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하룻밤 품고 잤죠”-안병광 『마침내 미술관』
석파정 복원, 서울미술관 개관에 이르기까지 30년 월급을 털어 시작한 미술작품 수집가의 삶
서울 경복궁역에서 상명대 방향으로 자하문터널 출구를 빠져나오면 왼편에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눈에 띈다. 그 위에는 신기하게도 소담스러운 형태의 전통한옥이 있다. 바로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다. 한 사람이 30년간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 만으로 만들어 낸 결과 치고는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그림을 구매하신 것은 1983년 금추 이남호 선생의 ‘도석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던데요.
처음 그림을 만나게 된 계기였죠. 당시 저는 월급 23만 7천원을 받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는데 그림 값이 20만원이었어요. 더구나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죠. 사실 ‘도석화’의 경우 좋아서 산 것도 아니었어요. 단지 영업사원으로 꼴찌를 면치 못했던 제게 용기를 심어주셨던 상사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반 강제성도 낀 상황에서 작품을 사들였다고 봐야죠(웃음). 그런데 작품을 사서 집안에 걸어놓으니까 그 가치가 20만원어치는 족히 되더군요.
나는 금추 선생 그림을 20만원에 샀다. 당시 월급이 23만 7천원이었으니, 한 달 치 월급을 그림 한 점과 맞바꾼 셈이었다. 집에 돌아와 월급과 바꾼 그림을 보고 있자니 새삼 돈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돈이 무엇인가. 누군가는 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사업을 위해. 저마다 돈을 바라보는 상황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똑같은 액수의 돈이라고 해도 한 잔 술을 마시는 돈과 한 점 그림을 사는 돈은 그 가치가 하늘과 땅 차이다. 개인이 집을 짓는 돈과 모두가 함께 감동을 나눌 미술관을 세우는 돈은 그 체감액수가 같을 리 없다. 당시 나에게 돈은 생활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나에게 김 소장은 결국 돈도 목적이나 필요에 의해 체감 액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 ||
책을 통해 많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연민, 존경을 풀어내셨는데요. 독자들에게 미술품 수집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봤을 때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가 살아온 과정이 작품에 깃들어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하죠. 작품에 빠져 작품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를 보고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재화에 대한 기준도 있겠죠. 그런 삼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작품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 거리가 있을 수 있죠. 각각의 작품은 수집가에게 어떤 하나의 메시지와 같이 다가옵니다. 이런 것들이 작품을 수집하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이중섭 선생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30년 전 처음 사진으로 된 이중섭 선생님의 ‘황소’ 모작을 봤어요. ‘참 못 생긴 소를 대충 그려 놓았다’ 싶었죠. 그런데 한참을 유심히 보니 그 소가 상당히 화가 나 있어요. 못났다고 생각했던 것을 안다는 듯이(웃음), 나를 들이 받으려는 것 같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그림에서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림과 사진도 구분 못한 시절이었지만 아무튼 특이했어요. 결국 그걸 집에 가져가니 아내가 깜짝 놀라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서너 달 전에 20만원 주고 ‘도석화’를 사온 덕분이었죠(웃음).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중섭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은 1987년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부터였어요. 당시 이중섭선생의 지인인 시인 구상 선생을 아래위층 이웃 인연으로 만난 거죠.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두 분인지라 구상 선생님은 이중섭 선생이 이북에서 피난 와서 대구, 부산, 제주를 거친 생활, 일본에 있는 아내 마사코 여사와 두 자녀에 대한 이야기, 이중섭 선생의 각별한 가족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죠. 그러면서 돈이 모이면 하나 둘 씩 이중섭 선생의 작품을 사게 됐고요. 그러다 보니 애착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이중섭 선생의 작품 ‘황소’의 주인이 된 것은 언제였나요.
2010년 6월 29일에 ‘황소’가 서울옥션에 경매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옥션 이옥경 대표에게 하룻저녁만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죠. 너무 비싸니까 살 엄두는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룻저녁 품에 안고 있다가 다시 돌려드렸죠(웃음).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너무 비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매 당일 서울에 있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았죠. 그래서 당진에 중외제약 수액공장 준공식에 가면서 휴대폰도 끄고 차도 안가지고 갔어요. 차를 가져가면 다시 올라올 것 같아 버스를 탔죠. 오후 5시가 경매 시작이라 그때쯤 ‘이제 됐겠지’하고 휴대폰을 켰는데, 바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이옥경 대표가 정말 안 살 거냐고 묻더군요. 이 대표는 ‘황소’ 그림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알았던 것 같아요.
사업가로서 그림 수집을 하는 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사업을 해오면서 돈만 벌기 위해서 뛰었다면 상당히 삭막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로 기쁨을 누리듯이, 어떻게 보면 전쟁 같은 삶 속에서 한 점의 작품을 통해 행복과 여유를 찾을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큰 돈을 들여 석파정을 매입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비롯해 서울미술관의 개관하시기까지 과정은 수집가의 입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신 것인데, 주변의 만류가 적지 않았을 듯합니다.
미술관 하면 많은 분들이 아주 큰 대기업에서 하는, 돈이 많은 사모님들의 놀이터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또 전 세계 어느 미술관도 흑자를 내는 경우가 없다고도 하죠. 그래서 저를 아는 많은 지인들이 반대를 했어요.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이 미술관을 만들면 버겁지 않나하는 우려였죠. 그만큼 관심도 끌었고요. 그러나 그것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목표의식이 더 컸어요. 인생의 여러 가지 과정을 겪으며 미술관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죠.
월급을 털어 그림을 샀던 시절부터 아내의 속을 많이 썪였을 것 같으신데요, 미술관 건립에 대해 사모님의 의견은 어떠하셨나요.
처음에는 만류를 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는데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데는 한편으로 어려움도 따르게 마련이죠. 아내는 그 어려움이 가족에게 미치면 안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어요. 막상 미술관을 오픈해 놓고 보니 역시 아내의 우려처럼 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컸던 것 같아요.
책 속에서 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평소에 애정표현을 자주 하시는 편이신지?
평소에 애정표현을 잘 못하니까 책을 통해 쓴 거였죠(웃음). 아내를 만나 살아온 세월 동안 나를 위해 희생해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처럼 내조해줬던 아내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아내가 책을 읽고 너무 민망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책 속에서 그림과 관련해 가족과 관련한 애틋한 마음을 털어놓은 부분이 많았는데요. 특히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더군요.
제가 어려서 참 병치레를 많이 했다고 해요. 건너 방에서 안방으로 오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박수근 선생님의 ‘젖 먹이는 여인’라고 하는 드로잉을 보면 그 속에 우리 어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4년 전에 소천(召天) 하셨는데……. 어머니는 늘 연약하고 병치레하는 저를 업고 학교와 시장을 다니시곤 했어요. 박수근 선생의 드로잉을 봤을 때, 작품의 주인공은 박수근 선생의 부인이고 아들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제 어머니였고 저였습니다. 저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작품을 보면서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회한으로 남는 거죠.
회장님께서는 기업을 경영해 오시는 과정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나눔에 대한 남다른 소신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계기가 된 일이 있나요.
글쎄요. 남을 돕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 않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저 역시도 부끄럽습니다. 계기가 된 것이라면……, 오래전 부천 세종병원에 영업사원으로 나가면서 그곳에서 다섯 살 먹은 보람이라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선천성 심장병에 걸려서 한겨울에도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했죠. 그 아이를 고치는데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보니 그 당시에 230만원, 제 월급이 23만원이니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도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해서 당시 집에 모아둔 돈과 회사의 지원을 끌어내 그 아이를 고쳐준 것이 시발이 됐습니다. 봉사도 중독성이 있더군요(웃음). 봉사를 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짓는 것 같고, 뭔가 잘못된 삶을 사는 것 같았죠. 우리 삶 속에서 작은 나눔이라도 실천을 할 때 이웃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미술관』을 통해 수집의 기준에 대해서 소개하시기도 했는데요. 지금의 안목을 키우기까지 비결은 무엇인가요.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가졌다기보다는 발품을 참 많이 팔았던 것 같아요. 많은 전시를 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조금은 전문성을 갖지 않았나 싶어요. 처음에는 그림이라고하면 그저 보는 게 전부 인줄 알았죠. 그러나 보는 것은 기본이고 많은 것을 들어야 할 것 같아요.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요.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우선 내 마음에 들어야겠죠. 와 닿는 느낌이 있습니다. 거기에 작가의 인생, 살아온 과정 이런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합해지고 나중에 재화적인 면에서도 같이 가치가 올라간다면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생에서 예술의 영향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껴 온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예술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신다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전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집 안에 작품 하나를 걸어놓음으로서 가족들과 많은 대화가 있었고 그 속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문화예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굳이 작품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달력에 있는 좋은 작품을 액자로 걸어 놓는 것도 괜찮습니다. 부부와 자녀 간에 대화가 달라질 겁니다. 예술은 가족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갈 수 있게 해 주기도 하죠.
매출 3,000억 원이 넘는 유니온약품의 회장이자 이 책의 저자 유병광은 과거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동네 의원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결국 사직서를 들고 상사를 찾아갔지만, 자신을 믿어주며 한 번 더 기회를 준 상사의 든든한 신뢰를 등에 업고 이후 회사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린 영업사원으로 성장한다. 이처럼 성공한 제약회사의 회장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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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양을 위해 그림을 한 점 한 점 사 모은 영업사원, 30년 만에 ‘마침내’ 미술관을 열다. 매출 3,000억 원이 넘는 유니온약품의 회장이자 이 책의 저자 유병광은 과거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동네 의원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