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폐 뒷면에는 무엇이 있나? - 손태호『나를 세우는 옛 그림』
‘괜찮다, 다 괜찮다...’ 조선시대 그림에 담긴 삶의 숙명과 희노애락.
시대의 그림들은 그 세계를 반영하지만, 그 ‘그림들이 가진 옛 화가들의 치열했던 삶과 고민(손태호)’은 동시대를 넘어 그네들과 같은 땅에서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위로와 희망의 손길을 건넨다. 조선시대 화가로 이름을 떨친 옛 선인들의 그림을 말하는 ‘나를 세우는 옛그림’의 저자 손태호 작가의 출간 기념 강연 현장을 함께 했다.
시대의 그림은 그 세계를 반영하지만, 그 ‘그림이 가진 옛 화가들의 치열했던 삶과 고민(손태호)’은 동시대를 넘어 그네들과 같은 땅에서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위로와 희망의 손길을 건넨다. 심사정,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신윤복, 김홍도, 정선. 조선시대 화가로 이름을 떨친 옛 선인의 그림을 말하는 『나를 세우는 옛그림』의 저자 손태호 작가의 출간 기념 강연 현장을 함께 했다.
오늘의 주제 _ 옛 그림과 친해지기
“귀한 시간 내주셔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재밌게 들으시고, 강의를 듣는다는 생각보다는 같이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옛 그림과 친해지기’라는 말이 거창한데 그냥 ‘옛 그림 같이보기’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다 아는 그림이라도 저와 함께 한번 더 감상해 본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30대 후반, 세상살이에 지쳐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던 무렵, 우연히 옛 그림을 만났다는 저자는 옛 그림에 심취해 미술관과 고서화점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문화의 매력에 빠져 동국대 문화 예술 대학원에 들어가 미술학을 전공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옛 그림이 굉장히 멀리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옛 그림은 우리 삶과 상당히 밀접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멀게 느끼는 이유는 매일 보는 옛 그림들을 눈 여겨 보지 않기 때문이에요. 5만 원권 유심히 보신 적 있나요? 매일 보시잖아요, 5만원 권. 사실 저도 가끔 봅니다.”(웃음)
화폐를 통해 만나는 옛 그림 이야기
5만 원권 앞장에는 신사임당의 ‘포도도’가 그려져 있다. 손태호 작가는 신사임당에 대해 "예술적 성취와 기량이 당대 최고였으며 율곡의 어머니라 오히려 평가 절하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포도도’는 가지의 표현이라든가, 묵법에 굉장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릴 수 없는 기법들을 사용해 지금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초충도’보다 당대에 훨씬 유명하고 칭찬받은 그림이었다. 5만 원권 뒷장에는 어몽룡의 ‘월매도’가 있다.
“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선비 화가라면 누구나 그리던 것이 매화 그림입니다. 어몽룡의 ‘월매도’가 조선 최고의 매화그림인 이유는, 매화를 꺽어 그리지 않고 길게 뻗어 그렸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매화를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선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겁니다. ‘월매도’에 겹쳐 있는 그림 하나는 ‘풍죽도’인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이 시작하는 부분부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사선으로 대나무를 그렸어요.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를 그리지 않고 바람에 맞서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지요. 이것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거라고 봅니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화폐를 통해 옛 그림에 대한 호기심과 친밀함을 이끌어냈다.
“만 원권을 볼까요? 만원권에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왕의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옛 날에는 왕이 어디로 행차 할 때 항상 일월오봉도를 들고 갔습니다. 왕이 앉는 의자나 병풍을 그려놓는 ‘일월오봉도’에는 해와 달이 있고 다섯 개의 봉우리 사이에 폭포, 4그루의 소나무, 계곡과 땅이 번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하늘에서부터 부여받은 덕을 내려서 온 만물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산과 땅의 의미로 석삼을 그리고 왕이 정좌해서 앉은 모습이 임금 ‘왕’자입니다. 그래서 왕의 뒤에는 반드시 일월오봉도가 있어야 했어요. 만원 지폐에 세종대왕이 그려졌기 때문에 ‘일월오봉도’도 그려져 있어야 했던 겁니다.”
5천 원권에는 율곡 이이와 함께 ‘포도도’에서 언급되었던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있는데, 수박의 표현을 보면 서양미술과 달리 밑 부분은 하얗고 윗부분은 파란, 신사임당의 남다른 표현력을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이 유년시절에 얼마나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주의 깊게 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손태호는 이렇게 지폐에 그려진 우리의 옛 그림을 설명하면서 ‘너무 익숙하고 관심 있게 보지 않기 때문에 옛 그림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옛 그림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있다’고 설명했다.
램브란트는 알아도 윤두서는 누군지 모르는 현실
“현대인들이 옛 그림을 왜 그렇게 멀게 느끼고 있는지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제일 먼저 생기는 문제는, 어릴 때 서양미술 위주의 교육을 먼저 받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미술 공부하라고 강제로 학원에 보내서 한 달 만에 그만둔 기억이 있습니다. 서양 미술의 기본적인 바탕은 스케치인데 손가락만 한 달 동안 그렸으니 초등학생이 얼마나 지루했겠어요? 어머니한테 저를 포기하시던지 미술을 포기하시던지 선택하라고 했습니다.(관중 웃음)”
손태호 작가는 서양미술 중심의 그림 교육을 받다보면 램브란트는 알아도 윤두서는 누군지, 고흐는 알아도 장승업은 누군지 모르게 된다고 속상해 했다. (장승업의 타고난 재주는 조선 제일인데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너무 주정뱅이에 미치광이로 나와서 속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옛 그림이 멀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실기 위주의 미술 교육 때문인 것 같아요. 미술시간에 미술 재료 안 가져가면 선생님한테 혼나잖아요. 그걸 재밌어 하는 아이들에겐 즐거운 일이지만, 미술을 못하는 아이들은 재료를 안가지고 가면 혼나는 시간이라는 생각밖에 안드는 거에요. 그림을 그려도 선생님한테 칭찬도 못 받고, 교실 뒤에 붙는 일도 없고, 그러다보니 미술이 재밌고 즐겁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잘하는 몇 몇 사람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옛날에는 더더욱 교과서가 작고 흑백그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그림으로 미술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는 굉장히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데이트를 해보세요.
도록도 구입하시구요.
작가는 직접 미술관과 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감상해보길 권한다. 또 전시에 가면 반드시 도록을 사서 구입하라고 한다. 그런 것들을 통해 나와 타인의 시선을 비교함으로서 감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직접 미술작품을 보는 이런 습관들을 들이는 게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술관, 박물관에 가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데이트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해보세요.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는 정말 좋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요. 호수 있죠, 정자 있죠, 주변마다 탑도 있고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서 데이트 하면서 미술도 보고, 가급적이면 도록도 구입하시구요. 타인의 품평 읽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신의 감상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요. ‘이 그림을 이렇게 볼 수 있구나.’ ‘이 사람은 이런 걸 느꼈구나.’하는 걸 깨닫는거죠. 그래서 전시회를 가시면 반드시 도록을 사서 구입하시는 그런 습관을 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옛 그림을 보는 올바른 방법,
추사 김정희 “서화 품평에 있어서는 ‘금강안 혹리수’가 필요하다.”
“추사 김정희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서화품평에 있어서는 ‘금강안 혹리수’가 필요하다. 금강안은 금강석을 꿰뚫을 만큼 정확한 눈, 혹리수는 세금을 거두는 관리의 냉혹한 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림을 보는 눈이 엄청 치밀하고 냉혹해야 그림 보는 안목이 생긴다는 뜻인데요. 사실은 이게 맞는 얘기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추사 김정희는 항상 지식인 중심의 사고, 인텔리 중심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옛 그림을 보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간송미술관 의원이시고 중앙대표 겸임교수셨던 선생님이 옛 그림을 보는 너무나 좋은 세가지 방법을 말씀 하셨는데요. 1.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볼것, 2. 작품 크기에 대각선으로 1.5배 떨어져서 볼 것, 3.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고 위에서 아래로 볼 것, 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오른쪽에서부터 봤기 때문에 화가도 사람들이 오른쪽부터 본다는 걸 감안하고 그렸어요. 자기 그림의 하이라이트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렸기 때문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미술관, 전시회에 가도 다른 사람들이 다 왼쪽부터 보더라도 오른쪽 벽부터 관람하세요. 또 옛날엔 세로 쓰기였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보시고, 작품을 자세히 오래 뜯어보시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감상하십시오. 그게 옛 그림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많이 보고, 자세히 보고, 찬찬히 보고, 오래 볼 것.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옛 그림을 보는 감시관이 성장하게 됩니다.”
책 속에서 말하는 첫 번째 그림,
절파학풍의 마지막 화가 김명국의 ‘설경산수도’
“절파학풍은 산악을 험준하게 그리고, 하얀색과 검은색의 묵법대비를 심하게 하는 게 특징입니다. 재밌는 건 산악을 비중있게 그려도 이 산악이 주인공이 아니라는데 있어요. 절파학풍 산수의 특징은 무조건 거기 나오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절파학풍의 분위기는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거에요. 김명국은 절파학풍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는 화가입니다. 김명국의 ‘설경산수도’를 보면서 이 그림은 왜 그렸을까? 생각했는데요. 그림을 보면 동자, 나귀, 선비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는데 뒤를 돌아보고 있죠? 떠나온 곳을 바라보는 건데요. 오두막집에 어느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이 사람과 이 여인이 헤어지는 장면을 그린 거에요. 이것이 설경산수도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김명국은 이 그림에서 이별을 말하는 것이지요.”
김명국은 호탕하고 술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김명국이 인생에서 크게 두 번 집을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둘 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 가려면 빠르면 4개월 길면 6개월이 걸리는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김명국은 1636년 첫 번째 조선 통신사로 일본 화원으로 처음 파견되는데 그 해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된다. 그 다음 1월에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되 있다 항복을 하는데 이때가 조선통신사가 귀국을 하고 있던 시기다.
“왕이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는데 결국 항복을 했다는 얘기는 한양이 쑥대밭이 됐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김명국 입장에서는 집에 놔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이었겠지요. 어느 날 그 소식을 듣고 잠을 자다가 와이프가 너무 그리워서 일어나서 그린 그림이지 않았을까, 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물론 아닐수도 있어요. 어디 문헌에 나와있는 얘기는 아닙니다.”(웃음)
목민심서 읽어 보신 분 계신가요?
목민심서를 읽고 눈물을 안 흘리면 문제가 있습니다.
정약용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사람인지.
“다산 정약용의 ‘매화쌍조도’는 너무나 유명한 그림입니다. 딱 봤을 때 그림은 작고 글이 굉장히 많아요. 이 말은 그림에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매화쌍조도’에는 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적혀 있어요. 정약용이 귀향하자 부인이 치마 여섯첩을 보내왔는데 정약용이 이것을 오려서 서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족자(그림)를 만들어 딸에게 줍니다. 그게 ‘매화쌍조도’인거죠. 그런데 부인이 시집 올 때 입고 온 치마를 왜 정약용에게 보냈을까요? 떨어져 있느니 자신을 생각하며 살라는 뜻 아니었을까요?”
정약용은 원래 아들이 네 명이고 딸이 둘인데, 천연두로 셋을 잃는다. 그래서 천연두에 관한 의학서까지 쓸 정도로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귀향을 갔는데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원래 고향인 남양주에서 귀향 가 있던 해남까지는 어마어마하게 멀어서 아들들은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여자인 딸은 거기까지 갈 수가 없어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1812년 딸이 결혼을 하게 된다.
“하나 남은 딸이 시집을 가는데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챙겨줄 수가 없으니, 시집가서 시댁 식구들이랑 행복하고 즐겁게 잘 살아라 하는 뜻으로 ‘매화쌍조도’에 시와 그림을 그려서 보낸 겁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너무나 다정한 글과 서찰을 받았을 때 딸은 또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안쓰러웠을까요? 편지를 받고 펑펑 울지 않았을까요?”
정약용이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린 다른 그림이 하나 있는데 1913년 8월에 그린 ‘매조도’다. 음력 7월이니 거의 8, 9월이었을텐데 왜 3, 4월에나 피는 매화를 그렸을까?
“비슷한 시기에 굉장히 상반된 두 그림을 그렸어요. 하나는 앞에서 말한 딸에게 주려고 그린 그림 ‘매화쌍조도’이고, 다른 하나는 ‘매조도’입니다. 그럼 ‘매조도’는 누굴 위해 그린 것일까요? 어떤 한문학자 선생님 한 분이 생각하시길, 당시 다산 초당에는 정씨라는 소실이 있었는데 소실에게 홍임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해요. 아마 그 딸에게 주려는 게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소실을 두는 게 부끄러운 시대는 아니었지만 당시 소실을 받아주고 안받아주고는 정실이 결정할 문제였다고 해요, 정약용이 귀향이 끝나고 자기 집으로 이들을 부르긴 했는데 1년 후 다시 그 집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결혼한 부인과 60년을 해로하고, 그걸 기념하는 잔치 때 숨을 거두게 됩니다.”
손태호 작가는 그밖에도 『나를 세우는 옛그림』에 실린 심사정의 ‘딱따구리’, 윤두서의 초상화(자화상), 정선의 ‘계상정거도’, 신윤복의 ‘월하정인’, 채용신의 ‘매천 황현 초상’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재밌는 이야기들로 강연을 꽃피웠다.
“제가 준비한 그림은 여기까지입니다. 재밌으셨나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옛 그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책에서 말하는 그림들 외에도 아주 수많은 그림이 우리 곁에 남아있어요.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 대수장가의 글을 한편 소개 할까 합니다.”
그림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아끼는 사람, 보는 사람, 소장하는 사람이 있다. - 김광국의 ‘석농화원’ 발문 중 |
“제가 장담하건데 옛 그림을 접하면 반드시 사랑하게 되있습니다. 옛 그림을 가까이 했는데 지겨워서 안보겠다는 사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어요. 왜냐면 옛 그림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생활과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성서 내용을 모르면 알 수 없지만, 옛 그림은 보는 즉시 느끼고 전달 받을 수 있어요.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있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옛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고매한 정신과 인격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기에 일급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우리 옛 그림들은 식민지와, 전쟁과, 무수히 많은 고난을 거쳐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런 그림들이 한번쯤 자기를 봐달라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림’이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라는 건 아시나요? 우리 옛 그림은 정이 깊은 그림입니다. 정을 가지고, 정감어린 눈으로 바라 보면 그 정을 느낄 수가 있어요. 앞으로 옛 그림을 사랑하는 많은 현장에서 여러분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강연이 끝난 뒤 강의실 한 켠에는 저서에 사인을 받기 위해 좌중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제일 먼저 강연회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던 어린 소년부터,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온 젊은 청년들, 열성적으로 강의를 듣고 질문을 하던 어머님들. 저자의 바람처럼 옛 그림과 손태호 작가를 만나기 위해 온 우리 모두 일상에서 ‘몽유도원도’ 같은 꿈을 꾸고, 박물관과 전시회에서 다시 한 번 옷깃이 스치길 기대해본다.
자기성찰과 수신의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자 손태호는 옛 그림 보기야말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배움과 수행의 과정이라며, ‘옛 그림 수신론’을 주창한다. 미술에 대한 애정이 문화예술대학원에 들어가 미술학을 전공하기까지에 이른 그는 애호가에서 전공자로 옮겨 간 이력 덕분인지 옛 그림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관련태그: 손태호, 나를 세우는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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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과 수신의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자 손태호는 옛 그림 보기야말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배움과 수행의 과정이라며, ‘옛 그림 수신론’을 주창한다. 미술에 대한 애정이 문화예술대학원에 들어가 미술학을 전공하기까지에 이른 그는 애호가에서 전공자로 옮겨 간 이력 덕분인지 옛 그림에 대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