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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화영, 신경숙 박웅현과 여름 밤을 이야기하다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생텍쥐페리의 번역가 『여름의 묘약』 저자 김화영 남프랑스의 여름 빛이 숙성시킨 묘약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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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1일, 7월의 마지막 날을 가득 채워줄 특별한 만남이 준비되었다. 주인공은 신간 『여름의 묘약』로 독자들을 찾아온 김화영 교수. 이미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출간한 그는, 이렇듯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은 처음이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국에 태어나 프랑스 문학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김화영 교수의 책을 읽었을 것이다. 한국문학에 관심이 읽는 사람은 어디선가 문예지나 소설 뒤에 실린 그의 평론을 읽었을 테고, 에세이를 즐겨 읽는 사람도 그의 책을 접했을 것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화영 교수답게 『여름의 묘약』의 출간을 축하하며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신경숙 작가, 제롬 파스키에 주한 프랑스 대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저자로 유명한 박웅현 작가까지. 여름 날, 프랑스 문화와 만나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사회를 맡은 허희 문학평론가는 가장 먼저, 첫 번째 에세이집인 『행복의 충격』『여름의 묘약』을 비교하며 그 소감을 물었다. 김화영 교수는 시간을 돌아보듯 뜸을 들인 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소년을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주자의 시구가 어느새 노교수가 된 그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듯 했다. 그는 1969년 처음 프랑스 땅을 밟은 청년의 혼란스러운 열정을 담은 것이 『행복의 충격』이라면, 이번에 쓴 『여름의 묘약』은 그 이후 프랑스를 알아가며 느낀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 소개했다.

그가 『행복의 충격』을 출간하던 때만해도 ‘행복’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에 낯선 낱말이었다. 젊은 시절 프랑스에 도착해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 ‘아, 사람도 행복할 수 있구나’였다고 한다. 첫 번째 에세이 집 『행복의 충격』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그가 알고 있던 행복은 어딘가 물기 어린 축축한 것이었는데 남부 프랑스에서 만난 행복은 뽀송뽀송한 것이었다. 그건 행복이 의무인 듯 여겨지는 프랑스, 그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놀라움이었다. 그는 행복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느껴야 한다며,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근사하다는 걸 매 순간 느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가진 온 자질을 발휘해 지금 당장 행복하세요.” 끊임없이 행복을 뒤로 연기하는 한국인의 삶에 대한 김화영 교수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최근 행복이라는 낱말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행복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는 결코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곧 이어 책 속에 실린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김화영 교수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며 허희 평론가는 평소 사진에 관심이 많은지 질문했다. 김화영 교수는 요즘은 사진기가 정말 잘 나온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만약 괜찮은 사진이 있다면 그건 풍경에 빨려 든 스스로의 열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며, 프로방스에서 찍은 건 사진이 아니라 행복했던 시간의 떨림이라 답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으로 꼽은 것은 까뮈의 집에서 찍은 테라스 앞 풍경이었다. 김화영 교수는 이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두었다고 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까뮈의 집에 있는 것 같다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카뮈가 늘 바라보았을 탁 트인 들판이 싱그러웠다. 곧이어 그는 사진 속 까뮈의 집과 관련된 부분을 낭독해 주었다.

부인은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서 대문을 열기 전에 나직하게 귀띔한다. 지금 막 아이들이 낮잠에 들었는데 집 안의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짖어대면 아이들을 깨울지도 모르니 조용히 아래쪽 사무실로 내려가자는 것이다. 여름 한낮의 빛이 강해서 상대적으로 실내는 서늘하고 어둑하다. 무사히 현관을 통과하여 사무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부인이 우선 테라스로 우리를 안내한다. 좁은 골목 안에서 본 집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좀 협소한 느낌을 주었는데 오래 묵은 돌난간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테라스로 나아가자 눈앞으로 멀리 뤼베롱 산맥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 하나 없이 확 터진 보클뤼즈 평원과 뒤랑스 강 계곡이 펼쳐진다. 테라스 난간 위에 놓인 큼직한 돌 화분에 꽃들이 만발했고 집 앞으로는 넓은 포도밭과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듯한 시프레나무들. 난간 옆 한구석에 놓인 철제 테이블과 빈 의자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시다. 카뮈는 이 풍경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고, 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최초의 인간』을 썼다. 나는 옆에 서 있는 카트린 카뮈 부인을 까맣게 잊은 책 풍경 저 멀리 던져진 카뮈의 시선을 생각한다. 아니, 나 스스로 그의 시선이 된 느낌이다. (p.87~88)
프랑스 문학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지만 프랑스는 어떤 현상이나 감정에 대해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다혈질의 매력이 있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다면적 고려가 일반적이라 했다. 고전주의의 영향으로 모순된 것을 통합하고, 직진해서 핵심을 찌르는 특징이 있다는 설명으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했다. 프랑스 문학을 하겠냐는 다소 엉뚱한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랑스 문학을 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드디어 첫 번째 초대 손님, 작가 신경숙이 독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신경숙 작가와 김화영 교수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한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라고 했다. 보다 개인적으로는 김화영 교수가 신경숙 작가의 소설 『리진』의 비평을 쓰기도 했다. 신경숙 작가는 그 비평은 창작가에게 크고 벅찬 기쁨이었다며 지금도 힘이 나지 않거나 확신이 없을 때면 꺼내 읽고 기운을 낸다고 답했다. 곧이어 신경숙 작가가 『여름의 묘약』 중 마음에 남은 구절을 낭독했다.

프로방스의 이른 아침,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닭 우는 소리…… 이게 몇 년 만인가. 어린 시절, 우리집 과수원에서는 여러 마리의 닭들이 진종일 넓은 마당과 밭머리를 쏘다니며 모이를 주웠다. 저녁이 되어 그들이 횃대 위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닭장 문을 잠그는 일이나, 짚가리 위에 올라가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을 바구니에 담아 오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어느 날 나는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월에 떠밀려 어른이 되자 기껏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과연 어김없이 새벽이 왔지만 닭 우는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흐린 도시의 저녁 거리에는 닭튀김집들이 늘어서 있고 찌든 식용유 냄새가 떠돌았다. 내가 닭 우는 소리를 다시 들은 것은 알제리의 바닷가 티파사의 폐허에서였다. 멀리 떠나야 비로소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인가. 프로방스의 닭은 길게 이어지는 목청으로 내 아침의 귀를 씻어주며 창 밖으로 청명한 하늘빛을 넓게 펼쳤다. (p.247~248)
신경숙 작가는 그 동안 김화영 교수덕분에 좋은 프랑스 문학을 읽을 수 있었다고 인사를 전한 뒤,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다린다는 바람을 전했다.

독자들과 만난 두 번째 초대 손님은 제롬 파스키에 주한 프랑스 대사였다. 다소 어색한 한국 발음으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그는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에 머물며 전국에 있는 명승지들을 방문한 일, 한국에서 문화재를 어떻게 보호ㆍ관리하고 있는지 등 자신이 바라본 한국에 대해 말했다. 그는 한국의 문학과 한국에 대해 『여름의 묘약』처럼 쓴 책이 있다면 그 책을 따라 한국을 여행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와 프랑스 문화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는 김화영 선생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전했다. 이어 제롬 파스키에 대사와 김화영 교수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불어와 한국어로 낭독했다.

생울타리 틈으로 정원 안의 오솔길 하나가 보였는데 그 길가에 피어난 재스민, 팬지, 마편초 사이로 꽃무들이 향긋하고 빛 바랜 장밋빛의 신선한 주머니를 열어 보이고 있었다. 자갈 위에는 초록색의 물 호스가 풀어져서 길게 뻗어있고 그 뚫어진 구멍들에서 꽃 이파리 머리 위로 다채로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 나와 프리즘 같은 수직의 부챗살을 만들며 꽃 향기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어떤 환영이 나타나서 단지 우리의 시선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자각을 요구하고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손아귀에 넣어버렸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색이 깃든 금발의 소녀 하나가 막 산책에서 돌아오는 듯한 모습으로 손에 원예용 삽을 들고 장밋빛의 주근깨가 뿌려진 얼굴을 쳐들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마지막 초대 손님은 최근 『여덟 단어』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박웅현 작가였다. 『책은 도끼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의 저자인 박웅현은 자신을 탁류 문화의 대표주자라 소개하며 청류문화의 대표주자인 김화영 교수와 만나는 자리가 특별하다 말했다. 김화영 교수와 박웅현 작가는 이 날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웅현 작가가 오랫동안 김화영 교수의 책을 탐독해 왔고, 이를 자신의 저서에 언급하면서 『행복의 충격』같은 책이 갑자기 팔려가는 등 간접적인 인연을 맺어왔다.

박웅현 작가는 『바람을 담은 집』을 정말 충격적으로 읽었다고 말한 뒤, 『행복의 충격』의 첫 문장을 외워 보였다.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 책은 책의 대부분에 줄을 쳐 두어서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다는 그의 말에서 김화영 교수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박웅현 작가는 자신의 대표적 광고 문구인 ‘생각이 에너지다’ 역시 김화영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김화영 교수가 폴 세잔에 대해 쓴 구절을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름의 묘약』을 통해 자신이 보지 못한 프랑스에 대해 알 수 있었다며, 매년 프랑스에 가는데 이번엔 제대로 보고 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인상 깊은 구절들을 들려주었다.

햇빛에 부대끼다 못해 붉은 색이 흐려진 기와를 인 프로방스 특유의 외딴 집들. (p.14)
문학은 삶에 형태와 윤곽을 부여함으로써 우리를 참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p.38)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p.88)
삶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냈다. (p.115)
곳곳에 인간이 세운 돌은 무너지고 자연이 키우는 풀들과 나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자라는 것을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p.256)
자리를 마무리하며 김화영 교수는 독자를 만난 소감을 전했다. 40년 넘게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출판사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이런 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문을 연 그는 막상 독자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있는 걸 보니 참 반갑고 감동적이라며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책이 100권, 1,000권 팔려도 스스로 서점에서 내 책을 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으로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노교수의 소박하고 생생한 감정에 독자들은 박수로 답했다.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생텍쥐페리의 번역가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 오랫동안 꾸준한 팬을 거느린 그가, 드디어 독자들과 만났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미 책으로 수없이 만난 때문 일까. 독자들과 저자 사이의 작고 반짝이는 교감이 느껴졌다. 여름날, 김화영 교수가 평생을 바쳐 온몸으로 사랑한 프랑스와 프랑스 문학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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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묘약 김화영 저 | 문학동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게 인생의 ‘여름’은 프로방스에서 보냈던 이삼십대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김화영 교수가 보낸 두 번의 여름은, 누구나 떠날 수 있지만 누구도 하기 어려운 여행을 보여준다. 경험과 직관보다는 빠르고 많은 정보, 그 ‘스마트’함이 최우선인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싱싱한 빛”을 간직하는 생의 여정, “모순으로 가득한 무용한 정열”을 잊지 않으려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스쳐지나가는 나날을 보듬으며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삶의 태도임을 우리는 이 특별한 여행에서 되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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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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