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대에게 - 김진희
결혼, 영원한 타인과의 산책 『결혼한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이름을 잃었던 여자가 그림을 골라 책을 냈고, 이름 없던 여자들이 그 책을 읽었다. 작가는 그림을 바라볼 때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글을 써내려 갔다. 김진희 작가와 독자가 함께했던 오전 10시 30분은 무엇을 빼지도 보태지도 않은 그녀들의 이름을 되찾아 떠나는 시작점이었다.
시계가 10시 30분을 가리켰다.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설거지를 마친 뒤 한숨 돌리는 온전한 여자들만의 시간. 6월 3일 대치도서관에 결혼한 그녀들이 모였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풀리지 않는 방정식 같은 결혼. 김진희 작가는 그간의 결혼 생활을 그림을 통해 이야기했다. 이름 없이 살아온 전업주부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고 함께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엄마와 아내가 아닌 작가로서 강단에 서는 건 처음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김진희 저자는 대학교 2학년,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순수 예술을 꿈꾸며 떠났던 그곳에서 ‘예술에 값을 매겨 팔라’는 교수의 말에 실망해 꿈을 접었다. 모든 작업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2년 만에 돌아와 통번역사로 일하다 결혼했다.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다.
그녀가 책을 쓰게 된 계기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법조인 남편과 명문대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공허한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는 30년 차 주부였다.
“그분은 생활에 매몰된 채 삶의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어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챙기고 살림하면 하루가 빠듯하게 지나가잖아요. 그렇게 돌아가는 시간이 결국 주부의 삶을 파묻는 듯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죠.”
나는 어디에 있나요?
김진희는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의 태양』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 그림을 보며 외로움에 지쳐 끝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림 속에는 누가 보아도 지치고 쓸쓸한 표정의 여자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열어놓은 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아침을 맞으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탈출구가 없는 풍경을 마주한 여인의 모습. 어쩌면 저와 같은 누군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견딘 오늘이 그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는 그저 제 삶에서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나 자신만으로 가득 찼던 삶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돌보고 집의 온기를 지켜가는 엄마와 아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삶의 부력을 키워야 했던 ‘결정적인 시기’였던 것입니다.(p. 8~9)
결혼 후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 엄마가 된 여성들은 어느덧 삶의 조연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온종일 이름 불러주는 이는 택배기사뿐이다.
“겉으로는 자상한 엄마인 척, 좋은 아내인 척 살았죠.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어요. 내심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 도망치고 싶었어요.”
인생의 전환점이 되리라 굳게 믿었던 결혼은 나를 절망으로 인도하며 발끝에서 나를 넘어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p.83)
저자는 마티스가 그린 『리디아의 초상』을 보며 그림에 가득한 초록색에 관해 이야기했다. 초록은 활기찬 생명이자 평화의 상징이다. 이름없는 나의 삶을 비관하는 일은 그만하고 초록을 닮은 삶을 시작하자는 의미라는 설명도 더했다.
“오히려 책이 나왔을 때보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더 행복했어요. 그동안의 방황과 허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였죠. 저에 대한 신념으로 빛나는 순간 엄마이고 주부인 제 모습을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내 이름은 엄마입니다
엄마로서 가장 뭉클하면서 마음이 평온한 때는 언제일까? 작가는 아이의 때 묻은 신발을 정리할 때를 꼽았다. 아직 어린 아들이 밖에서 지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알렉스 하나의 『샌디는 보고 있는 중』에 나타난 아이의 표정을 바라볼 때도 그렇다. 한 발짝 물러서 그림을 보면 아들을 똑 닮은 아이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헥터 마누엘 에르난데스 『어머니의 초상』에 나타난 어머니의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측은하게 한다. 저자는 어머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최고의 행복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출산 후 눈앞의 현실에 기대는 무너졌다. 그녀는 이때의 자신의 반응을 ‘야만적이고 저속했다’라고 표현했다. 아기 띠를 두르고 장바구니에 열두 롤짜리 욕실용 휴지를 든 헝클어진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을 때는 심지어 ‘이제 내 인생에는 종말이 고해졌구나’하고 스스로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좌절이라니, 그것은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서도 안 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왜 엄마들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현실의 맛과 모양은 겉모습만 화려한 케이크 같다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p.122)
“처음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모성애라는 게 생기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절망에 가까웠던 제 기분은 혼란 그 자체였어요. 이제는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정체성과 아이의 그것을 구별할 수 없는 강렬한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결국 모성애의 완성은 때가 되면 아이를 떠나 보내는 거겠죠?”
김진희는 ‘행복’이나 ‘기쁨’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아이가 있기 전과 사뭇 다른 느낌이라고 했다. 뤽올리버 멀슨의 『이집트로의 피난 중 휴식』을 함께 보며 엄마가 되는 수수께끼 같은 여정에 대한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했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고 또 누군가의 자식이 되는 운명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신이 내린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산의 정상을 오르듯 더 높은 곳에 이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사막을 건너듯 서로의 운명에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는 기다림의 과정일 것이다. (p.105)
결혼이란 무엇일까?
모건 스콧 펙은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결혼은 ‘영원히 존중해야 하는 타인과의 산책’이라고 정의했다. 평생의 동반자를 얻는 건 결혼식이 끝나면 이루어지는 해피엔딩 영화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건 다큐멘터리의 시작이다.
“남편과 저는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달랐어요. 갈등이 심해지면서 많이 외로웠고 각박했습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손발이 잘린 기분이었죠.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시어머니와 단둘이 미국 여행을 가게 됐어요. 물론 정말 가기 싫었답니다. 꼬박 2주를 같이 먹고 자면서 시어머니와 남편의 어린 시절 상처를 알게 됐어요. 저를 힘들게 했던 남편의 모습은 결국 그 사람의 상처였던 거죠. 진심으로 이해하고 나니 이제는 화가 나지 않아요.”
작가는 여전히 확실한 답이 없는 결혼에 대해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결혼생활은 긴 대화다.”
부부의 대화는 상대의 깊고 오랜 배경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상대의 눈을 보기 전에 내 마음과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p.72~73)
“마음을 비우고 다가가는 태도가 중요해요. 오늘부터는 더 많이 웃는 거예요. 어색하다면 개그 프로그램 도움을 받아 보세요.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어느 날 보니 모든 식구가 웃고 있었어요. ‘이제야 꽤 화목한 가정을 일구었구나’ 싶더라고요.”
어느 날 밭에 가서 다 시든 것처럼 보이는 잎사귀 더미를 당겨보라. 새빨간 당근이 쑥 하고 올라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p.252)
이름을 잃었던 여자가 그림을 골라 책을 냈고, 이름 없던 여자들이 그 책을 읽었다. 작가는 그림을 바라볼 때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글을 써내려 갔다. 김진희 작가와 독자가 함께했던 오전 10시 30분은 무엇을 빼지도 보태지도 않은 그녀들의 이름을 되찾아 떠나는 시작점이었다.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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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고 명예도 없고 목적도 없어 보이지만, 분명 인생은 나 자신의 것! 내 컴퓨터의 ‘내 그림’ 폴더 안에는 자신만의 이미지들이 담겨 있다. 그 폴더를 들여다 보면 개인의 취향은 물론 개인의 마음, 원하는 바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한 여자, 특히 전업주부의 ‘내 그림 폴더’에는 어떤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