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타 “중국 시장이 세계를 뒤흔들 날이 온다”
송라이터, 프로듀서, 아티스트 강타
문화 소비의 흐름이 30대까지 확장되어 복고 열풍이 일어나고 예전 것들을 꺼내서 사랑해주시고 그들의 시장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시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런데 H.O.T. 멤버로서 팀의 컴백은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이 반, 두려움이 반이에요. (2017.08.11)
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의 한 녹음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에쵸티(H.O.T.) 출신의 강타가 가수들 녹음할 때마다 예고 없이 들러서 녹음현장을 주시하곤 했다면서 “음악적 관심이 상당했다”고 귀 뜸했다. 그가 단지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던 당시 전해들은 얘기는 의외로 놀라웠다. 강타 스스로도 “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에쵸티에 들어왔다!!”고 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 외에 사실 에쵸티 빅히트 넘버 중 하나인 「빛」을 작사 작곡한 것은 예상 밖 행보였다. 강타는 에쵸티의 메인 보컬과 랩, 그리고 댄스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라이터로, 프로듀서로 활동의 외연을 확대해나갔다.
「북극성」과 「스물 셋(My life)」를 알린 솔로 앨범활동을 비롯해서 프로젝트 그룹 에스(S)와 아이돌 국제 듀오 ‘강타 앤 바네스’ 등의 프로젝트 활동으로 그는 아이돌 아닌 아티스트로 페달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재즈 발라드를 써내기도 했다.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현재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 중인 그는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막힘이 없이 술술 풀어냈다. 빼어난 말솜씨였다. 에쵸티 시절의 음악열정, 한류에 대한 자평, 에스엠 비등기 이사 활동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그의 언급은 흥미로웠다.
작년 6월부터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고 있다. DJ 해보니 어떤가.
예전에 제가 KBS에서 2년 정도 라디오를 한 적이 있어요. 23살, 24살 때 했는데 그거랑 대비가 되더라고요. 20대 초반에 인생 경험도 별로 없고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쭉 스타로 살아왔던 제가 진행한 라디오와, 군대도 다녀오고 대중의 싸늘함도 느껴보고 이런 저런 일을 겪고 38살에 시작한 이 라디오는 굉장히 달랐어요. 모르는 걸 많이 얻어요. 지식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사는 판교에서 방송국까지 많이 막히면 2시간, 보통은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그러면 차 안에서 라디오도 듣고 막히는 것 때문에 힘들어도 보고... 그걸 일주일에 4일 정도 하니까 라디오부스 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닌 거죠. 매일 무언가를 하고 매일 책임감을 갖고 뭔가 해야 하고 음악과는 다른, 사실 음악은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필(feel)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안하는 무책임하는 기간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직장인들의 애환을 모르죠. 지금은 대다수가 겪는 생활을 조금이나마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릴 때는 팬들이 사연을 보냈는데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재미있어요. 스스로 반성을 할 때도 있고요.
에쵸티 팬덤은 대단하지 않았나.
사실 그런 팬덤이 이전에도 있긴 했죠. 서태지와 아이들, 그 전에는 소방차 선배들도 있었고 그 전에는 남진, 나훈아 선배님도 그런 팬덤이 있었는데 팬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인정을 받고 본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팬클럽 문화의 시작이 H.O.T.가 처음인 것 같더라고요. 소속사에서 팬클럽을 만들고 회비를 걷고 풍선 같은 고유의 응원 방식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갖게 된 것이요.
팬들과 함께한 당시를 떠올린다면.
사실은 고맙고 이들이 저희를 좋아해서 응원해주러 온 건 아는데, 육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힘든 부분은 어쩔 수 없었어요. 한 번은 희준이 형이 큰 귀걸이를 하고 나왔는데 그걸 잡아 당겨서 피가 난적이 있어요. 아무리 저희를 좋아해서 왔다고 해도 순간 화가 나잖아요. 그런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때 멤버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나누면 결론은 비슷했어요. 다 취할 수는 없잖아요. 팬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좀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좀 이해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섯 멤버 중에 강타는 팬들에게 잘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잘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건 팬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죠. (웃음)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 그나마 좀 편안해진 상태의 팬들은 예전 제 모습을 떠올리면 무뚝뚝했다고들 많이 말씀을 하세요. (가끔 수식되었던 ‘도시남’이 맞았던 것 아니냐고 하자) 그러려고 한건 아닌 것 같고 (웃음) 약간 낯가림이 있고 어렸을 때라서….
에쵸티 다섯의 개별이미지가 문희준은 즐거움 담당 이미지, 토니안은 귀요미, 이재원과 장우혁은 각각 키 큰 막내, 카리스마. 뭐 그런 느낌 아니었나.
그런 이미지였죠. (웃음) 지금 팬들은 이해할 부분은 이해해주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팬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틀 안에 있기를 바랐거든요. 영원한 아이돌로서. 사실 팀을 할 때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아요. 다섯 명이 어떤 음악을 하든 대체로 그들 구미에 맞는 음악이 나올 테니까요. 근데 제가 해체하자마자 1집에서 「북극성」이란 노래를 내고 재지(Jazzy)한 곡들과 느린 노래들로 앨범을 채운 걸 보자 팬들이 반기지는 않았거든요.
영원히 아이돌이길 바라는 것?
네, 아직도 화려한 모습으로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를 바라고 아직은 더 어려보이고 더 아이 같아 보이기를 바랐던 거죠. 근데 그때 저의 마음에는 “나 혼자 하면 나는 이런 음악을 할 거야” 그런 생각이 깊었거든요. 탈(脫)아이돌, 탈10대의 이미지.... 물론 지금은 잘 정리되었지요. 이제 기본적으로 15년 이상 같이 온 팬들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은 물론 제가 어떤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더 관대해졌죠.
어느덧 에쵸티 21년이다. 같이 활동했던 젝스키스가 최근 컴백을 했고 에스이에스(S.E.S.)도 20주년 앨범을 냈다. 근래 들어 1990년대 아이돌이 복고 붐을 타고 귀거래(歸去來)하는 분위기다.
우선 문화 소비의 흐름이 30대까지 확장되어 복고 열풍이 일어나고 예전 것들을 꺼내서 사랑해주시고 그들의 시장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시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런데 H.O.T. 멤버로서 팀의 컴백은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이 반, 두려움이 반이에요. 에쵸티는 저 혼자 만든 팀도 아니고 멤버 다섯 명이 만든 팀도 아니거든요. 멤버들과 소속사는 물론이고 팬덤이라는 큰 문화가 당시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저희 자체의 매력보다도 그런 모든 것들이 결합해서 만든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싶네요.
어떤 두려움인가.
다섯 명이 뭉쳐서 무대에 다시 섰을 때 그 추억을 회상하며 1차로 감동할 수는 있죠. 근데 그리고 난 후의 2차가 두렵더라고요. 그 다음엔 뭘 해야 할까. 우리가 예전처럼 그렇게 화려한 춤을 출 수 있을까. 춘다 해도 그때 춤을 똑같이 추는 걸 보는 것 자체는 재미있어 하겠지만 요즘 나오는 화려한 춤사위, 요즘 트렌드의 음악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할 수 있을까. 일단 그런 불안함.
에쵸티 시절로 돌아 가보자. 처음에 멤버들이 모였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나. 음악을 하려는 마음이었나.
지금과 비교하면 그런 마음은 60% 정도였어요. 반은 넘었죠. (웃음) 제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게 힙합이나 흑인음악이 아니라 메탈리카나 건스 앤 로지스 같은 록이었거든요. 사이먼 앤 가펑클을 먼저 들었고. 그래서 저도 중학교 1학년, 2학년 까지는 록이 아닌 음악은 음악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땐 다 그랬지만 교내 밴드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하고 싶었던 건 록이었고 처음 잡은 악기도 건반이 아니라 기타였어요. 중학교 때 아르바이트 한 돈 20만원을 모아서 낙원 상가에서 앰프랑 펜더 기타를 샀죠. 그게 처음 잡아 본 악기예요.
그럼 힙합, 흑인 음악으로 방향을 선회한 건 언제였나.
그 계기가 보이즈 투 멘(Boyz 2 Men)이었어요. 「End of the road」가 중학교 2학년 때 나왔는데 그걸 듣다가 내가 노래를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사를 한글로 적어서 한 번 불러봤어요. 근데 친구들이 그걸 듣더니 제가 노래와 잘 어울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흑인 음악을 더 찾아보게 됐죠. 그러다가 힙합도 들었고요. 너티 바이 네이쳐(Naughty By Nature)나 아이스 큐브(Ice Cube)로 시작을 했는데, 그걸 듣다 보니 갱스터 랩에 좀 꽂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춤이라는 문화에 빠지고... 그러다가 국내 그룹 중에 듀스를 보게 됐죠.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서태지와 아이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거대한 아이콘이었죠. 저희가 볼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무조건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신승훈이 발라드 아이콘인 것처럼요.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도 좋아했지만 듀스가 뭔가 좀 더 힙합스럽고 보고 배우고 싶은 게 많았어요. 신승훈 노래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승환 노래가 뭔가 우리하고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웃음) 약간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캐스팅이 됐기 때문에.... 게다가 사실 처음 데뷔할 때는 발언권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기분 좋았던 건 첫 타이틀 곡 「전사의 후예」 데모를 받았는데 갱스터 랩인 거예요. 사이프레스 힐이 생각나는. 물론 그거 때문에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 데모를 받았을 때는 국내에선 그런 노래가 별로 없었잖아요. 좋았죠.
방금 말한 것처럼 당시에 표절 의혹이 있지 않았나. 일각에선 에쵸티가 은퇴한 서태지를 판다, 기댄다는 지적이 있었다. 「전사의 후예」가 나왔을 때가 막 서태지가 은퇴한 후 아닌가. 서태지가 ‘전사’인데 기획사에서 나온 에쵸티가 「전사의 후예」를 쓴다는 건 서태지의 공백기를 이용하는 마케팅 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당시에 갱스터 랩이나 힙합을 좋아했던 국내 인구는 갱스터 랩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고 갱스터 랩이라고 불리는 닥터 드레, 워렌지, 사이프레스 힐, 좀 딥하게 가면 본 썩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 이런 팀들이 있는 건데 대부분 그 라인들이 비슷해요. 그리고 그 몇 년 후에 미디를 접하면서 알게 됐는데, 사실 「Come back home」에 있는 베이스 루프랑 「전사의 후예」에 있는 베이스 루프가 회사는 달랐지만 당시 갱스터 랩 하는 뮤지션들이 많이 쓰던 샘플 시디에 있던 루프였어요. 몇 곡 안 되는 비슷한 곡들이 그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트렌드라고 생각했고요. 노래를 처음 받았을 때 ‘서태지 선배랑 너무 비슷한 거 아니야?’ 이런 생각 보다는 ‘서태지 선배도 「Come back home」을 했는데 고등학생인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음악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전사의 후예」가 마음에 들었던 거군요.
저흰 너무 좋았어요.
이후 에쵸티를 상징하는 히트송들 「캔디」, 「늑대와 양」, 「아이야」, 「열 맞춰!」, 「빛」, 「아웃사이드 캐슬」 등이 이어진다. 그 노래들은 더 이상 부모님의 지시에 신음하는, 교실의 수동적 10대가 아니라 자기 의견을 당당히 개진하는, 때로는 반항할 줄 아는 공격적 10대 정서를 대변했다. 그래서 에쵸티 음악은 상당히 하드(hard)했고 메시지도 거친 게 많았다. 3집의 「빛」은 좀 달랐다. 굉장히 양순한 가사에 아이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주는 어떻게 보면 ‘호프 송’이다.
마침 영어 제목이 호프(Hope)예요. (웃음)
그때 ‘에쵸티는 진짜 이래야지’하는 호감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반항적 10대를 꼬드겨서 그 정서를 파는 게 아니라 진짜 10대에게 해주는 오빠, 형들의 이야기. 그게 「빛」 아닌가.
사실 당시에 팬들이 뭘 보고 우릴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전사의 후예」, 「늑대와 양」, 「We are the future」 이런 걸 좋아했을 것 같았어요. 그건 비주얼이고 상품적인 가치로 봤을 때 특히나 여학생들, 혹은 좀 더 어린 남학생들이 좋아했을 것들이었죠. 자극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들. 그런 걸 통해 우리가 강하게 보이고 10대 소년, 소녀들에게 전사로 보이고 그런 모습을 어필했다면, 저희가 즐거움과 위로도 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웃을 수 있는 것. 보면서 ‘우와 멋있다’하는 거,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 말고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것. 「아이야」는 들으면 자꾸 생각하게 되잖아요. H.O.T.에 호감이 있는 분이라면 화면도 보고 싶고. 「캔디」나 「행복」도 있었지만 「빛」은 우리 멤버들 손으로 만드는 듣기 편안한 곡을 만들자 하는 생각이 있었죠.
「캔디」나 「빛」이 지금까지도 남았지 않나. 솔직히 「전사의 후예」「아이야」「열 맞춰! 」보다도.
영광이죠. (웃음)
어떻게 멤버 강타가 쓴 「빛」이 타이틀곡이 됐을까 지금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수만 선생님은 “음악을 공부하는 건 좋다, 하지만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수라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좋은 곡을 쓰면 그 곡을 우린 무조건 앨범에 수록할 거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썼다고 해서 다른 작곡가 곡보다 나쁜데도 무조건 쓰진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이제 시작한지 1, 2년 밖에 안 된 너희들이 어떻게 전문 작곡가들보다 좋은 곡을 쓰겠니. 근데 난 다만 너희들이 연습하고 춤 연습, 노래 연습을 하고 너희가 무대에 서서 멋있게 보일 연습을 할 시간에 곡 쓰는 거에 빠져서 그 연습을 게을리 하고 무대 섰을 때는 멋이 없는데 너희 스스로는 너희들이 작곡한다고 멋있어져 있고 그런 마음만 갖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너희들이 좋아서 하길 바란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음악작업을 하는 데에 지원을 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럼 어떻게 곡 작업을 시작을 하게 된 건가.
저희 멤버 모두가 1집 활동을 마치고 첫 정산을 받았어요. 1996년 11월 16일인가 그랬는데, 그 날짜와 그 돈이 아직도 기억나요. 9월에 데뷔했으니까 2달 만에 처음 수익을 받은 건데 그때 당시에 개인당 천만 원이 넘었어요. 엄청난 돈이었죠. 지금도 큰돈이죠. 그때 필요한 모듈, 미디 장비, 매킨토시 컴퓨터 등을 샀죠. 샘플러만 못 샀어요. 샘플러 전 단계까지 갖춰서 그걸로 처음에 곡을 막 쓰고 1년이 지나고 「빛」을 쓸 때쯤 정산을 더 받아서 샘플러를 샀죠. 처음 곡을 썼을 때는 선생님께서 관심 있게 듣지 않으셨어요. 저희가 곡을 써왔다고 하면 “그래 너희들이 썼다고 하니 들어볼게. 근데 어떻게 이걸 쓸 수 있겠니?” 이런 식으로. 그렇게 1년이 흘렀어요.
「빛」이 3집 이전에 쓴 곡이라는 얘기인데.
미리 썼어요. 2집 때 썼는데 이수만 선생님 입장에선 다 퇴짜였죠. 그땐 MD라고 미니디스크가 있었는데 MD에 몇 트랙 녹음해서 선생님 책상에 놓고 가고 그랬거든요. 어느 날 “오늘도 곡 하나 써온 거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하니까 평소처럼 “틀어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때 「빛」을 들으시고는 선생님께서 다시 한 번 틀어보라고, 이건 앨범에 실을 수 있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자꾸 들어보시더니 저를 따로 불러서 세세한 디렉팅을 하시고 그걸 토대로 데모를 다시 갖고 와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선율이 이 코드에 맞으니까 그걸 중간에 넣으면 이건 타이틀곡으로도 쓸 수 있는 노래라고 하셔서 다시 작업에 들어갔죠.
사장님이 어느 부분이 맘에 들었다고 생각하나. 코러스 아닐까.
네, ‘다 함께 손을 잡아요, 그리고 하늘을 봐요’하는 코러스에서요. 그래서 그 부분만 반복해서 들으셨대요. 노랜 좋은데 타이틀곡으로 가기엔 어딘가 좀 부족하다하고 들으시다가 후렴구만 계속 듣다 보니 그 위에 그 대선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오보에로 선율을 깔면서 대선을 다시 만들었더니 제가 들어도 그거 하나 들어갔는데 완전 다르더라고요. 깔린 파트를 랩 파트로 하나 늘려놓고 해서 중간에 파트만 하나 늘어난 건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빛」이 처음 선정이 되었고 그러자 선생님이 “야, 이러지 말고 내가 다른 멤버 애들 것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어 봐야겠다!” 하신 거죠. 그렇게 3집에 멤버 전원의 곡이 들어갔어요. 저는 3곡을 실었죠.
자신이 쓴 곡이 라디오에 나왔을 때 기뻤겠다.
뭐랄까... 제 작업실에서 오락하듯이 막 뚱땅거리며 만든 거잖아요. 그게 매체를 통해서 나오는 걸 들으면 그 기분이 되게 어색해요.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거 여기 나와도 되나’ 하는 느낌. (웃음) 심지어 무대에서 그 노래를 우리 다섯 명이 부르고 있고.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2년 동안 계속했어요.
화성이나 대위법은 언제 배웠나.
대위법은 오히려 솔로 데뷔한 다음에 배웠어요. 현악이 들어간 걸 많이 쓰기 시작하면서 배웠고 기본 화성과 코드 진행만 갖고 시작을 했죠. 어렸을 때 기타 학원에서 타브(TAB) 악보랑 코드 진행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데뷔 직전에는 건반에 빠져서 건반 코드 진행을 배우고 화성을 익혔고요. 화성학을 따로 배우진 않았고 『파퓰러 음악 이론』 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게 기본적인 편곡부터 코드 진행을 관장하는 방식 등을 배울 수 있는 두꺼운 책인데 그걸 통해 배웠죠. 그러다가 에쵸티 데뷔하고 일년은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중단됐고 활동 쭉 하다가 중간 중간 장비 구입하고 『파퓰러 음악 이론』 한 번 보고 그렇게 된 거예요.
지금도 강타의 음악하면 먼저 「빛」이 떠오르는 것 같다.
네, 오히려 솔로 이후에 나왔던 노래들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주었지만 제가 쓴 걸 모르는 곡들이 많죠.
이 기회에 강타가 써준 곡을 몇 곡만 소개해달라.
에쵸티 노래는 「빛」하고 「그래 그렇게」, 「빛」 이외엔 다 타이틀곡이 아니라 수록곡이었어요. 그러나 제 솔로 앨범에선 타이틀곡은 다 제가 했죠. 다른 가수들 노래는 보아의 「늘」, 이지훈이 신혜성과 함께 부른 「인형」, 이지훈이 불렀던 「천애」, 엔알지(NRG)의 「비」. 최근에는 SBS의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OST 중에 송 트랙 프로듀싱을 했고 태연의 「그리고 하나」를 만들었어요. 송 트랙 프로듀싱은 7곡정도 됐어요. 그 중에 제가 쓴 곡은 2곡이고.
그런 걸 지금 하고 싶은 거 아닌가
그렇죠.
그 무렵 강남의 스튜디오에 그렇게 자주 갔던 이유가 뭔가.
에쵸티 시절에 제가 미디로 곡을 쭉 쓸 때는 연주 세션을 거의 쓴 적이 없어요. 부담이 있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세션을 쓰는 순간 누군가의 손을 빌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음악 잘 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연주자를 쓰잖아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저희가 곡을 써도 우리 소속사 분들 말고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어요. 업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써줬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한 번은 저희가 성인이 된 이후에 술을 마시러 갔는데 우연히 음악하시는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빛」 네가 쓴 거라며?”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 “멜로디만 정리한 거지?”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세요. 제가 미디 작업 다 했다고 하니까 시퀀서 뭐 쓰나, 드럼 뭐로 찍었냐, 샘플러 뭐 쓰냐 테스트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험을 하고 나서야 아 정말 네가 한 거구나, 믿으시더라고요. 이런 경우가 많아서 3집부터 5집까지 3년은 세션 쓰는 것도 눈치 보였어요. 그러다가 세션 쓰는 게 전혀 작곡하는데 위배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어차피 제가 미디로 다 정리한 거를 들으시고 연주자 분들이 연주를 하시는 거니까. 한 번은 제가 아는 피아니스트 분이 피아노 앨범을 말씀하신 ‘리드(Lead)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데 거기에서 드럼과 포(Four) 리듬이 들어가는 작업, 퓨전 재즈곡을 녹음하셨어요. 그 분이 그날 오면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래서 갔더니 드럼과 베이스는 같이 녹음을 시작해야 하고, 악보는 어떻게 정리를 하고 이런 걸 배운 거죠. 갓 20살이 되었을 때.
세션에 대한 감각 외에 또 다른 건?
그런 것도 있고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배웠죠. 집에서 미디만 했으니까 이걸 현장에서 보고도 싶었고요. 에쵸티 때는 밴드 공연을 안 했지만 솔로 데뷔를 하면 밴드 공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그걸 녹음실에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2달 정도는 제가 아는 분이 작업을 할 때는 시간만 맞으면 가서 보고 배우고 그랬죠.
에쵸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중학교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노래방에서 녹음한 테이프랑 친구들과 같이 춘 춤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해서 여기저기 다녔어요. 지구레코드도 갔었죠. 왜냐면 듀스를 너무 좋아했으니까요. 윤상 형님도 그렇고.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죠. 중3 쯤 되니까 ‘아 우린 너무 어려서 안 되나보다’ 싶었어요. 그렇게 포기할 즈음에 길거리에서 명함을 받았는데 에스엠(SM)인 거예요. 그때 에스엠은 현진영 씨가 있던 곳이고 유영진 씨가 있었으니까 두근두근 했죠. 그리고 그때 당시만 해도 저희에게 이수만이란 사람은 연예인이잖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MC. 그러니 믿을만한 회사였으니까 친구들하고 가서 오디션을 봤는데 저만 붙었죠. 사실 에쵸티가 다섯 멤버를 확정하고 연습한 기간은 1년 밖에 안 돼요. 캐스팅까지 합치면 1년 7, 8개월 정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첫 앨범 받았을 때에요. 앨범을 받는 순간에 데뷔하기 전 3, 4년 고생했던 게 떠올랐거든요. 그 행복은 어떤 것하고도 바꿀 수가 없어요.
당시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은.
「아이야」를 가장 좋아했어요. 3집 까지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다 사이프레스 힐이다 여러 그룹들의 모방, 모방을 넘어선 표절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잖아요. 저흰 다 챙겨봤거든요. 좋은 말보단 그런 것들이 어떻게든 많이 들리더라고요. 좋은 말은 팬들이 해주지만 나쁜 말은 되게 다양했거든요. 이 그룹이 이렇게 인기가 많아져서 우리 음악계를 끌고 가는 시스템이 맞느냐, 곡부터 표절인데 뭘 음악적으로 논하느냐, 심지어 어떤 방송DJ 분이 “굉장히 여러 그룹의 노래를 짜깁기 해놨네요”하는 말도 생방으로 들었죠. 그런 논란 중에 4집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다행히 그렇게 됐고 원래 있는 방식이라고는 해도 하드코어와 힙합과 클래식을 굉장히 고급스럽게 잘 매치했다는 평가를 처음 받았어요. 그래서 그 곡이 제일 좋아요.
젝스키스를 라이벌로 여겼나.
아이돌 그룹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똑같이 젊은 애들이 거의 비슷한 음악으로 나오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땐 어린 나이라서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 애들이 더 화려해 보이거든요. 음악적인 걸 떠나서 쟤들이 너무 멋있고 우리보다 키도 큰 것 같고 얼굴도 더 잘 생긴 것 같고. 그래도 솔직히 하나 저희가 자부했던 건 “랩 노래는 우리가 좀 낫지 않아?” 이런 거였죠. 근데 (강)성훈이 목소리가 너무 예뻤어요. 저는 목소리가 예쁘기보다는 테크닉으로 승부하려고 했는데, 성훈이는 믹스할 때도 보컬이 앞에 딱 나와 있었죠. 제 보컬은 뒤로 빼고 리버브를 먹여서 신비하게 만드는데 걔는 정말 차 안에서 들어도 듣기 편했으니까요. 당시엔 ‘저희는 동료라고 생각한다, 저희 경쟁자는 우리 스스로다’라고 얘길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되게 불안했어요. 지금도 아이돌 후배들은 항상 불안해요. 그건 평생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솔로로 나와선 왜 발라드에 악센트를 뒀나. 음악성 때문인가.
데뷔하기 전에는 록을 좋아했지만 에쵸티 3집 때 발라드, 밝은 곡을 쓰고 4집과 5집에서는 러브 송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까 제 감성을 들여다보니 제가 굉장히 슬로우, 서정적인 곡들을 좋아했더라고요. 워런트(Warrant)의 「Cherry pie」를 좋아해도, 「Let it rain」이 있어서 그 그룹을 좋아했고, 콰이어트 라이어트(Quiet Riot)나 퀸을 좋아한 이유도 그렇고. 제 안에 그런 감성적인 게 있더라고요.
로맨틱하고 멜로딕한 부분?
네, 리드미컬한 부분보다도 그런 쪽이 있었어요. 그래서 솔로로는 내가 하고 싶던 걸 하자 그랬죠. 여기에 덧붙여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에쵸티는 해체했고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음악적으로 보일까 하는 고민을 해서 재즈를 앨범에 이용을 했죠. 재즈에 그렇게 조예가 깊지 않았고, 스탠다드 팝이나 조지 마이클의 「Kissing a fool」, <Songs From the Last Century> 이런 걸 좀 좋아했을 뿐이었죠. 앨범 타이틀은 재즈를 할 수 없으니 발라드로 가지만 수록곡은 음악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자. 주위에선 엄청 반대했죠. 무슨 에쵸티가 재즈냐, 회사에서도 너무 한 거 아냐 등 얘기가 많았어요. 그때 정원영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재즈곡을 달라고 부탁드리니 당황하시더라고요. 왜 재즈를 하려고 하느냐, 재즈를 좋아하긴 하냐고 물으셨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셨나 봐요.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제 의도는 불순했죠. 그때 정원영 교수님 곡 외에도 다른 분들의 재즈곡을 실었는데 보컬이 재즈라기엔 엉망이에요. 얼굴 붉어질 정도예요. 그 때는 재즈를 실으면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인정해주겠지 해서 담았는데 그 뒤로 진짜 재즈가 좋아지면서 굉장히 부끄럽더라고요.
이후 3집에서 상의 탈의 앨범 커버를 보고 놀랐다. 당시 복근 노출이 유행이었다.
그게 2005년이었는데 2004년쯤부터 복근 붐이 와서. 권상우 씨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하면서요. 2집까진 1집과 패턴은 같았어요. 그러다 3집이 됐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진짜 오만했던 거죠. “이정도면 나 음악적으로 인정받은 거 아닌가. 그러니 이번엔 좀 멋있는 걸 해보자!” 그렇게 해서 「가면」이란 곡을 하고 커버도 너무 감성적인 것 말고 진짜 멋있게 해보자 해서 운동 중독 수준으로 운동을 해서 몸을 키우고 김중만 선생님께 사진을 부탁드리고 그랬죠. (웃음) 발라드도 있지만 알앤비 베이스에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음악을 준비 했었죠. 「가면」, 「나비」 같은 곡들. 이때부터 활동이 좀 줄고 중국을 자주 가기 시작했지만요.
중국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투자라고 생각했어요. 음악인 강타로서의 투자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로서 총체적인 투자요. 그리고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서의 투자였죠.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중국 진출하는 저희 후배들이 ‘에스엠 차이나’를 통해 그런 시행착오는 겪지 않게끔 선례를 밟아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비즈니스적인 측면인데.
그렇죠, 그건 무조건 있었죠. 그건 배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중국에서 한창 활동할 때 멘탈 측면에서 흔들렸던 건 ‘난 과연 음악 하는 사람이 맞나’ 하는 고민 때문이었어요. 한 5년 동안 아무런 음악 활동이 없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중국 간 게 몇 년인가.
2001년부터 가긴 시작했는데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갔어요. 2008년에 입대하고 제대하고서도 많이 갔죠. 제대하면 사람이 급해지잖아요. ‘한국에서 이미 나는 대중적으로는 많이 잊혔어, 그럼 에스엠 이사로서 내가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선배로서 후배들이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제시해주는 게 내 위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중국 시장이었죠. 중국에서는 아직도 저를 현역에서 뛰는 아티스트로 봐주니 그 쪽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자, 그리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에쵸티를 논하면서 2000년 2월, 국내외로 떠들썩했던 중국 북경 공인체육관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다름 아닌 그들을 ‘한류’의 시작자로 견인한 결정적 전기(轉機)가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북경의 한 신문은 중국의 이른바 10대를 가리키는 ‘소(小)황제’들의 믿지 못할 광적인 무대 반응을 보고 ‘한류(韓流)풍폭!!!’이란 헤드라인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사실 에쵸티의 음반이 이전 1998년에 이미 중국에 발매되었다.
이를 전제하면 중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에쵸티와 함께 본격 개시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후 안재욱, 베이비복스, 엔알지 등 우리 가수들이 중국 땅에 들어가면서 한류라는 말은 보통명사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1999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내 대중음악의 해외홍보를 위해 한류라는 말을 사용했다. 강타는 그 시절을 돌이키면서 후배 아이돌이 당연하게가 아니라 ‘절실하게’ 한류를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중국 활동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음악적인 것도 있지만, 어쨌든 기둥이 음악이어도 엔터테이너로서 가지들이 펼쳐지잖아요. 중국에서 10년간 활동하면서 그 가지의 풍성함을 좀 발판으로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중국인들이 원하는 아티스트의 활동 성향이나 음악을 기반으로 뜬 아티스트들의 이후 행보, 예능이나 영화 등으로 뜬 아티스트의 궤적 이런 것들에 대해 중국 시장의 트렌드를 많이 관찰했어요. 어쨌든 제가 대형 소속사의 이사로 속해있기 때문에 저희 아이들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죠. 그리고 지금 당장은 사드 때문에 경색되었다고 해도 중국시장의 선점이 세계를 뒤흔들 날이 적어도 15년 안에는 올 것이라고 믿어요.
중국은 이수만 사장의 최종 목표지 아닌가.
근데 가서 보니까 할리우드나 빌보드 쪽도 차트가 여기로 넘어오는 시기가 진짜 곧 생길 거라고 저는 봐요. 미국은 미국 차트대로 가치가 있지만. 그래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고민을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 했죠.
한류는 음악의 측면에서 에쵸티의 2000년 중국 북경공연을 시작으로 꼽는다. 그 공연을 회상한다면.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2013년에 에스엠타운이 북경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 곳에 8~9만 명이 들어가는데 단순히 언론 발표용이 아니라 정말로 매진이 되어서 꽉 찼어요. 제가 무대를 하러 나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우리의 경우 당시 북경 공인체육관이었는데 그때는 만석이 안 되었거든요. 7~8천 석 규모였어요.
공연한 체육관은 북경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나.
그때는 북경이 막 개발 되던 시기라서 큰 경기장은 허허벌판에 있었죠. 그래서 공연장이 좀 생뚱맞은 곳에 있었는데도 관객들이 7~8천명이 왔어요. 2013년에 에스엠타운 북경 공연 끝나고 저희 가수들에게 이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지금 8~9만 명 채우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7~8천석 채우고도 너무 신기했다. 난 너희들이 대단하면서도 안타깝다. 이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 8~9만 명의 관중과 공연을 보는데 2000년 수도체육관 공연이 생각이 났거든요. 그때 전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했어요. 중국이란 곳을 처음 오는데 저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제 이름과 에쵸티를 연호하고,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잖아요. 한국인이 아닌데 저희를 아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죠. 한 번도 온 적 없는 나라에 우리를 알아보는 팬들로 인해 공항이 마비가 될 정도였죠. 이런 것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북경 공항에 내릴 때부터 그랬나.
네, 이미요. 그리고 그때 가방에 태극기 달려있는 걸 보는데 그게 너무 찡하잖아요. 태극기와 중국 국기가 같이 달려있고 가방에는 에쵸티 배지가 달려있고.
왜 태극기를 달고 왔을까. 아무리 좋다고 남의 나라 국기를 들고 와 흔들기는 쉽지 않은데.
저희도 신기해했어요. 그때 했던 생각은 ‘돌체 앤 가바나’라는 브랜드가 좋아지면 이탈리아 국기도 멋있게 보이고, 힙합이 좋아지면 성조기가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 문화를 좋아하는 거니까. 중국도 한국의 이런 것들이 좋은데 ‘태극기도 멋있네!’ 하고 생각한 게 아닐까 했죠. 당시에 실제로 캐스팅 팀에서 나가서 중국인들에게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태극기 자체가 멋있다’는 얘기를 하더래요.
한류 전도사라는 자부심이 있겠다.
자부심도 있었고 후배들에게 좀 원망도 있었어요. 에쵸티 해체를 하고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요. 저희가 문을 열었는데, 저희도 들어가서 그 안에서 놀고 활동하고 싶었지만 저희는 바로 해체를 해버렸거든요. 북경에 에쵸티 다섯 명이 완전체로 간 건 2000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한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데…. 이후로 후배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고 한류를 더 크게 만든 건 박수쳐줄 일이고 부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저희는 그걸 절실하게 원했고 신기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친구들은 당연하게 가서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때로는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寒)한류가 생기고 반(反)한류가 생긴 거죠. 그럴 때는 속으로 원망스럽더라고요.
현재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인데 회사에서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나.
저는 낯을 가려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로 확 바뀌는 걸 두려워해요. 그러다보니 (문)희준이 형이 에스엠을 나갈 때도 혼자 남은 건데, 다른 회사에서 제안을 받아도 어딜 가서 또 어떻게 적응하기가 좀.... 다른 데 가서 적응하고 거기서 둥지를 틀기 뭐하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 계속 있자 해서 남았는데, 회사와 이수만 선생님 입장에서는 속으로 그게 고마우셨나 봐요. 그러니까 강타라는 아티스트는 지금의 가치만으로 에스엠에서 볼 것이 아니다 뭐 그런. 계산기 두드려서 회사에 줄 이득을 계산할 존재는 이제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오래한 사람에 대한 예우 아니면 의리일 것 같다.
둘 다 공존을 했던 것 같아요. 오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요. 누굴 만나도 얕게 여러 명을 만나진 못하고. 저는 여기 계속 있으려고 마음먹었으니까, 이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요. 회사 모토에 맞춰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이사로서 회사가 원하는 걸 해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제가 회사에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비등기로 해주신 거거든요. 회사 방침이 아티스트들은 법적 책임은 없게 해야 한다는 게 있어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동기부여’지요. 가장 가깝게는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샤이니, 특히 슈퍼주니어에선 이특 같은 친구들에게요. ‘저 형이 회사에서 저렇게 움직이니까 회사 안에서 존중을 받고, 존중을 받으면 대외적으로 저런 힘이 생기는구나!’ 뭐 그런 거요. 행복한 생각이잖아요.
작년에 EP <Home> 챕터 1이 나왔는데 챕터 2는 언제쯤 나오나.
이제 나와야죠. 라디오를 하다 보니 요즘 실시간으로 인기 있는 곡들을 듣고 나는 무엇을 좇아야 하나 하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기왕 냈으면 음원 차트에서 순위가 높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가능성은 사실 높지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유행을 빌려서 트렌디한 친구들이 피처링을 해서, 콜라보를 해서 그 친구들의 힘을 빌리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제가 음악을 ‘월간 윤종신’처럼 꾸준히 해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한 스텝 더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니 앨범을 하나 더 제작할 생각이에요. 챕터 2가 될 거고요. 공연은 제가 작년에 8회 정도 했는데, 이걸 소규모로 더 줄여서 가깝게, 소통하면서 여기저기 더 돌아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무엇보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원조 아이돌로서 후배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내실이죠. 지금이 유리할 때에요. 아이돌이란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거든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꼭 음악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 본인이 나아갈 내실을 다져라. 특히 유리할 때 내실을 다져라. 또 이 말도 해주고 싶어요. H.O.T.란 그룹이 다섯 명이었을 때 10만 명의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었으면 해체하고 솔로로 나오면 2만 명은 내 거겠지, 그중에 내가 인기가 솔직히 말해서 좀 상위권이었다고 치면 2만 5천, 3만은 될 거야, 아니에요. 5천으로 줄어요. 그걸 아이돌 그룹 아이들은 아무리 들어도 체감을 못 해요. 저도 그랬고요. 그래서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앨범, 좋아했던 앨범을 소개해 달라.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Appetite For Destruction>, 종전에 언급한 조지 마이클의 <Songs From The Last Century>, 그린 데이(Green Day)의 <Dookie>요. 건즈 앤 로지스의 <Appetite For Destruction>의 이유는 개인적이에요. 제 음악의 시작이었거든요. 여러분도 ‘내가 언제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지’ 하는 그 음반은 항상 기억할 의미가 있다는 뜻에서 권하고요. 그린 데이의 <Dookie>는 굉장히 편하게 록을 접할 수 있는 앨범이잖아요. 록을 많이 권하고 싶어요. EDM이나 팝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잘 찾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쉽게 들을 수 있는 록의 재미를 그린 데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권합니다. 조지 마이클은 돌아가셨지만 제 음악적 롤 모델이었어요. 되게 다양한 음악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이 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이렇게 많은 장르에 다 깊이가 있을까, 장르를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심이 있었거든요. 그런 제게 뒤통수를 때린 음반이 <Songs From the Last Century>였어요. 예전 음악을 리메이크해서 이정도 퀄리티를 만들어 내면 다른 음악도 이 정도 할 능력치가 있다는 게 증명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 롤 모델이에요.
인터뷰 : 임진모, 정민재
정리 : 임진모
사진 : 한정은
관련태그: 강타, 문화, 복고열풍, H.O.T., 아티스트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