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성별’이 연관 검색어로 뜨는 특이한 작가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기타무라 가오루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이타마 현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인 1989년, 미스터리 시리즈 『하늘을 나는 말』로 등단했는데, 여대생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역시 여성스러운 화법과 허를 찌르는 여성 인물의 심리 묘사를 보여주었다. 당시까지 얼굴을 밝히지 않은 ‘복면 작가’였던 기타무라 가오루는 자연스레 여성 작가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정체는 그가 1991년, 『밤의 매미』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드러났다.
고소한 상상과 소소한 일탈
그는 뛰어나면서도 ‘다작’하는 미스터리 작가이다. 미스터리 시리즈로 데뷔한 이래 추리단편집을 비롯해 다수의 미스터리 장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2006년에는 『일본 동전의 수수께끼』로 제6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받았고, 대표작 『스킵』으로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며, 2009년에는 연작 단편집인 『백로와 눈』으로 여섯 번을 도전한 끝에 마침내 제141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그의 대표작 『스킵』(17세 소녀가 낮잠에서 깨어보니 42세의 중년이 되어 있다.)의 설정이나 『턴』(교통사고를 계기로 그 전후의 일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판화가의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미스터리는 틀림없이 미스터리인데 잔혹한 살인사건이나 복잡한 복선 같은 것은 없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그의 작품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대신,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소한 상상과 소소한 에피소드, 엉뚱한 일탈과 일상의 소중함 등을 인간미 있게 그려내는 것이 기타무라 가오루 작품의 매력. 소박한 그 매력에 빠졌는지 번역을 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의 문장에 공감하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그는 지루하디지루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는 인간의 숙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일상에서 문득 펼쳐지는 상상과 판타지, 그리고 반대로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상 속에서 끝끝내 반복되는 일상,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그는 특별할 것 없지만 소중한 하루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일상에 술과 사랑이 끼어들 때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는 문예잡지의 편집자 코사카이 미야코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술과 사랑이 끼어들 때 무료하게 흐르던 일상은 한순간 정지하거나 강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퇴근 후에 꺾는 술 한잔과 사랑하는 이와 근사한 분위기에서 마시는 와인 한잔. 평범한 이들의 삶에선 그런 순간들이 최고의 ‘드라마’다. 이미 신데렐라의 꿈은 접었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언감생심이며, 단지 정갈하게 차린 저녁상에서 함께 반주를 곁들일 입과 마음이 맞는 상대를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라면, 이 이야기에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들은 그렇다고 보는 눈이 있는데 아무나 만나 결혼할 생각은 없고, 하지만 점점 어린 여자에게 밀려나는 기분이 들고, 시집 잘 가는 친구에 대한 질투도 느낀다. 여자라면 공감할 그 복잡 미묘한 기분들을 남성 작가인 기타무라 가오루가 꿰뚫고 있다는 것이 소름 돋았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아내는 여자의 마음에 정통한 남편이 있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원제는 ‘술만 있으면 어디든 고향’, ‘술 하면 미야코’였는데…
출판사로부터 처음 이 책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의 번역 의뢰를 받고 원서를 검토했을 때 한 가지 문제에 부딪쳤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일본어 언어유희를 어떻게 우리말로 옮긴단 말인가.
‘글’을 가지고 고군분투하는 출판사 직원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주고받는 농담도 온통 언어유희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엄청난 수의 각주를 달았다가 뺐다가 하면서 답을 내려고 했지만, 일본어 언어유희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는 데는 많은 차질이 있었다.
이 책의 원제에도 언어유희가 숨어 있다. 일본 속담 중에 ‘住めば都(살면 그곳이 어디든 서울)’이라는 말이 있다. 책의 원제는 ‘飮めば都’. 속담을 살짝 비틀어 재치 있게 붙인 제목으로, 번역하자면 ‘술만 있으면 어디든 고향’ 정도가 된다. 동시에 ‘都’는 작품의 주인공 ‘미야코’의 이름이어서, 제목은 ‘술 하면 미야코’라는 뜻도 된다. 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원제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라는 제목을 생각해냈고, 원저작사도 이에 동의했다. 이 기가 막힌 제목은 이렇게 탄생했다.
기타무라 가오루는 에세이, 동화, 평론, 심지어 하이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한 다재다능한 작가이기도 하다. 일본에선 꽤 인지도 높은 작가지만 한국에서 몇 작품이 소개됐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쉬웠는데,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분위기라 감회가 새롭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를 계기로 절판됐던 그의 작품들이 재출간되고 숨어 있던 작품들이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기타무라 가오루 저/오유리 역 | 작가정신
제141회 나오키상 수상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의 장편소설이다. 허한 마음과 심심한 혀를 달래주는 술과 사랑의 이야기로, 풍류라면 빠지지 않는 문예잡지의 편집자 코사카이 미야코의 배꼽 잡는 음주 해프닝과 맨 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독한 연애사, 일과 결혼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루하루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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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신여자대학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표적인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도련님』, 『마음』, 『인간실격. 사양』 emd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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