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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신곡』의 지옥은 천국에 이르는 길목

교수는 단테가 남긴 것은 정의가 아닌 질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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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속에는 고대의 숭고한 인문 전통이 있고, 중세의 절대적인 초월자를 향한 열망이 담겨있습니다. 당시에 새롭게 나타난 개인이라는 존재에도 주목했고요. 세속적인 욕망을 긍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도로 세련된 문학 형식, 언어를 담아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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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다


지난 22일 저녁, 논현동에 위치한 북카페 ‘북티크’에서 또 한 번의 특별한 강연이 열렸다. 예스24와 민음사가 함께하는 ‘2015 세계문학 고전학교’의 일환으로 ‘10월의 세계문학 강의’가 마련된 것. 단테의 『신곡』으로 채워진 이 날의 이야기를 이끈 주인공은 박상진 교수였다. 오랜 시간 단테를 연구해 온 그는,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에서 비교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단테라는 샘은 줄기차게 흘러내려서 다방면으로 뻗어 내렸습니다. 문학에 있어서 단테로부터 영향 받지 않은 작가는 없을 것 같아요. 미술, 특히 그림에도 많은 영향을 줬고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단테의 작품 속에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기본적인 문제들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정의, 죄와 벌, 선과 악, 섭리와 의지, 사랑과 증오, 겸손과 오만, 절제와 탐욕 등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모들이 다루어졌죠. 그래서 단테는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시대마다 새롭게 부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맞는 얼굴을 하고 새롭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모든 고전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테의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박상진 교수의 말처럼, 단테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세월을 견뎌내며 변함없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의 우리가 그의 작품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테는 시대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어떤 시대이든 예외가 없지만, 단테가 살던 시대는 유독 그랬던 것 같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거든요. 과도기 중에서도 정점이었죠. 단테의 시대에서 아직까지 중세는 잊히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였고, 근대는 외면하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와버린 미래였습니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이 변하는 시기였고 동시에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는 시대였죠. 그 시대를 단테는 정확하게 인식했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인간의 모든 것들을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단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시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장소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과도기의 정점에 있었던 ‘피렌체’라는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단테는 귀족의 신분으로 변화에 참여할 수 있었고, 좋은 스승을 만나 교육을 받으면서 근대적 시민의 역할과 의무를 익혔다. 그 결과 단테는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신곡』 속에는 고대의 숭고한 인문 전통이 있고, 중세의 절대적인 초월자를 향한 열망이 담겨있습니다. 당시에 새롭게 나타난 개인이라는 존재에도 주목했고요. 세속적인 욕망을 긍정하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초월자 중심으로 영생을 얻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 현세에 대한 욕망을 죄악시했는데, 단테는 이것을 긍정한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고도로 세련된 문학 형식, 언어를 담아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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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의 지옥은 천국에 이르는 길목


지옥과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는 『신곡』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상진 교수는 단테가 남긴 것은 정의가 아닌 질문이라고 말한다. 시동생과 사랑에 빠짐으로써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여인 ‘프란체스카’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는 것. 단테는 지옥의 두 번째 구역에서 프란체스카와 만난다. 애욕의 죄를 지은 그녀가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건, 단테가 그 죄를 가장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게다가 단테는 프란체스카의 이야기를 들은 뒤 슬픔 속에 정신을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단테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고정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주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묻는 거죠. 프란체스카의 사랑, 즉 시동생과 형수 사이의 사랑도 사랑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일까’를 자꾸 질문하게 되는 거고요. 제가 생각할 때, 사랑으로 남으려면 ‘사랑이 무엇일까’를 계속 물어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은 죽어버리는 거죠. 정의도 마찬가지예요. ‘정의란 무엇일까’ 계속 물어야지, ‘정의란 이것이다’라고 하는 순간 정의는 죽어버립니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이 그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거죠. ‘인간이란 이것이다’라고 고정해 버리면 인간은 더 이상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신곡』에서 단테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의미들을 켜켜이 쌓아놓았다. 박상진 교수는 이러한 모호성이야말로 문학이 획득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다. 단테 역시 ‘중층성을 지닌 언어’로써 문학 언어를 추구했고,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고 생각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문학 언어를 통해서 단테는 시대마다 적절한 모습을 하고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곡』은 지옥에서 출발해서 연옥과 천국으로 올라가는데요. 단테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옥 없이는 천국도 없다는 거죠. 단테가 구원만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지옥은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그곳에는 구원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곡』에서 단테는 천국만 보여주지도 않고 천국을 먼저 가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옥은 천국에 이르는 길목이라는 거죠. 적어도 신곡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지옥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박상진 교수는 『신곡』의 지옥과 천국을 물질과 비물질의 세계로 구분했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독자들이 천국보다는 지옥의 이야기에 더 깊이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국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곳입니다. 지옥은 아직도 우리의 이해 안에 있는 곳이고요. 우리는 지옥에 있는 죄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천국의 영혼들이 느끼는 기쁨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삶 자체가 지옥에 훨씬 더 가까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 육체의 세계를 살고 있으니까요. 지옥과 연옥은 물질의 세계입니다. 물론 육체 없이 영혼만이 지옥과 연옥에 가지만, 그곳에서 받는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죠. 그러니까 육체의 성격을 지닌 영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은 비물질의 세계예요. 순수한 영혼만의 세계죠. 우리가 도저히 천국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곳이 우리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박상진 교수는 단테에 대해 ‘천의 얼굴을 가진 작가’라고 이야기했다.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가며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단테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묻고 있는 거죠. 단테 역시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고요. 지금은 우리에게 새롭게 진화된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물음이 가장 필요한 시대가 너희가 사는 시대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르네상스와 시작된 근대의 끝자락에 서있으니까요. 이제 근대는 한계에 다다랐고 또 다른 르네상스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진화가 필요하죠. 초월자에 대한 사랑을 품을 줄 아는 종교적인 인간,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도덕적인 인간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단테가 우리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되고요. 그것이 지금 시대에 단테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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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세트단테 알리기에리 저/박상진 역/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시성(詩聖) 단테의 웅장한 서사시 『신곡』은 그가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20여 년에 걸친 유랑 중에 써 낸 작품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서인 동시에, 중세의 모든 학문을 종합하고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고전 서사시 전통을 계승한 이 책에는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역대 황제들과 교황들 등의 실존 인물들과 함께 제우스,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 등의 신화적 존재들, 그리고 성서의 인물인 유다와 솔로몬 등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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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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