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경험도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었다
문학출판계 성폭력ㆍ위계폭력 문제에 부쳐
가십처럼 자극적으로 문학출판계 상황을 다룬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어지러운 시국에도 진지하고 끈질기게 지켜봐 주고 있다는 데에서 큰 힘을 얻는다. 어느 계(界)든 건강한 바깥은 언제나 필요하다.
출처_imagetoday
스물네 살에 편집자가 되었다. 가을 학기에 졸업해서, 졸업식을 6개월 남겨두고 출근을 먼저 했다. 책상은 문이 보이는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데, 종종 그 문으로 얼굴을 아는 작가가 걸어 들어올 때가 있었다. 책날개 사진으로만 익힌 얼굴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을 때 벅찼고 두근거렸다. 얼마나 동경했는지.
그 동경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동경이 진저리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뜸 신체적인 접촉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각한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토커처럼 낮이나 밤이나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왔던 작가가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작가는 나를 ‘미스 정’이라 불렀다. 성폭력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위계폭력이었다는 걸, 위계폭력이라는 말을 알게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20대 중반의 여성 편집자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사건들을, 그간 개인적 불운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30대의 작가가 되자 불쾌한 일을 당하는 빈도수가 급격히 낮아져서 착각했던 부분도 있다. 요즘 출판계가 정말 좋아졌구나, 분위기가 바뀌었구나, 쾌적해졌구나 했었다. 나이가 더 적고 권력이 더 없는 이로 타깃이 교묘하게 옮겨간 것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리석고 좁은 시야였다.
지난 10월부터, 문학출판계 성폭력ㆍ위계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이 잇달았다. 처참한 마음으로 고발 글들을 읽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일들을 이어보고 꿰어 맞춰보니, 어마어마한 지옥도가 그려졌다. 내가 지옥에 서 있었구나, 우리가 지옥에 서 있었구나, 처음 며칠간은 멎어버린 머리로 되뇌었다. 그 어떤 경험도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었다. 구조적인 착취였는데, 지금껏 그 추악한 구조를 볼 수 없게 눈이 가려져 있었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이 아니었더라면 영영 눈뜨지 못했을 것이다. 출판 노동자들의 사례가 먼저 터져나왔고, 이어 글쓰기 교육기관에서 일어난 일들이 밝혀졌는데 너무나 지독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예술대학에서, 사설 기관에서 강의자들이 학생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 숨겨져 있던 가파른 권력의 불균형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한쪽에겐 간절히 원하는 문학인의 꿈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겐 그 길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이 말이다. 문학을, 책을 흉기로 쓴 것이나 다름없다.
출판 노동자나 학생보다 수는 적지만, 작가인 피해자들도 없지 않다. 상대적으로 연령이 낮거나 활동 기간이 짧은 여성 작가들이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단순히 예술가들이 방종하기에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젠더, 나이, 등단년도, 활동 지역, 영향력, 함께 일하는 출판사 등 수많은 요인들이 얽혀 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복잡한 문제인데, 소수의 가해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이 주어졌고 그들이 그 힘을 삼가지 않고 난폭하게 휘둘렀다는 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충격과 좌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1월 11일, 고양예고 강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고발자 5’를 지지하는 졸업생 연대 ‘탈선’의 성명 발표에 갔었다.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을 꽉 채우다 못해 복도까지 메운 사람들을 보고 내내 조이던 가슴이 편안해지고 큰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음 세대의 작가들은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겪어서는 안 될 폭력을 겪었지만, 이들이 만들어갈 문학계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나을 것이란 믿음으로 아무 방어벽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을 약간이나마 대체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엔 신문, 방송, 잡지 등 여러 매체에 종사하는 언론인들도 다수 와 있었으며 최근까지 후속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십처럼 자극적으로 문학출판계 상황을 다룬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어지러운 시국에도 진지하고 끈질기게 지켜봐 주고 있다는 데에서 큰 힘을 얻는다. 어느 계(界)든 건강한 바깥은 언제나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직접 결성한 모임들과, 피해자들을 지지하는 모임들과, 그 모임들에 힘을 실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주체가 여럿이라는 게 가장 큰 희망이며, 움직임은 이제 SNS 바깥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출판계 내 성폭력, 위계폭력을 말하는 목소리들이 새로운 권력이 될까 우려하는 모양인데, 너무 이른 우려가 아닐까? 이제 막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침묵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다. 설령 이 목소리들이 문학계를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힘 중 한 갈래가 된다 해도, 부작용보다 정화작용이 더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망한다.
가깝고 먼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선 말하면 말할수록 다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충고를 들었다. 맞는 말이다. 다칠 것이다. 다치고 지칠 것이다. 문학출판계에 반성폭력 문화가 확립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며 그 몇 년 동안 오갈 오해와 비난, 잃어버릴 신뢰와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그렇지만 다칠 걸 감안하고라도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분명히 있으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다쳐가면서 말하고자 한다. 번갈아 가며, 무게를 분산해가며 계속 말할 것이다.
변화는 변화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 언제나 한 발 늦게 온다는 걸 자주 되새기는 요즘이다. 끝내는 당도할 다음 시대를 기다리며, 다치고 지쳐도 쓰러지진 않으면 좋겠다. 높은 방파제를, 튼튼한 지지대를, 촘촘한 그물망을 머릿속으로 그려가고 있다.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보건교사 안은영』『피프티 피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