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원, 25억 빚을 극복하고 키운 꿈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이채원 저자가 말하는 ‘희망의 증거’
지난 1997년, 우리나라에는 ‘IMF 사태’라는 혹독한 시련이 불어 닥쳤다. 기업들이 쓰러지고 가정이 해체됐으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패러다임이 기존의 가치를 대신해 자리 잡았다. 한푼 두푼 아껴가며 미래의 희망을 꿈꾸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채무자로 전락하고, 신용불량자라는 말 흔해져 갔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는 그 시기를 가까스로 버티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온정주의 덕분에 사업을 하는 형제가 있는 집안은 대부분 연대보증으로 묶여 있던 시절,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IMF 광풍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형제, 친구라서, 무심코 사인해 줬던 ‘연대보증’은 혹독한 굴레가 되어 수많은 가정을 빛 더미에 올려놨다. 당시 이채원 작가가 직면한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오랜 동안 고생해서 마련한 아파트, 그리고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작가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에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남편이 시누이 사업자금을 대기 위해 섰던 보증이 화근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 작가는 천국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을 경험했다. 작가는 이를 ‘지진’이라 표현했다. 10억, 그저 숫자로만 다가오는, 실감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이 지워졌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 버릴 아파트인데 나는 무엇하러 죽어라 그 돈을 갚았을까.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나는 멍하니 앉아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中 )
아이러니하게도 10억이라는 빚이 지워진 시기는 작가가 막 아파트 대출금을 다 갚았던 즈음이었다. 빚은 단지 빚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가족의 미래가 사라졌고, 깊은 한숨과 절망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작가는 그 시기에 처음 남편의 눈물을 보았고, 눈 뒤집어진 채권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크고 작은 빚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원망도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삶이 급했다. 더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큰 딸 연우와 둘째 상우는 한창 민감해져 가는 시기였다. 이 작가의 가족은 그런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사고가 터지기 전부터 예정 돼 있던 남편의 장기 해외 연수 일정이 닥쳤기 때문이다.
IMF 사태 이후 환율이 치솟던 시절, 3년이라는 미국 생활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그 기간에 석, 박사 과정을 모두 마치기 위해 공부에 몰입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들은 낯선 타국의 생활을 무난하게 적응해 나갔다. 3년은 이들 가족에게 불행의 유예기간인 동시에, 힘을 키울 기회의 시간이 됐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론 가족 간에 갈등으로 위기가 닥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때마다 대화를 통해 극복했고, 그런 작가의 말은 고스란히 자녀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공부하는 가족’으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빚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이 작가와 가족들은 그 이후에도 저마다 치열한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는 값진 열매로 돌아왔다. 이제 성인이 된 큰 딸 연우 씨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MIT장학생으로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있으며 아들 상우 씨는 행정고시 교육직렬에 최연소로 합격한 후 공군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이자를 더해 무려 25억 원으로 불어있던 빚 역시 남편의 적극적인 채무조정 노력으로 인해 탕감되었고, 이들 가족은 끝내 빚에서 해방됐다. 수필집과 소설을 포함해, 힘겨운 시련 속에서도 글쓰기를 이어나갔던 작가의 네 번째 책,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를 놓고 마주 앉은 자리. 작가의 표정은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힘겨운 삶의 시련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 작가의 지난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련이 지나간 자리
어려운 상황에서 자녀 키우신 과정만으로도 대단한 스토리인데요. 빚과 관련된 불편한 이야기까지 숨김 없이 책에 담으신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맞아요. 이제까지 우리 가족이 겪은 일들은 친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냈어요. 남편 역시 직장 동료들에게 함구하며 살아왔죠. 그렇게 알리지 않은 채로 문제를 해결해 왔어요. 그런데 모두 해결이 된 다음에도 주위사람, 친구들한테 지난 얘기를 못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문득 ‘내가 아직도 이걸 부끄럽게 여기고 있구나, 이러면 내가 더 이상 성장을 못 하는 거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 끝에 소설 쓰는 일을 비롯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 우리 식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해 가며 책을 쓰게 됐어요.
지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도도 있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정말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물론 그 힘든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죠. 그러나 가난이라든가 역경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가 느끼고 있는 처지, 그 형편 안에서 좌절하지 말고 딛고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써 내려갔어요. 역경을 역경 그 자체로 생각하면 주저앉고 추락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꿈을 발판 삼아 절실하게 노력하면 지금의 현실은 물론 미래도 나아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2009년은 작가님의 가족들에게 전환점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큰 딸 연우 씨가 MIT 장학생으로 합격하고, 아들 상우 씨 역시 행정고시 패스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근황을 알려주신다면?
연우는 지난해 결혼하고 올 6월에 박사 학위를 받게 됐어요. 상우는 지금 공군 장교로 복무 중이에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장교로 군복무를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셈이죠.
연우가 떠나기 한 달 반쯤 전에 이삿짐 회사 직원이 방문해서 짐을 짰다. 짐을 넣고 남는 공간에는 평소 연우가 좋아했던 둥지냉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미국으로 짐을 부치기 전날 부산에서 올라와 연우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마트에서 마지막 쇼핑을 했다. 미국에서 구하기 힘든 방충제와 세탁망, 육수용 주머니 가은 자잘한 물건들을 골랐다. 이번에 미국으로 떠나면 몇 년간 그곳에서 혼자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될 테니 다시는 이렇게 오붓하게 지낼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책에서 작가님은 지금의 상황을 마치 예견하시는 것처럼 쓰신 듯한데요. 엄마의 직감인가요?
그건 엄마라면 다 생각하는 부분일 거예요(웃음). 딸을 유학 보내면서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됐으니 곧 결혼하면 나에게서 멀어질 거라는 것은 예상되죠. 그럴수록 서로 더 노력할 부분도 있을 거고요. 그런 생각 하나하나가 애틋하게 느껴졌죠. 연우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이 책의 원고에 대해 조언을 많이 해 줬어요. 어떤 부분은 내용이 너무 늘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줄이기도 했고, 제가 잊고 있던 이야기를 해 줘서 추가된 부분도 있죠. 남편 역시 원고를 수정할 때마다 검토해 줬어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공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검토는 필수적이었거든요. 다만 상우만은 군 복무 때문에 잘 보지 못했죠(웃음).
남편이나 시댁을 향한 원망과 서운함도 담겨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의제기를 안하시던가요?
아니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 말 없던데요(웃음).
IMF, 수많은 가정들이 해체되던 시기
1997년의 사건은 비단 이 작가 가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IMF 사태 이후 이어진 가족 해체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그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그 시절을 힘겹게 보낸 부모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자녀들은 청, 장년층이 되어 이 사회를 지탱해가고 있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그 시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작가님 가정이 겪으셨던 상황은 당시 수많은 가정이 경험했던 일이기도 할 듯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가 막히고 정신이 없었죠. 남편의 미국 연수 일정을 받아 놓고 출국해야하는 즈음에 일이 터져 정말 정신없이 지냈어요. 떠나면서도 우리가 귀국하면 살 집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어요. 게다가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문제였죠. 이 시기를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제게는 더 큰 걱정이었어요. 저는 사람이 사춘기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넘겼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 역시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터라, 내 아이가 자라서 사춘기를 맞이하면 현명하게 넘길 수 있도록 돕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이런 일이 터진 거 였어요. 그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란 생각 뿐이었어요.
작가님 역시도 남편과 시댁에 대한 원망을 모두 숨기지는 못하셨을 정도인데요. 자녀분들을 향한 마음으로 버텨내신 거네요.
제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큰일이 닥치면 사람들이 남의 탓을 하잖아요.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이죠. 문제는 그런 생각을 지닌 채 생활해 나간다는 점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가정이 찢어지죠. 그런 가정을 많이 봤고 저희 역시 그런 위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 아이들과 이야기하지 못하고, 위로조차 할 수 없었죠.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데 아이들은 오죽했겠어요.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서 아이들 얼굴 밖에 떠오르지 않았죠. 부모 형제가 싫어지고 바깥세상과 친구가 좋아지는 시기에 그런 일까지 겹치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라는 사람들이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고 미덥지 않은 존재가 된 거예요. 그 상황을 바꿔나가야 했죠.
연우는 더 이상 부모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듯했다. 남편과 나는 미국에 오기 전부터 빚 문제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 영어도 서투른 탓에 아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의 복잡한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들을 곤경에 몰아넣었다는 자책,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공부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남편과 연우는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도 덩달아 싸늘해져 내가 둘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풀어 주거나 자연스럽게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작가의 가족들은 하루하루 적응해 나갔다. 딸과 갈등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편은 공부에 매진하며 아이들에게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 역시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며 성공적인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 사춘기시기에 찾아오는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작가는 더 많은 대화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3년, 시련 속에 꽃이 피다
미국에서의 3년이란 시간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준 시기였다. 작가는 그 곳에서 영어 공부와 수필 집필을 이어가며 불안감과 싸워나갔다. 책의 제목처럼 그야말로 모든 가족이 공부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점차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남편 역시 공부에 탄력이 붙으며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시련 뒤에 굳어진 땅에서는 그렇게 희망이 꽃피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3년은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살아간 시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들 간에 소소한 추억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많았죠. 그 중에서도 첫해 겨울방학 때 아이오와에서 플로리다 최남단 키웨스트까지 갔던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빚지고도 어떻게 여행 갈 생각을 하냐고 해요. 하지만 저도 그 일을 겪으면서 삶을 사는 방식을 바꿨어요. 그 전까진 아파트 하나 장만하려고 전형적인 옛날 어머니 방식으로 무조건 아끼기만 했죠. 콩나물, 두부 값에 전전긍긍하는 소시민 아줌마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장만한 아파트가 한 순간에 사라진 이후에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가진 한도 내에서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아이들에게도 돈이 드니 집에만 있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잖아요. 3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남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아이들 정서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11일간 여행하며 우리 가족이 달린 거리는 무려 6,500km나 되었다. 그 머나먼 거리를 달리는 동안연우와 상우의 마음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헤아려 조금이라도 더 싸게 햄버거를 사려고 애썼던 연우,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지어 냈던 상우. 비록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는 여행에 들어갈 돈을 걱정했으나, 우리 가족은 그 여행에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재산을 얻었다. 내가 만약 전과 같이 돈 걱정에만 매달려 그 여행을 포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자녀들이 사춘기를 거치면서도 어긋나지 않았던 건, 특별한 가정교육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모든 대화가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들과 저는 순간 눈빛만으로도 서로 속마음을 알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남편보다도 더 잘 알죠(웃음). 평소에는 아이들과 농담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이 갈등할 때는 정말 힘든 순간도 있었죠. 하지만 그 시기를 넘기고 짜증내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대화하고 설득하고 화해시키기를 반복했죠. 그 시기에 아이들의 이야기는 무조건 들어줘야 해요. 부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안 되죠. 그러면 아이가 입을 열기 시작해요. 지금도 아이들은 “엄마와 세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것이 '자식농사 잘 지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작가님은 세상 많은 부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듯한데요.
우선 ‘공짜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좋은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고 풍족하게 생활을 누리지 못하게 한 것은 미안해요. 하지만 사교육을 시켜주지 않아 미안한 것은 없어요. 보통 엄마들이 아이들 학원 보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도 저만의 방법으로 아이들 교육을 잘 시키고 싶었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이뤘고요.
연우 씨와 상우 씨 모두 적극적인 성격에 호기심이 많고, 특히 연우 씨의 경우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특성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부모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남편 역시 사무관으로 시작해서 굉장히 바쁘게 살았어요. 집에 일찍 오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일이 많고 주중에는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이 드물 정도였죠. 하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아이들이 무엇을 처음 접할 때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서기보다 일단 시도해보는 것은 아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덕분이죠. 미국에 가서도 전혀 쭈뼛거리지 않고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해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커가는 과정에서 작가님이 고수하셨던 교육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었어요.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 될 때까지는 그랬죠. 첫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마음먹었던 거예요. 또 다른 제 원칙은 ‘내 부모 세대와 정 반대로 키우겠다’ 였어요. 제가 커오며 싫었던 것을 시키지 않겠다는 거죠. 물론 크고 작은 것에서 아이들과 함께 방법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법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부모님 세대는 전쟁세대잖아요. 수동적이고 주입식이고, 특히 제 외가가 전쟁 당시에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하셔서 저희 어머니는 ‘나서지 마라’가 주된 교육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인데. 그런 방식의 교육이라면 뭘 할 수 있겠어요. 막연하게 공부하라는 말 대신 구체적으로 함께하자고 권했죠.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공부라는 말에 질려 버리거든요. 예를 들면 막연히 공부하자는 것 보다는 ‘우리 같이 그림일기를 그려 볼까?’처럼 구체적이고 놀이처럼 접근하는 것이 좋아요. 그게 더 자극이 되고 흥미를 유발하죠.
지금도 힘겨운 상황에 직면한 가족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면?
역경……, 맞아요. 그 순간에는 너무나 힘든 역경이죠. 하지만 너무 그 순간에 빠져서 절망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사실 이런 말조차 너무 힘든 사람들에게는 사치로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 살길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하고 절실하게 살면 방법이 생길 거예요. 요즘도 힘겨운 삶 속에 해선 안 될 선택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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