워 흘러가는 기차 밖 풍경을 감상했다. 건너편 모녀가 너무 그리고 싶은 포즈로 앉아있어 그림도 한 장 그렸다. 이렇게 평온할 수가… 이게 바로 내가 기대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며칠 겪어 보니 러시아 사람들은 낯선 이에게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 잘 웃지도 않는다. 미국에 갔을 땐 눈만 마주치면 싱긋 웃으며 “하이, 하와유?”를 해와서 힘들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모르는 사람에게 웃어주는 문화 자체가 없다고 한다. 무표정이 인간의 기본 표정이며, 웃을 일이 있을 때만 웃어야 한다는 거다. 스몰토크 없이 살아온 한국인으로서 깊이 공감하는 바다. 알고보니 러시아 사람들도 굉장히 내향적인 편이라고 한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정말 사교를 내려놓아도 되겠다. 어차피 안 되는 거였잖아!

저녁을 먹으며 할머니께 귤을 드리니 “쉐쉐”하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코레얀카(한국여자)”라고 하니 갑자기 건너편 모녀가 깜짝 놀라며 술렁술렁 한다. 할머니가 우리 국적이 북한인지 남한인지 궁금해하는 사이에 (러시아에는 북한사람들이 유학이나 일 때문에 많이 온다고 한다) 젊은 애기 엄마가 건너왔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자기 애가 BTS 팬인데, 같이 사진 찍어주면 안 되냐는 거다. 아니, 단지 BTS와 국적만 같은 나에게?

사진을 같이 찍고 그들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자 엄마와 딸은 너무너무 기뻐했다. 분위기를 타서 통성명도 했다. 엄마는 ‘마리나’, 소녀는 ‘지아나’, 앞에 앉은 할머니는 ‘스탈리나’다. 갑자기 내 소원이던 ‘기차 안에서의 사교’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지아나에게 내 스케치에 색깔을 칠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지아나는 쑥쓰러워하면서도 열심히 색칠을 해주었다. 그림에 마리나, 지아나, 스탈리나의 서명도 받았다.


일러스트: 이다

아아… 지난 기차의 괴로움이 다 씻겨 내려간다. 행복하다, 행복해. 그래, 이게 기차지, 이게 기차야! 러시아 남자들이 준 고통, 러시아 여자들이 치유해준다. 다시 러시아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아까 기차 타기 전에 모호연에게 말했다. 우리가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또 기차를 타고 싶은 게 용하다고. 정말 그랬다. 한국으로 당장 돌아가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막상 기차를 탄다고 생각하니,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기차를 또 탈 수 있다니!


“이건 다른 기차니까, 이건 오늘의 기차니까.”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최고 멋진 점이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만남은 잠깐, 언젠간 끝이 난다. 오늘 기차가 별로였어도 내일 기차는 좋을 수 있다. 완전히 랜덤이다. 그러니 그냥 믿자. 나는 매번 다른 기차를 타고, 그 기차는 어제와 다른 기억을 남겨 줄 거라고.


* 필자 | 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 또는 비정규직 예술노동자. 포항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내내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다이어리를 썼다. 개인 홈페이지와 SNS를 오랫동안 운영하며, 일상에서 포착해 낸 아이러니와 유머, 소소한 깨달음이 담긴 일기와 작품들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저서로 『이다의 허접질』, 『무삭제판 이다 플레이』, 『걸스 토크』, 『기억나니? 세기말 키드 1999』가 있으며, 100퍼센트 손으로 그린 여행 노트 『내 손으로, 발리』를 출간한 이후 『내 손으로, 교토』, 『내 손으로, 치앙마이』, 『이다의 작게 걷기』 등의 여행기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그림으로 일상과 여행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끄적끄적 길드로잉』을 썼고, 다수의 드로잉 강좌와 창작 생활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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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다(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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