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문을 연 서울시청 신청사. 업무 차 이곳에 종종 들어가는데, 독특한 구조와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외형과 규모에 대한 토건적 발아였던 ‘디자인 서울’에 집착한 오세훈 전임 시장의 취향이 반영돼 있다. 쓰나미 같기도 하고, 디지털복합기나 에스프레소 머신이 연상되는 이 구조물 뒤는 밋밋하고 초라하다. 보이는 부분만 신경 썼다는 인상이 든다.
지금은 ‘서울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단 구청사의 앙상한 몰골도 문제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청’으로 사용했던 이곳은 신청사 때문에 많은 부분이 헐리고 지워졌다. 나쁜 기억 때문이었을까. 왜 그래야만 했는지, 많은 서울시민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설혹 그것이 나쁜 것일지라도, ‘기억의 의무’에 대한 인식이 없다. 잊히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쉽다. 과거를 지우고 싶다손, 그것을 지우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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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서울시청은 부숴야만 하는 건물이었을까? 나치즘과 파시즘을 경험한 유럽에서는 ‘기억의 의무’를 중요시한다. ‘네거티브 문화재’라는 이유만으로 없애버린다면 기억해야 할 역사까지도 사라져 결국 비슷한 우를 다시 범할 수 있다는 교훈 때문이다. 그들이 유대인 강제수용소나 정치범수용소, 혁명의 현장,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적지를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략 일제 때의 건물이라고 해서 옛 서울시청을 철거해버린다면 서울사를 넘어 한국사의 ‘1급 현장’을 한국인 스스로 지워버리는 셈이 된다.”(p.123~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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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울에 비해 베를린이 품은 ‘기억의 의무’가 대비된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며 폐허가 된 베를린. 상처받은 시민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망명 갔던 독일의 대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불러 미술관을 짓게 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베를린을 위해 20세기 건축의 최대 걸작 중 하나를 선사했다. 시민들은 폐허의 인식 위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거의 모든 행정의 결과는 건축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짐을 안 독일 정부의 심미안 덕분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 거의 모든 행정부 혹은 관료주의가 지닌 감수성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특히 베를린은 지난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평화를 지키자는 의미에서 기념의 장소를 곳곳에 만들었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성찰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통일독일 이후에도 공산주의 학정에 대한 기억을 포함해 인간의 존엄을 해친 모든 비윤리적이고 반문화적 행위에 대한 기억을 대대적으로 곳곳에 만들었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 새겨진 베를린의 풍경이다.
시간을 지운 소공동 차이나타운
우리는 왜 그렇게 부끄러움을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지 않았을까. 남들 보기에 부끄럽다 싶으면 모든 것을 지우자고만 했을까. 지금,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이 있는 곳도 그렇다. 과거 이곳은 차이나타운, 즉 화교촌이었다. 화교들이 모여 살던 이곳, 경제적으로 잘 사는 곳은 아니었지만 화교 나름대로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다. 그런 화교들의 지역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이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우방’ 미국 대통령을 성심으로 모셨다. 공항에서부터 서울 중심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화교촌이 노출됐다. 조국의 열악한 모습이 방송을 타고 나갔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현실이자 일부였음에도, 재미동포들, ‘쪽 팔린다며’ 청와대에 진정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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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향해 달리는 ‘자유세계의 투사’와 같은 이미지를 쌓고 싶었던 박정희로서는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미국 교포들이 텔레비전에 비춰진 고국의 모습이 부끄럽다며 ‘서울시청 주변의 슬럼 지대를 정리해달라’는 탄원서를 냈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그것을 빌미로 차이나타운에 대한 재개발에 들어갔다. 서울시는 노후한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화교회관’을 지어 입주시켜준다는 말로 화교들을 회유했다. 철거는 1971년 10월 18일부터 닷새에 걸쳐 진행되었다”(p.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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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화교회관을 지어준다고 해놓고선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한화그룹이 나서 중앙정보부의 협력 하에 땅을 샀다. 플라자호텔 등을 지었다. 화교회관은 끝내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에서 이주민, 이주노동자들이 힘겨운 건, 지금도 여전하다. 12월 18일,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내국인과 동등한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UN이 지정한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이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주노동자권리협약을 비준하고 있지 않고, 이주노동자 노동조합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대문구와 마포구에서 차이나타운을 짓는데 지원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데, 관광자원, 세수확대 등의 이기적인 목적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선 소수자 차별이 지속되고 있다. 광진구에는 몽골학교가 있지만 학력 인정이 안 된다. 일본의 재일동포 차별에 대해선 분노하면서 한국 내에는 상당한 차별이 존재한다. 다음 총선에선 이주 2세들의 투표권이 보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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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은 한국인들이 말하는 ‘다문화 다민족’은 사회적 소수자의 체념과 동화를 유도하는 용어일 뿐이다.”(p.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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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받는 황제의 상징, 환구단
옛 화교촌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플라자호텔 뒤편의 길을 따라 조선호텔 방향으로 향한다. 조선호텔 건너편의 공영주차장, 권 작가는 이곳이 일본 공사 관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아직 발굴은 않고 있으며, 공영주차장 아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 길을 따라 나 있는 소공로는 대한제국 때 만들어졌다. 고종이 아관파천(1896년) 후 거처를 덕수궁(당시 경운궁)으로 옮기고 도시구도 재편과정에서 소공로, 을지로 등을 완비했다. 이 길들은 일제강점기에 확충돼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나왔다.
조선호텔 입구를 지나니 환구단(원구단)이 보인다. 나로선 세 번째 방문이다.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 교수와 함께 했던, <전우용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서울 탐사기>(
//ch.yes24.com/Article/View/14147)를 통해 처음 환구단의 존재를 알았었다. 환구단, 원구단, 그 이름을 놓고 아직 논란이 있지만, 권 작가는 독립신문에 환구단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물론 원구단으로 쓰자는 주장도 여전히 있다.
“환구단은 사직단, 장충단처럼 공원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되면서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들었다. 이전에는 남별궁이라고 중국 사신이 오면 머무는 곳이었으나 이것을 없애고 황제의 나라가 됐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흔적을 없애려고 환구궁 하나만 남기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국제성, 근대성 등 일본의 근대성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해방이후에 불이 났고, 웨스턴조선호텔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 환구단은 마치 조선호텔의 정원처럼 전락했는데, 대한제국 당시 환구단은 서울이 다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았다.”환구단 주변 정리는 내년 3월까지로 바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전통 건물로는 초고층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팔각건물이었다. 팔각형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팔각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중재하는, 원과 사가그이 중간에서 왕이나 황제를 상징했다. 즉,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는 도형이었다. 탑골공원 팔각정도 그런 경우다. 고종이 만들었는데, 황제의 권위가 백성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요즘 어느 ‘가든’을 가든 ‘팔각정’으로 불리고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무엇보다 환구단이 위치한 자리의 ‘상징성’이 다시 되새김질됐다. 상징의 역전이 치열했던 곳. 중국의 사신이 머물렀던 곳. 중국의 영향이 지배적임을 보여준 곳이었다. 고종은 그런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새로운 천하의 건설을 상징하기 위해 환구단을 건조했다. 그러나 일제가 그것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환구단을 허물고 1914년 조선호텔의 전신 철도호텔을 지었다. 잡배들이 묵고 스쳐가는 호텔을 세워 황제국의 상징성을 박탈하고자 했다. 지금 많은 이들은 그런 역사를 알지 못한다. 역사는 묻힌 채 비즈니스만 횡행한다. 신자유주의가 집어삼킨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환구단의 정문은 지금 엉뚱한 곳에 덜렁 세워져 있다. 신자유주의가 내몬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 맥락 설명도 없이 데코레이션 같은 판넬만 있다. 그것도 시민들이 보기 힘든 장소에. 기억의 역사가 없는 아쉬운 풍경이다.
“환구단 정문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대한제국 상징을 일제가 뽑아내 옮겨놓은 탓이었다. 환구단 정문도 수유리 등산로 먹자촌 초입 부근에 차고지 정문처럼 쓰이고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됐다. 알고 보니 환구단 정문이었던 거지. 1~2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원래 정문이 있던 곳이 조선호텔인데, 그곳이 사유지다보니 시유지인 지금 자리에 세워둔 것이다.”서울시청을 둘러싼 모험
환구단을 나와 닿은 곳은 서울시청. 권 작가는 구청사를 보는 만감이 교차한다. 이곳은 ‘등록문화재’였다. 오세훈 전 시장은 그런데 이것을 신청사를 지으려고 몰래 부쉈다. 아니, 법적으론 큰 하자가 없었다. 근현대 문화유산 가운데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 건물을 대상으로 한 등록문화재는 신고만 하면 변형하거나 헐어낼 수 있다. 법적 처벌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역사학계 등에서 구청사를 남겨놔야 한다고 해서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헌데 어느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부쉈다. 신고는 당일 6시 넘어서 했다. 문화재위원회가 가지정한 신고문화재를 철회하는 등 한바탕 소동도 있었으나, 결국 오 전 시장은 기억의 의무를 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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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옛 청사 자리에 새 청사를 짓겠다며 지난 2006년부터 2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설계를 고쳐가면서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요구해온 서울시였다. 문화 경관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번번이 반려되었지만, 기어코 그 자리에 새 청사를 짓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은 서울시는 문화재청과 옛 청사를 어떤 선에서 보존하고 리모델링할지를 논의하던 와중에 끝내 문화재를 ‘부숴버리는 배수진을 치기에 이르렀다.”(p.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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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청사도 온전히 옛 것이 아니다. 돔이 유리로 교체됐고, 시계도 바뀌었다. 구청사와 신청사의 동거도 어색하다. 위정자나 행정관료들, 도시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자들인가 보다. 역사는 물론 미학도 없다. 서울을 사는 사람들의 미적 감수성이 퇴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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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사회경제적인 산물이다. 무엇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할 것이며 무엇을 철거해도 좋은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권력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p.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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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서울시 의회 건물은 일제강점기, 부민관(부민회관)으로 불렸다. 당시 경성 유수의 건물로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사교실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춘 공간이었다. 각종 집회가 잦았고, 10대 청소년 3명(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1945년 7월 24일 친일파 일당의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다. ‘부민관 폭파의거 터’라고 불리는 이유다. 특히 고 조문기 씨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셨고, 2008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친일 청산이 될 때까지 받지 않겠다며 거부하셨다고 권 작가는 전했다.
이곳은 건국 후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김두한이 삼성 이병철 회장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 국무총리에게 똥물을 퍼부은 사건이 있었던 장소였다. 또한 이곳은 ‘4.19 혁명’의 중심지였으나, 이곳을 설명하는 표지석은 그런 맥락 설명이 없다. 학생들이 4.19혁명 선언을 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고 돼 있으나, 그 국회의사당이 이곳임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혼돈하게 만든다.
그리고 ‘함께 살자, 농성촌’을 지난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집회가 많았던 곳이다. 촛불집회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구한말부터 대한문 앞에서 집회가 많았다. 만민공동회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고종이 있는 궁 앞에서 민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곳에서 집회가 잦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가 상대적으로 멀리 있다. 구한말보다 민의가 더 전달되기 어려운 구조라고나 할까. 대한문도 예전엔 훨씬 앞이었는데 도로사정 등으로 뒤로 많이 밀렸다.”정동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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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나 육교라는 것이 언뜻 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놓인 것 같지만, 실은 차량 통행이 먼저니 보행자는 ‘그곳으로만’ 길을 건너라는 무언의 명령에 다름없다.”(p.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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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 시청 서소문별관이 과거 법조단지였는데 가정법원 등이 있어서 그런 속설이 생겼다는 얘기가 있다. 누군가에겐 이혼하러 가는 길이었기에 그렇다는 것. 이 길, 원래 차도였던 것을 보행통로를 넓히고 구불구불 일방통행으로 바꿨다.
“걸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도시”라는 이경훈 교수(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말이 떠오른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에 화답했었다.
“서울을 ‘걷는 도시’로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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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하나둘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동에서는 일부러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차량의 속도를 늦췄고, 인사동이나 대학로 등 일부 지역에서는 요일이나 시간에 따라 자동차 출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중략) 자동차에게 내어준 길 위의 권력이 다시금 사람들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p.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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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에 도달했다. 권 작가는 이곳이 서울시청사와 정반대의 건축 철학과 후일담이 들어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시립미술관은 일제강점기에 법원이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법적 탄압이 있었다. 이 같은 역사로 부정적 유산이라며 철거가 거론됐다. 그 와중에 미술관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실내구조와 뒷부분을 새로 짓는 대신 역사성을 살리면서 목적에 맞게끔 재설계ㆍ건축됐다.
“이 건물과 서울시 신청사가 한국 민주주의 이야기와도 연관되는 것 같다.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의 가치를 드러내주는 게 역사다. 전태일 다리에서 며칠 전 흉상제막식이 있었는데, 임옥상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역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에 만드는 것이다.”
시립미술관에서 서울사진축제를 엿봤다. ‘마을공동체와 사진 아카이브’를 내용으로 한 ‘천개의 마을 천개의 기억’은 시민 참여형 전시로 더욱 뜻깊다. 오는 30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니, 서울에 산다면 꼭 볼 것을 권한다. 시립미술관을 떠나 광화문으로 넘어가는 길. 과거 경기여고 터에서 잠시 멈춰 선다.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미국정부가 대사관 이전을 위해 이 터를 샀다. 그러나 여러 시민단체들이 공사 이전에 발굴조사를 먼저 하자고 주장했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무산됐다. 미국 정부는 결국 용산에 대사관과 숙소를 짓기로 했다. 따라서 이 터는 지금 전투경찰의 놀이터이자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경기여고는 왜 강남으로 옮겼을까?
“김신조가 넘어온 1.21사태로 정치권에서 불안감이 증폭됐고, 강남 개발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쉽게 강남으로 가지 않아서 인위적으로 명문 중고를 강남으로 옮겼다. 나이트, 예식장 등도 강북 대신 강남에 짓도록 유도했다. 경기여고도 이때 옮겼다.”좀 더 내려오니 덕수초등학교. 1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재밌는 것은 경성방송국이 이곳에 있었다. 덩그러니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KBS는 방송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의 경성방송국에 두고 있으나, 그때 그 시절의 반성은 않고 있다. 권 작가는 방송의 아픈 과거를 꼬집는다.
“국가기구로서의 역할에 방점이 찍혔던 방송‘국’은 지금 방송‘사’로 바뀌었지만, 정치권력이나 자본으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아직 방송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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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기준대로 ‘방송 60주년’이던 지난 1987년, 경성방송국이 있던 자리에 ‘첫 방송터’라 쓴 비가 한 기 세워졌다. 그런데 비의 모양이나 내용을 보면 방송에 대한 자부심과 오랜 역사에 대한 애정만 느껴질 뿐, 아무리 살펴봐도 방송 내용에 대한 자성이나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일제강점기의 경성방송국과 확실히 단절하지 못한 채, 한국 방송의 역사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p.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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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에 도달했다. 권 작가, 세종로 사거리의 교보빌딩 아래를 가리킨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비가 서 있는 곳에 ‘고종즉위사십년칭경기념비’가 있다. 순종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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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순종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황제인 고종의 망육순, 즉 쉰한 살이 됨을 축하하는 동시에 즉위 40주년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비에 적혀 있는 실질적인 내용이다. 고종이 황제라는 칭호와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p.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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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은 과거 경희궁이 있던 자리였다.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없어진 곳이 경희궁인데, 조선총독부 직원들이 자녀교육을 한답시고 경성중학교를 만들면서 경희궁을 없앴다. 경희궁의 정문은 지금 구세군회관 자리에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 역사 복원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물론 통치의 목적이었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었기에 그 허물을 덮으려고 민족문화를 창달한답시고, 그렇게 했다. 이번 여름장마 때, 광화문 현판에 누수가 일어나고 갈라지고 했다. 이런 것을 보면, 과연 모든 것에 복원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지 의문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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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권력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흔적은 종종 거대 건축물로 구현되곤 하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눈에 잘 띄고 영속적이며 상징성을 부여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욕심이 너무 들어가면 세금 낭비를 넘어 위악적인 흉물이 되고 자연히 시민들의 원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권력자의 안위는 거기에 반비례할 뿐이다.”(p.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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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을 따라 거닌 서울에는 ‘기억의 의무’를 저버린 흔적이 너무 많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과거라는 이유로 깡그리 지우고 모른 척 해도 되는 것일까. 현재는 과거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다시, 서울을 생각한다. 서울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으므로. 따라서 길을 기억해내는 것은 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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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을 걸으며 깨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모든 과거가 한결같이 ‘현재적’이었다는 점이다.”(p.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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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서울을 걷다
- 권기봉 저 | 알마
2008년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에서 저자 권기봉은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서울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 문화,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지금,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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