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 “상처 없는 삶을 꿈꾸는 건 삶에 대한 무례”
『철학을 담은 그림』 채운
『철학을 담은 그림』은 20여 개의 미술 작품을 통해서 삶과 자아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파울 클레부터 에드바르 뭉크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작가들의 작품이 현실과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고, 그 안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심안이 되어주는 것은 동서양의 철학이다.
그림으로 철학을, 철학으로 삶을 이야기하다
『철학을 담은 그림』의 저자 채운은 한 점의 그림 혹은 조각을 슬쩍 내밀며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안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묻는다.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에서는 진한 피로감이 묻어나오고,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 안에는 환상 속의 사랑이 잠들어 있다.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저자가 제시한 작품들 속에서 독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자신과 현실의 모습이다. 그 안에는 욕망과 갈등과 고통이 어지럽게 뒤엉켜있다. 왜, 이상은 언제나 먼 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곳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걸까. 그때까지 행복은 미뤄둬야 하는 것일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질문들에 저자는 철학적인 이야기들로 답한다.
“지금을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혹은 미래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만드는 한 행복은 ‘없는 것’에 대한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하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여 자체가 아니라 결여가 만들어내는 감정들, 즉 결여를 채우려는 욕심과 결여 상태에 대한 고통, 결여를 채울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이라고 조언한다. 동서양의 철학을 아우르는 그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온 자아와 삶의 모습은 무엇에 기인한 것인가.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생소한 감정과 마주한다.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상식과 환상의 성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파괴’를 경험하는 것이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은 우리 자신의 심연을 만날 기회입니다. 내가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던 진실, 환상 속에서 애써 외면했던 삶의 진실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철학을 담은 그림』은 환상의 성 밖에 실존하는 삶의 진짜 모습에 눈뜨게 한다.
그런 이유로 채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때로는 당혹스럽고, 또 때로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상식’에 맞춰 살지 않으면 낙오될까 봐, 손가락질 당할까 봐 두려워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 놓은 ‘자아의 환상’ 속에서 휘청거리고 계신가요?”라는 날카로운 질문은 애써 외면해 왔던 진실을 들춰낸다. 그런가 하면 “불행과 고통을 피하고 기쁨과 행복만을 바라는 건 일상적인 욕망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환상이죠. 늙고, 죽고, 병들고, 이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게 삶이니까요” “상처 없는 삶을 꿈꾸는 건 삶에 대한 무례입니다”라는 이야기는 가만히 어깨를 다독이는 듯 하다. 계획은 어긋나고, 기대는 빗나가고, 성공의 순간은 멀고, 실패의 순간은 가까운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에서 위안을 얻는 까닭이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철학을 담은 그림』 안에서 그림으로 철학을, 철학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저자 채운. 그녀와의 만남은 고전비평공간 ‘규문奎文’에서 이뤄졌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고고미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저자는 또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배움을 옮겨갔다. ‘규문奎文’의 연구원으로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강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철학을 담은 그림』을 함께 되짚는 시간이 되었다. 그 속에서 한층 또렷해진 삶의 실체를 전한다.
『철학을 담은 그림』은 자신과 삶의 실체를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곳 ‘규문奎文’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갖게 된 의문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안정된 삶을 원하고,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왜 별로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죠. 돈이나 배움의 양과 관계없이 삶에 대해서 공허함을 느끼는 건 공통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잘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그림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쉽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어요. 조금 더 쉽고 말랑말랑한 글로써 자신의 자리를 바라보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림과 철학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작가님의 지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고미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셨고 현재는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계신데요. 철학과 미술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원에서 고고미술학을 공부하면서 미술을 너무 양식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철학을 연구하는 공간에서 공부를 시작했죠. 만약 미술사만 공부했다면 금방 지겨워졌을 것 같은데, 철학을 같이 공부하면서 새롭게 미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까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후에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는 일도 시시해졌죠. 학교 밖에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이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근대를 전공하다 보니까 고전이라는 세계와 만나게 됐어요. 근대라는 공간이 묘하게 전근대와 현대가 섞여 있는 공간이잖아요. ‘근대 이전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고전의 세계에 다다른 거죠. 여기가 보물창고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점차 공부의 영역에 대한 집착이나 당위가 없어졌다고 할까요.
『철학을 담은 그림』에 실린 그림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하신 건가요? 각각의 주제에 맞는 미술 작품들을 고르셨나요?
그렇죠. 어떤 이야기는 그림이 너무 좋아서 시작하게 됐어요. 파울 클레의 그림이 그렇죠. 제가 워낙 클레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은 주제를 정하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림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찾았죠.
파울 클레의 그림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파울 클레는 회화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철학 공부를 하다가 우회해서 클레를 마주치게 되는 계기들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러면서 클레가 남긴 노트북과 그림 같은 것들을 찾아서 오랫동안 봤고요. 완전한 추상도 아니고 완전한 구상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그림의 기본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 돌파를 해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철학을 담은 그림』에서 들려주신 파울 클레의 삶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아이처럼 단순해지고 깊어진 그림을 그리게 되었잖아요.
무언가를 못하게 된 순간에 그것을 통해서 새롭게 하게 되는 걸 발명한 거죠. 젊은 시절의 클레는 아주 잔 터치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피부가 서서히 굳어지는 병을 앓게 되면서 잔 터치들을 할 수 없게 됐죠. 그러면서 선이 아주 단순해지고 굵어진 거예요.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에 누군가는 그 ‘할 수 없음’이 새로운 걸 ‘할 수 있음’으로 돌파한, 에너지의 전환 같은 게 있었다는 거죠.
『철학을 담은 그림』에는 망상이나 오해, 환상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 문제들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제가 몇 년 동안 불교를 비롯한 철학 공부를 해오면서 갖게 된 질문이 ‘사람들은 왜 불행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할까’라는 거예요. 아주 기본적으로 보면 단순한데요. 물리학이나 세계의 법칙을 우리가 모르지 않아요.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변하다가 사라진다는 아주 단순한 법칙이잖아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우리는 잘 몰라요. 우리의 몸과 이 세계가 겪는 자연스러운 법칙에 반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무언가가 영원했으면 좋겠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게 쭉 이어졌으면 좋겠고, 안정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거예요. 그건 우주의 법칙을 완벽하게 거스르는 것이거든요. 몸이 나아가는 방향과 생각과 마음이 나아가는 방향이 맞지 않는 거죠. 그러면 고통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두려움이나 망상이라는 것도 다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 법칙을 거슬러서 무언가에 도달하고자 하고 어떤 것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죠. 『철학을 담은 그림』에서는 그 환상들을 깨나가는 것이 공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예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도요.
프롤로그에 적으시기를,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시누이’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책을 쓸 때 항상 ‘내가 누구한테 말을 하는 건가’를 생각하면서 독자를 떠올리는데요. 『철학을 담은 그림』은 젊은 30대, 40대의 여성들이나 일반 직장인들이 예술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올케를 떠올리게 됐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도 하고 있는 그 친구가 겪고 있는 마음들이, 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같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주면 어떤 식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쓰게 됐죠.
외로워하지 말고 고독을 선택해라
“사는 게 고통스럽다면 위로와 의지처를 찾아 헤맬 일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다른 감각과 사고를 배워야 한다”고 적으셨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잖아요.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인간만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자기의 생각과 신념들이 무너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건 자체가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헤어지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 자체를 고통스러운 거라고 단정을 지어버리니까 헤어 나올 길이 없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잘 되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잘 된다는 건 세상에 없거든요. 많은 철학자들도 이야기하는 것이, 원래 삶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 것을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에 인과를 잘못 지어요. ‘누구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죠.
결국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잘못 부여한 판단과 인과 때문이군요.
그래서 우리는 원인이 없어지거나 문제가 잘 극복돼야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잘 안 되잖아요. 그걸 다 알면서도 지켜볼 수 있는 힘이 없는 거거든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미 그 모두를 겪은 사람들이 보여줬던 자세를 배워야 해요. 저한테는 그게 공부죠. 누구나 나와 비슷한 일을 겪지만, 그 순간에 보여주는 태도는 다르거든요.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여준 예술가들과 철학가들이 있고, 그런 것들을 배워 나가면서 사건들을 지켜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거죠.
고통을 느낄 때 호소하는 감정 중 하나가 ‘외롭다’는 것일 텐데요. 작가님께서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흔히 외롭다고 말할 때 뭔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인 것 같아요. 주변에 나를 따뜻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외롭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기보다는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인 것 같아요. 굉장히 의존적인 감정이죠. 사람을 강하게 하는 건 사랑을 하는 힘인 거지 사랑을 받는 힘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더 욕망하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지 않았다고 자학하지는 않으면서, 누군가가 나를 영원히 사랑해 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죠. 그러니까 외롭다는 감정은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때 ‘인간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수동적으로 만드는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고독이라는 건 그걸 넘어가는 지점에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어요.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자기 스스로 고독을 만드는 순간인 거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최종의 순간에는 결국 자신의 두 발로 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고독이죠. 그런 순간에 혼자인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자신 안에서 낯선 힘을 발견할 때도 있는데 그렇게 스스로가 낯설게 다가오게 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고독인 것 같기도 하고요.
『철학을 담은 그림』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긍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이 계획과 어긋나는 상황을 그대로 긍정하고,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도 긍정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지금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면서 사는 건 체념이지 긍정이 아니에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상이나 신념 체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긍정이 아니죠. 긍정이라는 건, 자기 안에서 발생하는 스스로를 넘어가는 힘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과 다른 세계나 생각을 만나게 됐을 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상이 깨지는 경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죠.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그걸 받아들여 가면서 자신의 집착들과 싸워 나가는 과정이 긍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긍정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거죠. 자신의 세계를 바꿔야 되는 문제니까요. 긍정한다는 건 자기 안에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세계와 싸워 나가는 과정이에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으면 긍정이라는 건 불가능하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건 곧 ‘삶에서 순간을 응시한다는 것’과도 같다고 하셨어요.
우리는 때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나는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거죠. 사실은 지금의 결과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원래 열심히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전부를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게 나의 전부인 거죠. 만약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하는 거고, 그때의 자신이 또 존재의 전부인 거예요. 어설픈 이상과 현실의 문제로 환원하면 안 된다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자신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어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알게 되고요. 자신을 긍정하는 일도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돼요. 내가 어디에서 계속 넘어지는지 보고, 다음부터는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를 모색해야죠. 『철학을 담은 그림』에서는 예술가들을 통해서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패와 패배는 다르다
장 뒤뷔페의 「풍경」으로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는 은사로부터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길에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돈 후앙의 가르침』에 나온 그 구절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해요. 길에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건 이런 거죠. 내가 가는 길에서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길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이 길을 가는 걸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길 끝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때까지 느꼈던 행복들도 다 팽개쳐 버리잖아요. 괜히 이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요.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아요. 진짜 마음이 담겨 있으면 이것이 나에게 가져다 줄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게 되죠. 막다른 골목이 있다면 그곳에서 생각해 보면 되요. 막다른 골목인데도 계속 갈 것인지, 돌아서 갈 것인지, 샛길로 갈 것인지.
루쉰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셨죠. 원래 길이란 없었고, 걸어가니 길이 되었다고요.
루쉰은 막다른 골목이 나와도 계속 가보면 된다고 했죠. 그러면 길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거라고요. 사실 어떤 길에 무언가가 예정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길에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그렇게 하기가 참 쉽지 않죠. 직장이 내 삶은 아니니까, 의무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마음을 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직장인들은 안정된 월급 대신 감수해야 되는 게 있는 거죠. 그 부분이 전혀 없는 일은 없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기를 원하는데, 그런 일은 거의 없죠. 무언가는 감수하면서, 그 일을 할 때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른 걸 하면 되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게 좋은 상태를 꿈꾸니까, 그게 문제인 거죠.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함께 드라마 <미생>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미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가끔씩 제게 ‘그림을 어떻게 공부하면 좋겠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 저는 ‘미술관 가서 완성된 작품을 본다고 해서 안목이 생기지 않는다, 그 작품을 위해서 작가가 어떤 습작을 그렸는지를 보는 게 훨씬 더 좋다’고 이야기해요. 습작을 보면 작품을 어떻게 바꾸고 망쳤는지 알 수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작가가 했던 고민, 그리고자 하는 것과의 만남이 모두 담겨 있죠. 완성작이라는 건 그런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하나의 끝일뿐이에요. 만약 완성작이 목표라면 그 후에 더 이상 작품을 할 수가 없겠죠, 그걸 위해서 달려갔으니까요. 우리는 마치 삶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작가도 자신의 완성작에 집착하지 않거든요. 완성작을 보고 뿌듯해하지도 않고요. 삶도 마찬가지죠. 넘어지더라도 배우면서 경험하는 것들이 중요한 거죠. ‘그 결과 어디에 도달했다’라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삶에서 목표가 중요하다고 얘기하잖아요. 과연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목표를 보고 달려가는 삶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끝이 어떻게 되든 끝은 과정일 뿐인 거죠. 순간순간 내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어떤 마음의 소용돌이를 겪고, 무엇을 배우는지, 그런 과정들만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점에서는 생 자체가 미생인 거죠.
실패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큰 위로가 됐습니다.
어쨌든 완전하다는 건 없으니까요. 공부를 하면 알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알면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도 같이 많아진다는 거예요.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건 적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아는 게 많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모르는 것도 많아져요.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모든 걸 안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니까 불완전함 속에서 또 다른 불완전함을 갖게 되면서 살아가는 거죠.
에필로그에서 고흐의 자화상과 뭉크의 자화상을 보여주셨는데요. 두 화가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보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데요. 고흐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보통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고흐를 좋아하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놓치는 부분들이 많죠. 고흐는 삶의 성실성이 전부예요. 죽을 때까지 한 눈 안 팔고, 한 푼도 못 버는데도 끝까지 그림을 그렸죠. 정말 자기를 다 던져서 그림을 그렸고요. 그래서 몇 년 안 되는 시기 동안에 정말 많은 작품을 그렸어요. 한 획 한 획에 정성을 다해서요. 모든 예술가의 예술다움이라는 건 그 한 획에 있는 것이지 완성작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뭉크는 엄청난 부침을 겪었으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으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았죠. 자기의 시대 혹은 자기 삶을 온 몸으로 살아낸다는 게 어떤 이미지일까를 그 두 사람에게서 보고 싶었어요.
두 화가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거나 자기 밖에 못 보잖아요. 내 안에서 여러 개의 시선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정해 놓은 하나의 타인의 시선에 자기 삶을 맞추고 있죠. 생각해 보면 그것이 자기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고흐와 뭉크는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부침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갔겠죠.
“상처 없는 삶을 꿈꾸는 건 삶에 대한 무례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상처뿐인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해요. 아마 존재하는 것들은 다 그럴 거예요. 불완전하다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에요. 완전하다면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불완전하니까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다른 생각도 받아들여야 하고, 또 불완전하기 때문에 같이 살아갈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른 불완전함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니까 서로 부딪히고 깨지기도 하는 거죠. 우리는 그걸 상처 받는다고 얘기하죠. 그런데 아이들도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듯이, 그렇게 조금씩 다치고 넘어지고 또 일어나면서 근육도 키워지고 단단해지는 거예요. 사람들은 결점과 상처 없이 행복하게 사는 걸 다 꿈꾸지만,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웃음). 그러니까 넘어지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다치는 게 아니라, 다쳤을 때 새 살이 빨리 생길 수 있는 능력인 거죠. 그런데 우리는 새 살이 생길 수 있는 능력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넘어지려고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나약해지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앞에서 쩔쩔 매게 되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누구나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각자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나름대로 모색해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철학을 담은 그림채운 저 | 청림출판
고전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미술 작품을 매개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이끌어내는 책. 저자는 클레부터 올덴버그까지,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장자의 사상을, 니체의 철학을 전하며 각자의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해석을 이끌어낸다. 드가의 [벨렐리 가족]을 통해 사랑과 삶에 대한 환상을 깨고, 터너의 [눈보라]를 통해 삶의 혼돈을 긍정하도록 이끌며,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통해 삶의 태도를 성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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