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가족이라는 것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공동체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한다. 개별 가족 단위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사연들의 연대와 유착이 ‘가족’이라는 공동의 정서와 지향을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가족 신화는 모든 세속적인 가치에 앞서는 듯 다루어지지만 정작 어느 무엇보다 세속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가족 신화에 대해 아무런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순전히 납득하기에, 세상에는 가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죄와 폭력이 너무나 많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가족에게 무관심한가. 그들은 아내와 남편, 아들과 딸,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나와 언니와 동생으로 호출될 뿐 대개 개별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외부의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그런 말들이 가족을 향해 퍼부어진다. 과잉된 폭언이나 행동이라도 여보,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언니, 동생이라는 말의 맥락이 그것을 알아서 해명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보,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언니, 동생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맥락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그저 규정된 관계 혹은 가부장 사회 안에서 일종의 계급일 뿐이다. ‘가족’이라는 말의 낭만적인 쓰임에 어울릴 법한 애정과 관심을 갖추기 위해선 그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식의 배려는 잘 성립되지 않는다. “가족이니까”라는, 아무 의미 없이 껍데기에 가까운 통념이 이미 충분한 설명을 전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고종석의 소설
『해피 패밀리』는 한민형과 한민희를 위시한 가족 구성원과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건 가족의 사연이다. 그들의 관계는 공통의 사연을 통해 해체되거나 이해되고 있다. 이야기의 전반에는 한민희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가 느슨하게 엮여있다. 그 미스테리는 발견이 아닌 발굴로서 가족들의 사연 안에서 조금씩 점층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마지막 문장을 통해서다. 그러나
『해피 패밀리』가 반전의 묘미를 선사하는 류의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매우 느슨한 미스테리이며, 미스테리가 이 서사의 주요한 전략도 아닐 뿐더러, 작가가 미스테리 문법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각각의 챕터는 각자의 이름과 출생년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시종일관 ‘나’다. 그러나 챕터 분류의 성격상 이 각각의 ‘나’는 서로 완전히 다른 ‘나’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나’는 전반의 서사를 균일하게 관통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서사의 완결이나 미학을 위해 좋은 전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기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속살에 있어서 완결이나 미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이야기를 떠들 뿐이고 공통의 사건을 서술하고 있을 때도 입장에 따라 사소한 의견의 차이를 보인다.
다른 것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를 다룰 때 이는 매우 정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별다른 구성의 묘 없이(이것은 참신한 구성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약점을 노출할 수 밖에 없는 무책임의 구조다) 각자의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시작되고 맺어질 때 전달되는 공허하고 잔인한 단절이, 역설적으로 청량감을 안겨준다.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이 소설에 관련한 팔 할의 상찬을 바로 그 자신감에 돌리고 싶다.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치못할 단점이 수반된다. 화자가 ‘나’인 소설에서 각기 다른 ‘나’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합당할만한 화법의 차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술 - 부정 - 재서술”로 이어지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정서의 톤에 이르기까지 균질한 리듬이 공유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최소한의
『라쇼몽』적인 태도가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공동의 기억에 대해 공통의 합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해피 패밀리』라는 이 소설의 제목을 역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균질한 수준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것은 평균 이상의 행복한 가족임에 틀림이 없다.
나아가 이와 같은 태도는 리얼리티에 있어서도 문제를 야기한다. 한민형이나, 그와 말을 섞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80년대생의 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대체 “불란서 사람이”라는 민형의 표현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결혼이란 어차피 계급혼 아니니”라는 현주의 말이 그 세대에게 어울리는 일상의 언어인가(그 때문에 이 소설은 대화로 채워지는 구간보다, 사유로 이어나가는 구간이 더 읽기 수월하다). 한민형이 80년생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주변부 사람들의 인생에 IMF 파동이 별 다른 영향력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주지할 만하다. 그와 같은 시대상은 “요즘처럼 취직하기 어려운 때에”라는 영미의 말에서 매우 피상적으로나마 다루어지지만 여전히 미진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의구심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살만한 중산층 가정이라는 맥락을 감안할 때 거시적인 차원에서 껴안을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 새끼들을 그 누구보다 앞서 냉정하게 응시하는 작가를 발견하며 잔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바로 그 ‘살만한 중산층 가정’의 일원들이 현실적인 욕망의 층위에서 맞닥뜨리는 계급 상승의 충동을 보자. 출판사 사장에, 편집장에, 교사에, 공무원에, 좋은 대학 출신자들로 채워져있는 이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이상할 정도의 결핍과 충동은 우습고도 합당한 욕망이 된다. 원래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계층이 계급 상승의 욕망에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 이야기도 건사하기 어려운 데 남의 가족사까지 들여다보는 행위는 그것이 동정이 아닌 이상 피로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
『해피 패밀리』는 피로한 이야기다. 그러나 동시에 사려 깊고 정직한 이야기다. 어떤 면에서 토마스 빈터베르크가
『셀레브레이션』에서 가족의 문제를 다루었던 건조하고 속 깊은 시선과 맞닿아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굴곡을 다루는 담담함이 닮아있다. 그것은 대개의 작가들이 끝내 갖추지 못하는 미덕이다.
확실한 건 한국사회 가족 담론에 있어서
『해피 패밀리』가 보여주는 맨얼굴의 솔직함이 매우 드물다는 지점이다. 나는 고종석이 최소한 스토리텔러로서의 롤에 있어서 언젠가 절필선언을 철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내가 아는 고종석의 말투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통화 내용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또한 한민형의 강박을 서술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노출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해피 패밀리』의 명민함과 날카로움에 더불어 표면의 위악도 찾아볼 수 없는 새 이야기의 등장을 희망한다. 간절한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간절함의 깊이는 고종석이 감추고 있을 뿐, 그 자신이 더 할 것이다.
고종석 인터뷰 보러가기→ //ch.yes24.com/Article/View/21421허지웅의 ‘해피 패밀리’ 리뷰→ //ch.yes24.com/Article/View/21460고종석 작가와의 만남 신청→ //ch.yes24.com/Culture/SalonEvent/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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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 패밀리 고종석 저 | 문학동네
고종석의 신작 소설, 세 번째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친근하고 가깝다 여겨온 ‘가족’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날카롭고 서늘하게 파헤친다. 소설은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민형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아들이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인 아버지 한진규, 고등학교 역사교사이자 어머니인 민경화, 한민형의 처이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서현주, 한민형의 동생인 한영미와 한민주, 대학 후배인 이정석, 장모인 강희숙, 딸 한지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민형의 누나 한민희까지 모두 화자로 나서 각자의 사연과 감정 들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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