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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페미니즘 이론의 획기적인 전환점

응답하라 1990, 현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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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어려운 책을 어렵게 읽었던 시대. 쉬운 책, 쉽게 읽히는 리뷰가 대세인 요즘, 도전정신 반 허세 반으로 붙잡았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이 문득 떠오른다. 90년대 스타일을 간직한 번역가 이정인씨의 현대 사상가 리뷰를 열두 달 연속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2017.06.20)

 

001 젠더 트러블 표지 이미지.jpg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은 80년대 들어 심각한 내부 논쟁에 휩싸였다. 흔히 “페미니스트 섹스 워즈(Femisnist Sex War)”이라고 불리는 포르노그래피를 법으로 금지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쟁으로 페미니즘 운동 진영이 양쪽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보수 우익과 연합했고, 다른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은 게이-레즈비언 운동과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그에 대립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낀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디스 버틀러(1956~)는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단숨에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떠올랐다.

 

페미니즘의 해체

 

1960년대 미국은 성해방의 시대였다. 초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성해방을 적극 지지했고, 여성해방과 성해방이 동일시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질서에서 성적 자유주의가 여성에게 유리하지만 않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여성들은 자주 성폭력 위기에 직면했고 사회는 보호는커녕 “헤픈 여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때문에 70년대 중반부터 성적 자유보다 반성폭력 문제가 페미니즘 운동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한편 성해방의 시대를 거치며 창작물에서 성 묘사 수위가 매우 높아졌는데, 특히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포르노그래피 영상물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러한 영상물들은 실제 성행위 뿐 아니라 주류 창작물에서 담기 어려운 강간, 근친상간, 소아성해, 가학행위 등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수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이를 여성 일반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했다. 이는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었으며, 포르노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70년대와 달리 사회적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 운동은 의도와 무관하게 기독교 및 보수우익 속에서 새로운 지지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도덕적 보수주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고, 사도마조히즘, 성매매 문제 등으로 논란이 확대되며 80년대 초반 페미니즘 진영은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이 논쟁은 페미니즘 내부 논쟁을 넘어 포르노 금지 진영과 게이-레즈비언 운동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게이-레즈비언 활동가들은 성소수자의 성애가 포르노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포르노 금지 입법은 국가권력에게 성소수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60년대 급진주의 운동의 산물인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이 대립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1990년대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즘 경향은 이러한 80년대의 대논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페미니즘이 “여성” 일반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중산층 백인 여성의 이해 중심이었다는 반성 아래 페미니즘의 대의를 지지하면서도 민족, 인종, 계급 등 여성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목소리들에 주목하고자 했다. 예컨대 인도 출신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3세계 여성의 문제를, 아프로-아메리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는 계급과 인종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LGBT(Lesbian?Gay?Bisexual?Transgender)인 주디스 버틀러는 아예 “여성”이라는 범주, 즉 젠더 개념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는 LGBT이자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규정한다. 70년대 말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버틀러는 1984년 헤겔의 욕망 개념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비교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하지만 버틀러는 무엇보다 1990년 『젠더 트러블』을 발표하면서 대표적인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가로 널리 알려졌다.


『젠더 트러블』이라는 표제는 퀴어 영화의 개척자 존 워터스의 영화 <여자 트러블 (Female Trouble, 1975)>를 패러디한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70년대 드래그(자신의 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성의 옷을 입는 복장 전환자를 말한다.)의 아이콘이었던 디바인의 연기는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젠더란 것이 지속적인 연기의 일종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처럼 버틀러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온 젠더라는 개념에 트러블을 일으키려 한다.

 

버틀러는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이 현 사회질서에서 부여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정체성이 무비판적으로 저항의 주체성으로 상정되는 정당하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전제들을 논리적 극한으로 밀어붙인 끝에 섹스와 젠더 범주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로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구분되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이라는 젠더 개념이 사회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혔다. 이러한 젠더 개념은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고 이성애 체제에서 주어진 성역할에 효과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즉,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처럼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만들어진 성으로서 젠더의 토대에 자연적인 성인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고 비판한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버틀러는 만약 젠더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왜 그것이 굳이 두 가지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버틀러는 레즈비언 이론가인 모니크 위티그와 푸코의 논의를 빌려와 모든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한 허구적 구성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젠더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으로 나아간다. 만약 섹스와 섹슈얼리티도 구성된 것이라면 과연 젠더란 무엇인가?

 

버틀러는 젠더는 강제력이나 폭력과 함께 작동하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 속에서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섹스가 먼저 존재하고 젠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성애 체제가 두 개의 성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버틀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비롯하여 신체적 차이에서 모종의 본질적 “여성성”을 부여하는 모든 이론적 시도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러한 이론들은 과거에 페미니즘 친화적인 이론으로 여겨졌으나 버틀러가 볼 때 오히려 이성애 체계와 가부장제를 공고화하는 데 공모하고 있을 뿐이다.

 

드래그는 말할 수 있다

 

버틀러의 작업은 젠더를 섹스라는 자연의 족쇄에서 해방시킨 결과 LGBT의 성애가 “강제적 이성애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젠더 실천으로서 위상을 부여받는데 큰 공헌을 했다. 사실 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LGBT의 성애를 삐딱한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게이의 드래그는 여성 비하적인 것으로, 부치와 팸 같은 레즈비언 내의 성역할에 대해서는 이성애적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버틀러는 부치/팸, 게이탑/바텀, 드래그 등 성소수자의 성애 관행이 단순하게 기존의 이성애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의 과장된 이성애 연기는 오히려 이성애 체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소수자의 성애는 진짜를 모사하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보이는 것도 사실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LGBT 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이러한 논의는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 할 수 없다”와 같은 탄식을 넘어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들의 일상 행위에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버틀러는 퀴어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스피박처럼 버틀러의 전복적인 사고는 푸코와 데리다 등 프렌치 이데올로기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버틀러에게 푸코의 계보학과 데리다의 해체론적 방법은 기존의 상식을 전복하는데 매우 유용한 무기로 기능한다. 하지만 버틀러의 논의는 그 한계도 함께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버틀러는 레즈비언 되기를 통해 이성애 체계를 근본적으로 전복해야 한다는 위티그의 주장은 결국 근본적인 혁명의 불가능성 때문에 근본적인 순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위티그의 주장이 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버틀러의 논리 역시 포스트 구조주의적 급진성이 가지고 있는 문화주의?자유주의적 경향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섹스/섹슈얼리티를 문화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버틀러의 논리 또한 도발적이고 참신하긴 하지만 근거가 취약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젠더 트러블』에서 섹스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긴 하지만 버틀러는 그것을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했던 것처럼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이는 버틀러의 책 전체를 실제적 분석이라기보다 선언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또 구조주의적 결정론을 피하기 위해 받아들인 수행이론은 교묘하지만 여전히 저항을 개별적 행위의 집합으로 파악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이론의 젠더 논의에 다시 돌아가기 힘든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저 / 조현준 역 | 문학동네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을 허물고, 지배 권력의 토대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다. 저자는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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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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