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 “오름, 우리 사는 꼴과 똑같죠”
『제주, 오름, 기행』 펴내 김영갑을 만난 후 제주도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렸을 때 우리는 자기가 다 한라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살아 보니까 한라산이 없는 거죠. 그냥 이름 없는 낮은 산 정도라고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오름을 가는지도 모르고 올라가잖아요. 지나가면서 수없이 많은 오름을 보면서도 어떤 오름인지 모르고요. 그게 우리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지나쳐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각자가 소중한 하나의 세상이고 우주인데, 모르고 그냥 지나가잖아요. (2017.11. 20)
『제주, 오름, 기행』을 읽으며 여행의 기억을 되짚었다. 다랑쉬오름과 성산일출봉, 그리고 가파도. 모두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책 속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랑쉬오름은 4?3 사건의 흉터가 남아있는 공간이었고, 성산일출봉은 제주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제주를 가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여행은 공감”일진대, 공감에 실패했으니 그곳을 안다고 말하기도 머쓱했다.
철저하게 외부인의 시선으로 관망했기에 그랬을 것이고, 단순히 ‘좋다’라는-싱겁기 짝이 없는 감탄만 연발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저자의 시선은 제주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이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 그들의 눈으로 제주를 바라보고자 했다. 관광지로써 제주는 아름다울 뿐이지만, 살림의 근거지로써 제주는 척박한 땅이다. 저자가 섬 곳곳을 바라보며 이따금 서글픔을 토로하는 것은 그래서다.
그가 오름을 좋아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오름은 지지리도 못난 우리네 산이다. 낮고 작아 보잘것없는 우리네 꼴이다”라고 했으니, 애정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주의 오름은, 저자에게 있어 ‘인연’으로 점철된 공간이다. 깊이 마음을 나누었던 故 김영갑 사진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곳이고, 그의 사진을 보면서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란 걸”, “압도하는 한라산이 되지 못하고 엎드린 오름으로 사는 인생이 더 많다는 걸” 깨닫게 된 장소다. 그러므로 『제주, 오름, 기행』에 담긴 것은 제주와 오름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고, “결국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손민호 저자는 20년 가까이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팔 할을 문화부기자와 여행기자로 살았다. 그 중 15년은 제주의 오름을 오르내리며 보냈고, 긴 인연의 끝에서 『제주, 오름, 기행』을 썼다. ‘여행자가 한 번쯤 들러봐야 할’ 오름 40곳을 추려내어 역사, 설화, 지질, 문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주와 오름과 여행의 이야기
부제가 독특해요.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을 위한 오름 40곳”인데요. 직접 지으셨나요?
그럼요. 제목도 부제도 직접 지었어요. 원래 제목은 ‘제주, 오름, 여행’이었는데, 『제주 오름 여행』이라는 책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쉼표가 있는 게 다르지 않느냐고 했더니, 쉼표는 검색이 안 된대요. 그래서 기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바꾸게 됐어요. 이건 제주에 관한 이야기이고, 오름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행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쉼표를 넣었고요.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이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가고 그래서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죠. 제주도를 가면 당연히 찾는 곳들이 있어요.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서울의 남산처럼 당연히 가는 곳이 있는 거죠. 그런데 두 번째 여행부터는 각자 취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한 발 더 깊게 들어가게 되고, 제주도가 조금 더 궁금해지기도 하죠.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오름을 간 적이 있지만,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지 몰랐어요. 책을 읽고 나서 다시 가면 분명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여행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안타까웠던 부분이에요. 이런 콘텐츠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거나 없다는 거죠. 그리고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갈 때는 공부를 많이 하잖아요. 여기에 가면 이걸 꼭 봐야 된다, 하는 것들도 미리 알아보고요. 그런데 제주도에 갈 때는 그렇지 않죠.
제주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되신 거예요?
여행기자로 찾아간 게 그렇죠. 그 전에도 개별적으로 여행을 가기는 했지만, 그건 잘 모르고 다닌 거고요. 정치부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출입처가 국회이듯, 한국에서 여행기자에게 제일 중요한 출입처는 제주도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제주도를 다니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인연이 쌓이게 된 거죠. 인연 때문에 더 가게 됐고, 더 사랑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100번을 넘게 갔고, 작년에는 18번인가 간 것 같아요.
아직도 제주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제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여행 기자가 마찬가지일 텐데요. 갈수록 넓어져요. 이를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주도를 가봤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제주에도 제주시가 있고 서귀포시가 있죠. 성산이 있고, 중문이 있고, 월정리가 있어요. 동네마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제주도 갔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어느 지역을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한라산에도 등반 코스가 크게 5개가 있어요. 한라산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은 ‘이번에는 어리목을 갔다, 영실을 갔다, 성판악을 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갈수록 넓어지는 거예요.
책에 소개된 오름이 40개인데요. 이곳들만 제대로 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책을 쓴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워요. 지금 제주에 368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는데,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님이 『오름나그네』에서 320개를 다루셨어요. 두꺼운 세 권짜리 책인데, 일종의 사전과 같은 거죠. 그런데 368개 오름 중에서 100개 정도는 동네 야산 같이 작은 것들이기도 하고, 사실 여행지로써 의미가 있는 건 60~80개 정도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 가운데에서 40개만 추리는 작업을 먼저 했고요. 책에 쓰지 못한 오름들이 있는데, 66개 정도 쓰면 여행지로써 갈 만한 데는 다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오름이 발생한 역사부터 설화, 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여행이 그런 거죠. 알 것들이 정말 많은 거예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있어야 되고요.
개인적으로 설화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책에 쓰셨듯이 “전설과 설화만 엮어도 흥미로운 제주 여행 콘텐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를 갈 때 그리스 신화를 달달 외워서 가잖아요. 제주도에도 흥미로운 신화들이 많고 그럴듯하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따로 찾아보지는 않아요. 그게 안타까운 거죠. 아직까지 한국의 관광 정책, 관광 산업에 문제가 많은 거예요. 여행기자로서 할 이야기가 많은데, 신랄하게 이야기했다가 편집 과정에서 들어낸 부분도 있어요(웃음).
기자님의 불만이 보이기는 했어요(웃음).
이 책을 쓴 저자는 둘이에요. 하나는 제주도와 개인적인 인연을 쌓은, 혹은 제주올레를 애정 하는 여행자 손민호의 자아고요. 또 하나는 여행기자로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하고, 독자한테 정보를 알려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아예요. 두 번째 자아로서 할 이야기는 정말 많죠. 관광이라는 분야가 문화체육관광부에 속해 있잖아요. 관광을 문화적인 콘텐츠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게 한국 정부의 인식인 거죠. 그런데 지금의 관광은 오로지 산업, 돈 버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예산이 배정돼도 다 인프라로 들어가죠. 안타까워요. 예산의 1/10만 콘텐츠에 활용돼도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지만 단순히 ‘소비’하는 데에만 그친다는 거예요.
그렇죠. 객체로써 소비되고 있다는 부분이 제일 안타까운 거죠. 오름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갔다가 내려오잖아요. ‘경치 좋다’ 하고는 끝이에요.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도 오름이 나오던데 ‘올라갔더니 참 좋더라’ 하고 끝이더라고요. 그게 아쉬운 거죠.
제주의 지질학적, 역사적 가치를 생각하면서 찾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저도 반성을 많이 했고요(웃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우리의 문화적 가치도 담겨 있고, 역사적인 흔적들도 있잖아요. 함덕 해변을 예로 들면, 수심이 얕고 해안이 평편해서 어린이들이 놀기에 가장 안전한 해변 중 하나예요.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있는 서우봉이 4?3 사건 때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현장이라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죠.
김영갑, 제주, 오름
책에 실린 감상의 밑바닥에는 슬픔, 연민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유가 있을까요?
갈수록 그런 것만 보여요. 이제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모습만 보여요. 우리가 사실 그렇게 살기도 했고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여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네들이 사는 모습을 보러 가는 거잖아요. 우리한테는 풍경인 건데, 풍경이라는 단어에는 객체와 주체의 거리가 있어요. 그런데 여행을 하는 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풍경 안에 자리하는 거잖아요? 또 다른 관찰자가 봤을 때 나는 그 안에 있는 거죠. 그러려면 거리가 없어야 되니까, 가까이 가서 보게 되고 그들에 먼저 공감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 사연들, 과정들이 보이고 이해되고 같이 울게 되는 거죠. 여행은 결국 공감이라는 걸, 늘 생각해요. 그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행이라고요. 이건 저 혼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임재천 사진작가의 책 제목도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이잖아요. 비슷한 맥락이죠. 당신들에게는 풍경이지만 우리에게는 일상이라는 거예요.
설문대할망 설화가 종종 등장하는데요. 제주 사람들에게 생존 자체가 큰 숙제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인문학적으로 그렇죠. 모든 신화는 다 상징이잖아요. 고도화된 의미 체계들이고요. 그런 것들을 가만히 보면 알게 돼요. 왜 설문대할망은, 거대한 여신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일만 할까요? 말이 안 되잖아요. 사람들을 노예로 부릴 수도 있는데, 혼자 일을 다 한 거잖아요. 거기에는 제주 할망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거죠. 그렇게 큰 신도 제주에서는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요. 그걸 누가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현장에서 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나다, 살다, 들다, 걷다, 울다’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오름을 구분하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섯 가지 동사잖아요. 동사는 사람들, 생명체가 하는 거죠. 사람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인 거예요. 오름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본다는 의미죠. 결국 이 책에 담고 싶었던 것은 제주와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붙이는 동사로 구분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많은 동사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지금처럼 ‘나다, 살다, 들다, 걷다, 울다’로 정하길 잘한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 오름을 이해하는 방식인 거죠.
故 김영갑 사진작가와 만나신 후에 오름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나요?
제주도 자체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어요. 그 와중에 오름을 더 보게 됐고요. 제주도를 갈 때마다 거의 대부분은 오름밭을 헤매고 다니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두 분이 함께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짧은 시간 동안 깊이 가까워지고 영향을 많이 주고받으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요?
글쎄요. 가까워졌을까요. 2003년도 9월인가, 제주도에 취재 갔을 때 처음 만났고요. 그 자가 2005년 5월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알고 지낸 시간은) 18개월 정도 되는 거죠. 그 와중에 제주도 출장을 갈 때마다 늘 시간을 내서 만났어요. 제가 많은 영향을 받은 거예요. 너무 갑자기 가버려서 황망했죠. 지금도 김영갑과 관련된 추모사업이라든지 여러 일들은 당연히 제가 해야 되는 일처럼 인식이 돼요. 죽고 난 뒤의 인연이 한참 더 길어진 거죠. ‘김영갑’으로 시작하는 기사보다 ‘故 김영갑’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더 많이 썼어요. 그게 제일 아프죠.
처음 겸상을 하셨던 때의 이야기를 보면, 김영갑 작가님도 기자님을 가깝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사람이 친해지는 데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진실성, 진심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을 보셨을 때, 오름이 다르게 보이셨어요? 같이 오름에 올랐을 때 느낌이 남달랐나요?
그때는 이미 루게릭병이 한참 진행됐을 때라 같이 오름을 다니지 못했어요. 이야기만 해주고 갔다 오라고 하거나, 오름 아래까지 동행하는 정도였죠. 올라가지 못했어요. 일상생활도 거의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김영갑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저게 뭐지?’ 싶었죠. 언젠가는 한 시간 동안 사진 하나만 쳐다본 적도 있어요. 혼자 주저앉아서 멍하게 사진을 본 적도 있고요. ‘이게 뭐지? 저 자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뭘 보고 싶었던 거지? 뭘 찍고 뭘 담고 싶었던 거지?’ 그러면서 오름을 하나씩 찾아다니기 시작했죠.
다른 작가의 오름 사진과 달리 김영갑 작가님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게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해죠. 대상에 대한 이해. 김영갑 사진의 제주는 참 심난해요. 바람도 많이 불죠. 그래서 김영갑을 말할 때 ‘제주의 바람을 찍고 간 사진작가’라고 흔히 상용구로 쓰는데요. 김영갑 사진을 가만히 보면 피사체가 하나예요. 다양한 풍경들이 쭉 나와 있는데, 그 풍경들을 그림 같다고 했을 때, 김영갑은 그림은 이미지를 그리면 되는데 사진은 그게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운이 좋아서 포착했을까요? 아니죠. 그냥 기다린 거예요. 그건 허구한 날 거기 살았다는 거잖아요. 그때는 길도 없을 때예요. 걷기 여행이라는 게 자기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 들어가는 거잖아요. 다른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건 저한테도 중요한 삶의 가르침이 된 건데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발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베기고 무릎이 나가도, 어떻게 하겠어요. 걸어서 가야죠. 김영갑이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어요.
김영갑 작가님이 직접 봤을 법한 풍경도 촬영하셨죠? 책에 실려 있고요.
그렇죠. 김영갑 시선을 최대한 반영한 거죠. 김영갑이 찍은 많은 사진들을 제가 봤고, 전시가 되지 않은 것들도 많이 봤어요. 그러면서 김영갑 시선에서 제주를 보고, 특히 오름을 많이 보려고 노력했죠. 그런 시선이죠. 김영갑의 시선.
오름은 우리 사는 꼴이잖아요
오름이 거창하지 않은 존재라서 동질감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안쓰럽게 바라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죠. 딱 우리 사는 꼴이잖아요. 어렸을 때 우리는 자기가 다 한라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살아 보니까 한라산이 없는 거죠. 그냥 이름 없는 낮은 산 정도라고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오름을 가는지도 모르고 올라가잖아요. 지나가면서 수없이 많은 오름을 보면서도 어떤 오름인지 모르고요. 그게 우리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지나쳐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각자가 소중한 하나의 세상이고 우주인데, 모르고 그냥 지나가잖아요. 저도 이제 쉰이 다 되어가니까 그런 게 보이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서문에 썼는데, 제 또래 독자들은 읽고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젊은 독자들은 김영갑의 이야기를 읽고 울었다고 하는데, 40대 후반이나 50대의 독자들은 서문을 읽고 많이 짠했다고 해요. ‘아재궁상’이라는 이야기도 하고요(웃음). 지금 딱 제 심정, 심상, 감상인 것 같아요. 30대에는 절대 쓸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만약 그때 오름에 대해서 썼다면 다른 식으로 썼겠죠.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여행기자는 최고의 직업인 것 같아요. 여행이 곧 밥벌이니까요. 하지만 고단하게 느껴지실 때도 있겠죠?
고단하죠. 문학 담당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람들이 보면 시집, 소설책이나 읽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기자 입장에서는 그게 밥벌이고 일인 거죠. 여행도 마찬가지예요. 어디에서 무엇을 취재할 건지 모든 계획을 세워놔야 하죠. 물론 출장 갈 때는 잠깐 개운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현장에 가면 똑같은 취재인 거죠. 바람이 있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 번 걷고 싶다는 거예요. 가끔, 정말 마음에 드는 숲길에 대해서 기사를 쓸 때 이런 표현을 종종 썼어요. ‘혼자 이 깊은 숲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다’, ‘그때는 카메라를 놓고 오고 싶다’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밥벌이니까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이 숲길에서 느끼는 정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생각하는 거죠. 그 숲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산에 올라갈 때도 있어요. 이건 일이죠. 즐기는 게 아닌 거죠.
여행기자는 어떤 여행을 떠날지 궁금해요. 일하지 않는 시간에 말이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어디가 제일 좋아요?’라는 건데요. 그건 질문이 잘못됐어요. 여행은 ‘where’의 문제가 아니라 ‘with whom’의 문제예요. 누구랑 같이 가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부모님을 모시고 갈 때 산을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애인이랑 같이 갈 때, 혼자 갈 때, 친구들이랑 놀러갈 때, 다 다르잖아요. 저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 모든 휴가 여행의 스케줄은 아이한테 맞추게 되죠. 어쩔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곳,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몇 가지 추천을 해요. 학교에서 신라시대를 공부했다고 하면 ‘경주에 갈래? 경주에서 보고 싶은 게 뭐야?’ 하고 물어봐요. 아이들이 원하는 걸 적어오면 그걸 보고 스케줄을 짜주고요. 그렇게 해서 경주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자녀들과 오름을 가신 적도 있나요?
서우봉 아래에는 갔었죠. 함덕해변을 갔었거든요. 서우봉 꼭대기는 가파르기 때문에 가기 어려웠고, 중턱까지 올라갔었어요. 거기에서 내려다보는 포인트가 있거든요. 송악산도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송악산은 평편하니까요.
여행기자가 아닌 여행자로서, 오름을 즐기는 방식은 어떤가요? 책을 보면 오름밭에 누워 계실 때가 많더라고요(웃음).
맞아요. 지금은 용눈이오름을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아침 일찍, 아니면 저녁 때 돗자리 하나 갖고 가셔서 펼쳐놓고 누우면 돼요. 오래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러고 있으면 바람 소리가 들려요. 풀 소리가 들리고요. 전혀 다른 느낌이죠. 꼭 한 번 해보세요. 용눈이오름을 추천하는 이유는 완만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드러누울 때가 많거든요.
지금 같은 시기에 제일 좋은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11월이 제주도 여행하기 제일 좋을 때예요. 일단 비수기여서 제주도에 사람이 가장 없고요. 수학여행도 거의 안 와요. 더 중요한 건, 제주도는 단풍 섬이 아니라 억새 섬이라는 거죠. 지금이 억새가 제일 예쁠 때예요. 억새밭이 다 오름밭이라서, 11월은 오름 여행에 최고 좋은 때이기도 해요. 특히 지금 따라비오름에 가면 압권이에요. 책에 실린 (억새) 사진도 다 11월에 찍은 거예요. 그리고 10월 하순부터 노지 감귤이 나오거든요. 마을에 다니면 다 노란 감귤이에요. 지금이 감귤 색깔이 가장 예쁠 때죠. 중산간에 가면 억새가 은빛으로 반짝이고요. 또 겨울은 생선이 제일 맛있을 때잖아요. 이때부터 삼치, 방어가 올라오죠. 곧 모슬포에서 방어축제를 할 거예요. 여러모로 지금이 제주도를 여행하기에는 최고죠. 사람도 붐비지 않는 시기고요.
좋아하는 곳일수록 나만 알고 싶기도 하잖아요. 책을 쓰시면서 걱정은 안 하셨어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면 어떡하지?’ 하고요.
그런 건 없었어요. 이미 망가진 걸 보고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용눈이오름에 있는 레일바이크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레일바이크는 강원도 정선에서 폐선로로 만든 건데, 제주도는 철도의 역사가 없는 곳이거든요. 그냥 의미 없이 만들어 놓은 거고, 용눈이 오름을 그냥 지나가는 풍경으로써만 소비하는 거죠. 그런 아쉬움 때문에 책을 쓰게 된 부분도 있어요. ‘용눈이오름까지 가서 레일바이크만 타지 마시고, 여기도 꼭 한 번 올라가 보세요’ 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게 둔지봉이었어요. 책에서 뺄까 잠깐 고민했어요. 김영갑이 마지막까지 떠올렸던 곳이기도 하고, 중산간은 개발되지 않은 풍경이거든요. 그런데, 언젠가는 바뀌겠죠. 제 것이 아니니까요.
제주, 오름, 기행손민호 저 | 북하우스
오름이라고 다 같은 오름이 아니어서 중산간 오름, 올레길 코스에 포함된 오름, 독특한 화산 지형으로 중요한 오름 등 저마다 흥미로운 사연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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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곡선의 여정, 원시의 지구가 잠든 깊고 그윽한 숲길, 제주 오름 사람의 속도를 되찾아준 낮은 여행의 기록! 제주를 가장 제주답게 담아낸 여행서가 나왔다. 중앙일보 레저팀장을 지낸 손민호 기자가 지난 15년간 분주히 누볐던 제주 오름 중 40곳을 추려내어 소개한 『제주, 오름, 기행』이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