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들은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찬란하고 짜릿한, 결정적 한방을 날리는 그 때가 올 거라는 환상 말이다. 물론 인생에 그러한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를 기다리느라 지금 이 순간을 소홀히 생각하고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파랑새를 바로 곁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 돌아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어냐, 묻는다면 『산에는 꽃이 피네』의 마지막 장에 류시화가 적은 글로써 대신하려 한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주 작가의 두 번째 에세이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을 읽은 후의 감상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을 ‘그때’와 똑같이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만 ‘그때’가 허락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평범하지만 찬란한 일상의 이야기
“그동안 보아왔던 일상의 이야기들, 주변 분들의 이야기, 살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썼어요. 책에 등장하는 경비원 아저씨나 나물 파는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 평범하지만 찬란한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더니 배울 게 참 많더라구요.”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은 작가가 일상 속에서 직접 경험한 일들과 그 안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특별할 것은 없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고 생각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일상 속에서’라는 부수적인 표현을 굳이 덧붙인 이유다.
어쩌면 이 책은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와도 같다. 그 일기를 공유하며 독자들은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고, 자신과는 다른 작가의 감각세포를 발견하고 흥미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조곤조곤 수다를 떠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
별다를 것 없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다.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가도 문득 그 손길을 멈추고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가수를 꿈꾸며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호된 질책을 당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며(「편의점 청년의 ‘Tears In Heaven’」), 나도 누군가의 재능을 너무 쉽게 저울 위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지 않나, 되돌아보게 된다. 리어카 옆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과일 장수 아주머니를 보며 먹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황조롱이 어미새를 떠올렸다는 작가의 말에(「황조롱이 가족의 은빛 둥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을 맞게 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너무 미화시킨 것 아니냐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런 것들을 서로 용인해 줬으면 좋겠다고. 신문사의 경제부와 정치부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동일한 팩트를 두고도 서로 다른 기사가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는 똑같은 사람을 두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라고 말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동일할 수 없는 것이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 같아요.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며 그는 문학을 이야기했다. 문학을 읽음으로써 내일에 대한 희망을 얻고, 오늘의 척박함을 무마시키고, 내일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오늘의 고단함을 잠시 지워내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 같아요. 좌표를 그려서 어느 속도로 어느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생은 아닌 것 같아요. 방향을 정해놓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방향을 제대로 정해놓은 사람들은 중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피해가거나, 넘어가거나, 땅을 파서 뚫고 가거나, 어떻게 해서든 가는 것 같아요. 그게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정답은 없죠. 정답이 있다면, 정답이 없는 게 정답 아닐까요. 그것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인생에서 장애물을 만나는 순간이 있듯, 인생의 정점인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정점의 그 순간들은 언제나 찰나다. 그때를 위해 고민하고 참아내는 순간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길다.
하지만 작가는 두 순간 사이의 개연성을 이야기한다. 정점이 아닌 그 시간보다 더 자신에게 어울리고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고, 그런 개연성을 염두 해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꿈이 없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양가성’이 있는 것이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한편 인생에서 보다 나은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기주 작가가 글을 쓰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자신의 글을 읽을 누군가의 건조한 일상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위안을 건네는 것이다. 스포이드로 떨어뜨리는 한 방울의 물이 리트머스지에 쏙 빨아들여지듯이 누군가의 생각이나 마음에 작은 위안이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 역시 힘들 때 좋은 글을 읽고 많은 위안을 받았기에 그것이 작가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혹은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어서도 아직 못해본 것이 있고 아직 더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멋있다고 이야기하는 그. 그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고 정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고 겸허하게 말하는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속 그의 모습이야말로 멋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듣기 좋은 이야기라 해도 그 안에 진심이 없다면 전달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이기에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은 진정성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
-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 이기주 저 | 청조사
이 책은 저자가 평범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견한 소박한 삶의 흔적들로 기록돼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다.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꿈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이들이며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일상을 포착해 때론 미세하고 부드럽게, 때론 치밀하고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에서 꿈과 희망의 의미, 행복에 대한 고민과 물음을 끄집어내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