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에 진행되는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책’이 지난 2010년 12월, 여덟 번째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YES24는 '한겨레21'과 함께 올 한해 출판계를 정리하는 자료집 『책과 함께 우리는 행복한 겁니다!』를 만들어 YES24 회원과 <한겨레 21> 독자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자료집 안에는 독자와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를 실은 특집 페이지가 실려 있습니다.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가 편지를 띄우고, 그 편지를 읽은 작가가 독자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김중혁, 이석원, 김남희 작가님과 나눈 특별한 편지를 ‘채널 소식’에 차례로 게재합니다.
김남희 작가가 설해목 블로거에게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추운 겨울, 마음은 따뜻한 날들이신지요? 적지 않은 질문들을 받고,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서더군요. 혹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이 된다 해도 그저 솔직하게 답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세상 밖으로 발을 움직이게 한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세계 일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도 한동안 떠나질 못했습니다. 막상 사표를 쓰기가 그리 쉽지 않았거든요. 버티고 버티다 끝내 떠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삶을 유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느낌.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서 선택한 길인데, 그 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일상의 안락에 젖어가는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더군요. 그렇게 되기까지 예정보다 무려 2년이나 늦어졌구요.
떠나기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여행할 때와 머무를 때의 괴리를 느끼지는 않는지 물으셨지요. 물론 느끼지요. 바깥에서는 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별 욕심도 없이 지내는 제가 돌아와서는 세속적인 기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면 가장 괴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거나, 물질적인 욕심을 내거나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아아, 나는 아직 멀었어. 더 내공을 쌓아야만 해.’ 하고 중얼거리지요. 제가 살고 싶은 삶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좀 더 오래 길 위에서 단련을 해야만 할 것 같네요.
아, 또 하나의 괴리감은 속도예요.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 삶이 지나가는 속도랄까. 우리나라는 뭐든지 빠르잖아요. 무슨 일을 결정하고 진행할 때의 속도도, 무언가 유행했다 사라지는 속도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속도도… 제가 원래 좀 느린 면이 많은 데다, 특히나 여행은 ‘상추밭을 탐험하는 달팽이의 속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 돌아오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삶이 빠르더군요. 덕분에 자연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기억해내고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구요.
샐러리맨이 아닌 여행가로 살아가는 데 대한 경제적 이유 등의 두려움은 없냐고도 물으셨지요. 전혀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우리는 1분 후도 내다볼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선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 풍요로움도 보장해주지는 않기에 종종 두려움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여행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여행을 마친 후 정착해 꾸려갈 제 삶의 방식이 그리 많은 소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약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방식이기를 바라고요.
답하기 쑥스러운 질문도 하나 하셨네요. 길 위에서 만난 그 많은 인연들 중에 마음이 끌리는 이성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요. 그 아픈 이야기는 제 책
『외로움이 외로움에게』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저 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여행에서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와 정들만 하면 헤어지는 일이 아닐까요. 몇 번의 여행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어려움이기도 하구요. 단지, 길 위에서 언제나 되새기고는 합니다.
“진심으로 지극한 것들을 다른 길을 걷더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법이다”라는 김선우 시인의 말을요. 여행은 어쩌면 찰나의 순간을 나누고, 오래 그리워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사랑하는 도시 몇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셨죠?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 나오는 마쓰모토의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곳은 아니지만, 몇 곳을 말씀드릴게요.
‘배낭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파키스탄의 훈자-빼어난 자연 환경, 친절한 사람들, 저렴한 물가의 삼박자를 갖춘 곳이죠-, 한없이 느린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 치앙마이(태국), 몇 달쯤 배낭을 내려놓고 머물고 싶었던 네팔의 포카라, 눈부시게 하얀 마을들이 있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걷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던 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등등입니다.
하지만 제 추천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전 여행을 하는 모든 곳과 사랑에 빠지는 변덕스러운 성격이라서요.^^ 여행자는 누구나 자신이 여행하는 지역을 새롭게 창조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타인의 추천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땅과 뜨겁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픈 이들에게 한 마디를 건네달라고 하셨지요. 제게 여행은 만남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죠. 성을 벗어나 만나는 것, 그게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요? 잘 몰랐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타인을 만나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구라는 별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연을 만나고, 그 자연 속에 깃들어 살아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흔적을 만나는 것.
결국 여행은 ‘어디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이기에,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한 번의 만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으니, 부디 혼자서 용감히 떠나보세요. 그래서 가슴 속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현을 흔드는 만남을 경험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오랫동안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셨지요? 이제야 이렇게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게 되네요.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앞으로도 걸어갈게요. 함께 해 주실 거죠? 언젠가 길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추운 겨울 내내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2010년 12월 18일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며 김남희 드림☞설해목블로거가 김남희 작가에게 쓴 편지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