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간혹 소심하게 묻고 싶었던, 결혼에 대한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과 인터뷰한 첼리스트 겸 지휘자 장한나 씨가 이런 이야기, 하더군요. 독일의 한 정치인이 결혼에 유효기간을 두자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답니다. ‘뜨아~’할 일이죠. 내용인즉슨, 결혼하면 유효기간을 5년으로 두고, 그 기간에 도달했을 때, 원하면 갱신하고, 아니면 거기서 그만. 이혼 개념을 없애자는 건데, 당연히 통과는 안 됐다죠.
몇몇 친구에게도 그 얘길 했더니, 재밌어하거나, 그게 합리적이라거나, 말도 안 된다며 콧방귀를 끼거나, 반응도 자신의 색깔 따라 가지각색. 옳고 그름을 떠나, 결혼에 대한 재미난 상상 아니에요? 5년 후, 결혼생활 지속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 그게 재밌지 않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결혼. 그것만 하면 인생이 온통 장밋빛마냥 바뀔 것처럼, 많은 이들이 호들갑 떨어대는데, 그게 이후의 삶의 행복을 평생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것. 혹은 결혼만 하면 외로움이 훅~ 사라질 양 목매달지만, 외로움 그 놈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길 서둘러 맺으려는 봉합이거나, 이야기꾼으로서의 직무유기 혹은 결혼 신화의 무책임한 전파일 수도…
물론, 그게 결혼을 피하거나 회의할 이유는 아니죠. 다만, 단단하게 뿌리박힌 결혼에 대한 어떤 통념들, 정녕 사유할 가치조차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런 영화들도 있잖아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 혹은 <아내가 결혼했다>.
“사랑은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배로 불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인아(손예진, <아내가 결혼했다>)의 발칙함 같은 것. 호호.
아니면, 이른바 ‘안티가족 다큐멘터리’, 경순 감독의
<쇼킹 패밀리>. 경순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도 해요.
“현재 자라나고 있는 남자 아이들의 성 관념이 너무 보수적이더라. 아직도 순결 마인드에 지배되고 있다. 일단 가족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면 상투적인 남녀의 역할이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결혼은 충분히 성숙된 뒤에 해야 할 것 같다. 평균수명도 길어졌으니 결혼 적정 연력은 60살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다.”
허허, 결혼 적정 연령 60세. 어르신들, 특히 꼰대들께서 들으시면 대노(大怒)할 말씀이네요, 하하. 아마, “그때 결혼하면, 그럼 소는 누가 키워?”, 하시겠죠? 아, 그렇다고 제가 결혼(제도)를 반대하거나 결혼 않고 평생을 살겠다는 ‘독신주의자’ 혹은 ‘안티결혼주의자’, 아닙니다. 그저 그런 게 좀 궁금한, 늙은 총각이죠.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 안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되레 “지금, 사랑하세요?” “결혼하고 더 행복하세요?”, 되묻고픈, 까칠남일 수도.
고로, 궁금해요. 왜 사람들은, “왜 사랑 안(못) 해요?” 대신 “왜 결혼 안(못) 해요?”라고 물을까요. 결혼보다 사랑. 전, 그게 더 좋고, 중요한 것 같은데. 전 외계에서 온 지구별 여행자인가요? 흑. 그저, 이런 생각을 해요. 결혼이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가 돼선 안 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의 작가들의 단편을 엮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푸른숲 펴냄)를 보면, 결혼이란,
“감정을 죽이고 일상이 강해지는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라는데, 어때요? 동의해요? 결혼한 사람들?
어쨌든, 결혼 안(못)했다고 놀리지 말아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고~♪ 타칭, 노총각은 그리 생각합니다. 결혼은 언제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결혼은 외로움 타개책이 아니라는 것.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의 동맹이라는 것. 뭐, 관념일 뿐이라고요? 맞아요. 결혼도 안 해봤으면서, 제가 뭘 알겠어요.
(※ 자가발전해서, 독일 정치인의 결혼 유효기간 법안은 왜 ‘5년’일까, 좀 뒤적뒤적 했더니, 재미난 기사가 있었어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 결혼생활의 고비는 5년이라는. 연구인?슨, 결혼 4년이 지나면 서로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해 결혼5주년 기념일 직전에 이혼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다는 결과가 나왔답니다. 이 단계를 넘기면 평생 해로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네요. 뭐, 그렇다고 독일 정치인이 그 연구 때문에 그리 주장한 바는 아니겠죠?)
스님에게 결혼을 묻다
“얘야, 동그라미를 그리려면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야.”
소년은 아빠의 말대로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선을 그었다. 그러자 보름달처럼 둥근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래, 참 잘 그렸구나.” 아버지는 아들을 칭찬했다. 아들이 나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사랑도 이런 것이구나. 사랑하던 첫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사랑의 원을 그릴 수 있구나. 처음과 끝이 서로 같이 만나야 진정 사랑을 완성할 수 있구나.”
-정호승의 『스무 살을 위한 사랑의 동화 1』 중에서-
자, 여기 사랑을, 결혼(의 진실)을 묻고 싶은 중생이 있습니다. 사실 살아도, 혹은 살면서 사랑을, 결혼을 일상에 함몰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대부분의 중생이지요. 살면서 왜 사랑은, 결혼은, 좀 더 풍성하고 깊어지지 않을까요. 그건 동그라미를 그리는 법을 잊어서 일까요.
그래서 중생이
『스님의 주례사』(한겨레출판 펴냄) 저자이신 법륜스님을 찾아뵀습니다. 사실 스님은 결혼하지 않은(사랑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에 대해선 어지간한 결혼한 사람들보다 더 깊은 통찰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지요. 스님의 이 통찰을 한 번 뚫고 본격적인 스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시죠.
부부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흔히 말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부부가 사랑으로 맺어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백에 하나 있을까, 말까예요. 그럼 부부는 무엇으로 맺어질까요? 대부분의 경우 극도의 이기심으로 맺어집니다. 인간관계 중에서 이기심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맺어진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는 정반대죠? (p.76)
지난 11월15일, 한겨레와 예스24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책 이야기’, 법륜스님의 이야기에 중생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에게, 길을 묻습니다. 결혼을 묻습니다. 꾸벅.
부부관계, 마음먹기에 달려있을까?
자, 첫 질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책을 통해 부부관계에서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저는 유물론자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믿는 사람인데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셨지만, 마음을 바꾸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정도가 무엇인지. 실천방안은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어보죠.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등은 본질적으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물의 성질을 살펴봐서, 이런 측면에선 물질적 요소가 더 강하니 유물론이요, 저런 측면에선 정신적인 측면이 더 강하지 않느냐, 해서 유심론이에요. 또는 종교 측면에서 유심론이다, 등의 추정이 나옵니다. 각자 자기는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겠죠.”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이념, 사랑, 신념, 주장이 있되, 대개의 사람은 한 가지에 집착하면 그것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 단정적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스님은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의 사정일 뿐, 객관적으론 서로 다른 사상?주장?견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로, 질문하신 분의 유물론에 가까운 시각을 갖고 있을 뿐, 이것은 틀린 것도, 맞는 것도 아니라고 스님은 부연하시네요.
“사람들을 보니, 똑똑함 여부보다 처지가 어떠냐에 따라 인격이 정해지기도 하고, 행과 불행이 정해지기도 하더라고요. 매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만 바꾼다고 행복해질 수 있겠어요. 먹고 입고 자고, 모든 게 갖춰진 사람은 여유가 있고, 그래서 남이 보면 인격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환경이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든 것 아니냐는 측면에서 보니, 환경이 의식을 규정하고, 이게 맞는 것도 같죠.”
스님도 동의합니다. 다만 이런 단서를 다십니다. 그런 측면이 있다고 본답니다. 즉, ‘그것이 맞다’가 아닙니다. 예를 듭니다. 한 여성이 결혼했고, 그 남편의 환경을 봅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시집 식구도 괜찮은 집안과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남편이 주사도 있어서 행패도 부리고, 시집 식구는 악다구니를 일삼는 집안. 그렇다면 전자의 여성은 후덕하고 행복하게 살고, 후자는 살다보니 성격이 변하고 악독해질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나쁜 환경에 시집을 와서 남편을 잘 받들고 집안을 꾸리다보니 망나니 같던 남편이 성격이 후덕해졌어요. 그 집안은 만날 싸우기만 하더니, 며느리가 오고 나서 편안해졌어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환경을 변화시킨 거죠. 이런 사례도 있어요.”
아울러, 사회주의가 건설된 뒤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자유주의로 오는 경우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사회주의적 의식을 갖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느 한 측면만 갖고 전부인양 오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덧붙이십니다.
“행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를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기 삶도 제대로 못살아서 헤매는데, 그걸 얘기해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되잖아요. 물론 그렇게 되면 좋지. 이 두 가지를 얘기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웃음)”
세상의 법칙, ‘인연과’에 대한 언급입니다. 즉, 인은 직접적인 원인, 연은 그것이 작용하는 조건. 그래서 인과 연이 만나 결과가 이뤄지는 것, 그것을 인과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인연과’라고 한답니다.
“콩의 씨를 심는다고 반드시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콩 씨를 인이라고 하면 싹을 틔울 수 있는 조건, 밭, 수분, 온도 등을 연이라고 하죠. 인도 있고, 연도 있어야 과가 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두 가지를 다 말합니다.”
하고한 날, 술 마시는 남편 어찌 하오리까!
아까의 예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기.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아내는 잔소리 하며, 그래서 싸우다보니 애들도 나빠지는 상황. 아내 입장에선 남편이 술 안마시고 일찍 들어오면 아무 문제없으니, 문제의 원인은 남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시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면 풀리나요? 대개의 경우, 남편은 계속 술을 마시고, 아내의 잔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물론 싸움도 계속.
어떻게 하오리까. 그러니, 아내(들)은 스님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아무리 본인이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스님, 제가 괴롭고 싶어서 괴로운 게 아니에요. 남편(의 술) 때문에 잔소리를 하게 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됐어요. 어떡하면 될까요. 지긋지긋해요.
이럴 때, 스님 되묻는답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얼마가 됐다는 얘기,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질문.
“계속 술 마시지 말라는 얘길 했을 텐데, 한 번 더 얘기한다고 남편이 안마시겠습니까.” 대답은 뻔합니다. 아니요. 마실 겁니다. 스님,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남편이 그 말을 안 들을 걸 알면서도 왜 또 말을 합니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술을 못 끊는 사람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안 들을 걸 뻔히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잔소리를 하는 당신은 어떤가, 말이죠.”
스님의 명쾌한 직설입니다. 남편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다. 쾅쾅쾅. 자신의 말 듣도록 하려는 고집도 피장파장이라는 거죠. 아니, 스님은 더 세다 하십니다. 왜냐. 고집 센 사람의 고집을 꺾으려고 하니까. 더 세야 꺾일 것 아니겠어요? 스님의 결론입니다.
“남의 고집만 보지 말고 당신 고집도 보세요. 남 안 되는 것만 보지 말고 나 안 되는 것도 보세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남의 눈 티끌은 보고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
또 상대가 고집이 센데, 그 센 고집을 꺾으려는 나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를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함께 살려면 맞춰 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p.151)
문제를, 내 고통의 원인을 남에게만 있다고 보지 말고, 생각을 바꿔보기. 어차피 마시는 술,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더 괴롭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스님은 권합니다.
“술 더 드십시오.”
“자신의 고집을 꺾는 거예요. 그동안 내 말 안 들어서 미웠는데, 이젠 내 말 들으니 예쁠 거 아니요. (웃음) 술 마시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단박에 기도가 이뤄지더라, 이거야. 술 드십시오, 라고 마음을 돌이키니, 내가 얼마나 기뻐져요. 남편 내 말 잘 듣지, 기도도 먹히지. 술 마시는 남편의 행위는 같은데, 마시면 안 된다고 움켜쥐고 있으니 불만이 많은데, 마셔라 하니까, 온갖 것이 내 뜻대로 되니, 얼마나 좋아요. 마음만 먹으면 다 된다, 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이라는 것, 생각만 바꾸면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한 생각만 바꾸면 당신도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나의 문제입니다. (p.71)
그렇다면, 술 마시는 남편의 건강이 걱정된다고?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싸워서 스트레스 받았을 때, 술을 더 마시겠어요, 아니면 사이좋을 때 더 마시겠어요. 약간의 연관이라도 있다면, 어느 쪽에서 더 마시겠어요?”
남 생각? 적당히 하시라!
스님은, 특히 우리의 이타주의(?)를 꾸짖습니다. 남 생각하지 마라!
“여러분들은 제 인생 안 살고 남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좀, 이기주의가 되세요. 술 처마시고 죽든지 말든지, 놔두세요. (웃음)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안 돼요? 그래서 인생의 행복을 자신이 가꾸고 만드세요.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요.”
결국, 술 마시는 행위도 하나의 행위일 뿐. 그것을 나쁘게 보면 나쁜 사람이 되는 거고, 좋게 보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는 말씀입니다. 나쁜 행위라고 하는 정해진 상이 있는 게 아닙니다. 행위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그냥 하나의 행위일 뿐. 즉, 나쁘게 상을 지으면 불행해지고, 좋게 지으면 행복해지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남편에게 덕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남편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내면 인생이 바뀝니다. 술 먹는 남편의 허전한 마음을 부모가 자식 돌보듯 다독거려 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술 좋아하면 술 사다 주고, 속 쓰리다 하면 해장국 끓여 주면서 보살피면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p.60)
우리에겐, 항상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이 있답니다. 그러니 항상 불평?불만이 많은 것이고. 스님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좋게 보는 습관으로 바꾸라고 권하십니다. 그러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행복도가 높아지고,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답니다. 당연히 그게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요.
“문제는 상황보다 마음에서 오는 것이 더 많아요. 그래서 우리 시대는 마음공부가 필요한 시대에요.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을 모아놓고 공부시키고 밥 주고 10년을 해도, 마음공부가 중요하다는 말 안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아요. 물질 때문에 죽겠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 사회는 마음공부를 해야 할 때에요.”
혹시 사랑 아닌, 상대 덕 보려고 결혼 했니?
결혼도 그렇답니다. 누구나 행복하려고 하는 결혼. 그런데 많은 사람들, 왜 결혼생활 때문에 불행이 더 드러날까요. 참, 모순인데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그 책임은 다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여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 세상 남자들은 다 죽어야 해요. 진짜 나쁜 놈들이에요. (웃음) 며느리 얘길 들어보면, 시어머니는 다 이상해요. 한국의 늙은 여자들, 다 이상합니다. (웃음) 시어머니 얘기 들어보면 젊은 여자들도 다 문제가 있고요. 그건, 각자 자기 관점에서만 봐서 그래요. 그 사람들 얘기만 들으면, 이 세상은 살 수가 없어요. (웃음)”
그래요, 뻔합니다. 상대를 탓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대 입장에서 보는 눈도 가져라.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 아니, 그런데도 돈 못 벌어오면 미워하다니요. 말로는 사랑이라고 하고선, 상대에게 덕 좀 보려는 심리가 기저에 깔린 거 아니에요?
결혼할 때 여러분의 속마음은 어떻습니까?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따져 봅니다. 이때의 근본 심보는 덕을 보자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돈이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떤가, 지위는 높은가, 외모는 아름다운가.’ 이렇게 따져 가며 이리저리 고릅니다. (p.8)
“결혼해서 혼자 사는 것보다 손해 보면서도 살 수 있으면,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랑, 사랑하지만, 사랑 좋아하시네. (웃음) 지금의 사랑이라는 말에는 크게 신뢰 안 해요. 다 덕 보려고 하지, 손해 보려는 생각이 없어요. 손해 봐도 저 사람을 위해서, 라고 생각 안 해요. 손해 보면서도 보살펴야겠다, 생각한다면 갈등이 있겠어요? 물론, 갈등이 없어야 된다는 건 아니에요. 만약 헤어지자, 하면 그 다음 말이 있어요. 애는 어떡하고. (웃음) 이런 말은 덕 보는 것은 그냥 갖고, 손해 보는 것만 바꿀 수 없겠느냐, 이 얘기에요.”
어떤 인간관계보다 결혼관계가 가장 욕심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는 원수가 잘 안 되는데 부부지간에는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의 욕심, 서로의 기대가 커서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니 실망도 큰 거예요. (p.79)
그러니, 스님에게 물음을 던질 때, 길을 물을 때, 사실은 이런 것도 있다고 꼬집으시네요. 덕 보는 게 많지만, 손해 보는 게 좀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을 줄이고자 할 때. 그래서 손해 보는 게 많거나 덕 보는 게 많으면 아예 스님에게 묻지 않는다는 것. 물론 스님이라고 답이 되겠습니까. 대화를 하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자각하고 깨우칠 수 있도록 돕는 것. 결국 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
우리가 교회를 다니느냐, 절에 다니느냐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게 있어요. 그것은 어떻게 수행을 하고, 어떻게 자신을 행복하게 가꿀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마음이 행복해지면 여유가 생겨요.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기도 쉽고, 자녀나 남편(아내)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집니다. (p.65)
남편문제 해결? 남편도 남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신랑이 새로운 일 시작하게 됐는데, 준비를 많이 했어요. 공을 들인 걸 잘 알아서 잘 되길 바랐는데, 막상 시작하니 힘들어 해요. 앞뒤가 막혀서 어떻게 풀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편의 일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갸륵한 질문이지요.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로서, 가슴 아프고, 함께 노라도 젓고 주어주고픈 심정. 스님은 어떤 말씀을 내놓으실까요? 우선 되묻습니다.
“본인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그럭저럭 헭요. 다시 묻습니다.
“뭘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신랑이 편안해져야 저도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스님의 일침, 나갑니다.
“그것은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내가 편안해질 수 있는 것과 달라요? 아뇨, 같습니다. 남편이 괴로워해도 내가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뭘까. 남편이 술 마시는 걸 괴로워하는 것은, 나 편하면 되지, 하고 겨우 되는데, 남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을 놔두라, 고 하면 문제 있어 보이죠? 괴로워하든지 말든지, 자기 길이니 놔두세요. (웃음) 술 먹는 것과 동일합니다. 남편과 관계없는 내 문제에요. 축구시합 중에 반대편에 골이 들어가면 그쪽 선수들 괴로운데, 우린 좋아하잖아요. 남편이 괴로워한다고 내가 괴로워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경구인데, 만약 여러분이 지금 불행하다면 그것은 누가 만든 거예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p.121~122)
팍팍, 무릎팍 도사 아닌 법륜 스님의 문제해결책, 팍팍. 내가 남편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된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일이 안 이뤄져도 괴롭지 않아요. 왜, 다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까. 이뤄진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세상이 원하는 것도 내가 다 해줄 수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안 괴로운데,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니 괴로운 거예요.”
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랍니다. 뭘까요. 맞아요, 들어주는 일. 할 수 있으면 그냥 들어주면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해결은 아니라는 것. 스님만 해도, 이런저런 질문과 요청이 와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생각은 안 하신답니다. 어떤 문제든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신답니다. 해결됐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이 했을 뿐, 스님이 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 이상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위로 한답시고 이런저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힘들겠다고 얘기해주고, 힘든데, 나랑 막걸리나 한 잔하고 자자, 이런 정도가 오히려 낫습니다. 남편도 못하는데, 해결할 생각을 하는 건, 건방진 생각이에요. 건방진 생각을 하면 내가 괴로워지는 거고요. 내가 결혼도 못해보고 자식도 안 낳았는데, 책을 왜 쓰고 상담을 들어주겠어요. 그거 해결 못해준다고 내게 흠이 되나요? (웃음) 그러니까, 남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으세요. 그것은 해결하든 못하든, 무겁든 가볍든, 남편 인생이에요.”
“이 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동전을 던져서 나오는 대로 하십시오.” 이게 제일 현명한 답입니다. (p.107)
결혼해서 본질적인 행복을 찾는다고? 허튼소리!
아직 결혼은 않은 한 여성이 결혼과 행복의 본질에 묻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혼은 해야겠는데, 주변의 결혼생활 등을 보아하니, 고민과 번뇌의 골이 깊은가 봅니다. 자, 이런 질문입니다.
“경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감성적인 부분 등의 코드가 너무 안 맞아서, 소통이 안 되는 경우들을 많이 봤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다르겠으나, 본질적인 행복을 못 느끼고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보니, 불행도 느껴집니다. 헤어지지도 못하고 서로 인생을 갉아먹는구나, 하고 느끼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간담이 서늘해요. 조건이나 남 보기에 부족할 것 없다는 게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본질적으로 행복하려면 어떤 사람을 동반자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 참으로 형이상학적인 질문입니다. 어렵죠? 본질적인 행복, 세계관, 감성코드. 결혼에서 본질적인 행복을 찾는다. 흠, 그럼에도 누구나 해봄직한 질문이기도 하죠. 물론 스님은, 바로 직설입니다.
“저런 얘기는 남에게는 도움이 돼요. (웃음) 딴 사람이 듣고는 도움이 돼요. 그런데 본인에게는 안 돼요. 본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욕심 중에서 상 욕심이에요. 본질적인 행복, 결혼해서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이건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돼요. 본질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면 비구니나 수녀를 도전해볼 만해요. 그러니 아예 결혼 않는 것이 좋고, 하면 99% 실패합니다. 본질적인 행복, 무섭고 버려야 해요.”
그렇다면 스님은 어떤 결혼을 권하는 걸까요. 아무하고나 만나서 육체적인 욕구 채우고 애 생기고, 그냥 밥 먹으면 되지. 이리 생각하랍니다. 살기 편하고 행복하게 산답니다.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너무 많이 하면 고달파진다는 말씀과 함께. 즉, 이래 살아도 저래 살아도 고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결혼에 대한 이상이 없으면 비교적 결혼생활이 순탄하다는 말씀.
그래서 스님이 청중들에게 재차 확인합니다.
“결혼한 분들 많이 있죠? 본질적인 행복, 결혼과 상관있습디까? (웃음) 그건 결혼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인생은 자기 문제에요. 상대방을 통해서 얻을 생각은 안 해야 해요. 이 모든 불행이 남편을 통해, 아내를 통해 얻으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걸 놓아버리면 사는데 지장 없어요.”
사랑한다고 꼭 결혼해서 살아야 하나요? 사실 결혼이라는 것 별거 아니에요. 난 안 살아 봐도 압니다. 처음에나 조금 깨 볶고 살지 지나 보면 그냥 자취생활과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밥 당번을 정하면 제대로 해 주는 게 중요하지, 부잣집 아들이든 아니든 그런 건 자취생활을 할 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반찬을 조금 더 가져온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밥 당번 순서를 정했으면 제대로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같이 살아 보면 인물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p.27)
다 다르다는 거지요. 성격 상관없이 돈만 벌어줘도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피든 말든, 집안만 지켜주면 된다는 사람도 있고, 돈도 뭐도 싫고 나만 바라보면 된다는 사람도 있는, 사람들은 요지경이고, 모두 다른 법. 중요한 것은 내 식대로 바꾸려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라고,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행복? 스님 가라사대.
“웃으면 행복하죠. 배고프면 한 술의 밥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순간순간 오는 건데, 본질적이고 완전한,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건 스님들인데, 내가 가까이서 봤는데, 행복한 스님들, 별로 없어요. (웃음) 결혼이나 고기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고, 완전한 것에 사고가 꽂혀서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살아요. 추상에 사로잡혀 일상을 놓칩니다.”
아하, 그러니까 결혼해서 행복하겠다는 욕심보다 일상에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먼저 터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죠.
“일상에서 맑고 밝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혼자 살아도, 둘이 살아도, 그리 하면 돼요. 혼자 사는데도 마음이 편안하고 입에 웃음이 난다면 둘이 살 생각이 나겠어요? 외롭니, 어쩌니 생각하니까, 둘이 살 생각하고, 둘이 사는데, 편안하지 않으니 헤어질 생각을 하는 거고. 혼자 재밌게 사세요.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 생각을 버려야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결혼한다고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자 살면 외로워하고, 같이 살면 귀찮아합니다. 결혼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같이 살아도 귀찮지 않을 때 해야 합니다. (p.9)
사랑, 결혼, 삶, 죽음에 특별한 의미 부여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날아들었습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질문도 유머 넘치는 입담과 재치 있는 답변을 선사해주신 스님은 이번 질문에는 어떤 재기를 보여주실까요.
우선 사랑.
“사랑을 하면 마음이 기쁜데,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집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랑을 안 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산도, 바다도, 노을도 사랑하면, 기분이 좋잖아요.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좋아할 짓을 해야 좋아하지, 이리 반문하는데, (웃음) 그럼 산은, 바다는, 좋아할 짓을 했어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내면 좋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 괴로운 거예요. 지금 만약 괴롭다면, 미워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다시 말씀하십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그러니까 공(空).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안 하고는 마음이 짓는 바라는 것이지요. 산을 짝사랑해도 괴롭지 않으나, 사람을 짝사랑하면 왜 괴로울까요. 스님은 산은 요구가 없는데, 사람은 짝사랑이라도 요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요구가 들어지지 않는데 대한 불편함. 아, 그러니 사랑을 ‘받으려는’ 요구 혹은 욕구 때문에 미움이 생긴다는, 말씀.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 많아도 인식한 것만 미움이 생기고 인식을 못하면 안 생기잖아요.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결혼해도 사랑 안 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않고도 사랑할 수도 있어요. 나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사랑하고 결혼하고를 같이 하든지, 사랑하고 결혼 안 하든지, 미워하고 결혼하든지, 미워하고 결혼 안 하든지를 같이 하든지, 알아서 하는데, 나는 그것이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해요.”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거예요. (p.93)
이어지는 결혼.
“둘이 사는 게 효율적일 수 있고, 편리한 것이 많아요. 혼자와 둘은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탄소와 산소가 결합하고 안 하고, 와 똑같아요. 다만 혼자 살 때의 습관을 갖고 있어서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갈이 살면 존재가 달라져요. 결혼하면 전혀 모르는 부모가 생깁니다. 혼자 살 때는 다른 사람과 식사하고 데이트하면, 인기 있다고 하는데, 결혼하고 그렇게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존재 성격이 달라져서 그래요.”
즉, 행위는 똑같은데 문제가 되나?, 싶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자들, 결혼했다고 인간관계가 뾰족하게 달라질 이유가 없는데, 아내가 보기엔 문제를 삼지요. 결혼하면, 혼자 판단이 아닌 둘이 합의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님은, 결혼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다만, 결혼에 대한 환상,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다, 그런 요구가 높으니 실망도 높은 법이랍니다.
“존재가 바뀌는데, 그전 습관대로 해서 오는 문제에요. 결혼할 때가 됐다는 건, 단지 육체의 문제일 뿐이에요. 결혼한다고 할 때는 존재를 결합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즉 합의해서 살 준비가 돼 있느냐가 중요해요. 덕 볼 생각 말고, 상대에게 덕 보여줄 것이 있느냐를 점검해야 해요. 나이 같은 건 문제가 안 됩니다.”
결혼할 때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해요. 첫 번째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할 뿐이지 상대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안 맞는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출발할 때는 양쪽이 맞는 건 10퍼센트고 안 맞는 게 90퍼센트로 출발해서 결과는 공통점 90퍼센트, 차이점 10퍼센트를 목표로 만들어 가면 됩니다. (p.52)
아울러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 너무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됩니다. 인간이 왜 괴로워하겠어요? 사람 아닌 동물은 자신의 삶에 의미 부여를 너무 많이 하지 않아요. 배고플 때 먹고 잠 오면 자요. 인간은 삶에 의미부여를 너무 많이 해서, 대부분 삶에 불만족하거든요. 종교의 나쁜 영향 중 하나는, 삶에 의미를 너무 높게 부여한다는 거예요. 그거, 해악도 많습니다. 삶을 가볍게 생각하세요. 죽음도 마찬가지고요. 죽음이나 삶이나 용어 차이지, 삶의 하나의 모습이에요.”
스님은 ‘사생아’라는 말에 대한 이야기도 꺼냅니다. 모든 사람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단순한 생물적 원리에서 날뿐, 태어나서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고 문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요. 아무 문제없음. 그냥 존재일 뿐.
“그건 다 프로그램 문제에요. 여러분이 존재에 대해 가진 우월의식도 열등의식도 형성된 것이지요. 내가 여러분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고 성스러워질 일도 없어요. (웃음)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돼야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래요. 모르니까, 두려움이 생기고, 그런 두려움을 이용해 세상에 온갖 이권이 생겨나고 협박과 착취가 붙어요.”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가난하다고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엄마가 가난한 현실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을 때 아이가 가난에 열등의식을 갖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남편이 없음으로 해서 엄마가 외로움을 타고 방황을 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p.160)
스님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항상 지금-여기에 충실할 것. 그것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가는 법. 가을에 단풍이 예쁘다고, 새 잎에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 잎은 새 잎대로, 낙엽은 낙엽대로 예쁜 거니까요. 세상 모든 것은 자기만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다고 아쉬워하고 탄식하는 건, 젊은이의 육체와 비교하니 열등의식이 생길 뿐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어릴 땐 나이 들고 싶어 했잖아요. 소원대로 나이가 들었는데, 뭐가 문제?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예쁩니다. 단풍이 문제가 아니라, 예쁘게 물드는 것이 어떤 것이겠어요. 주름이 있어야 경륜 있어 보이고, 눈이 잘 안 보여야 분별심이 안 생길 것 아니겠어요. 나이 들면 저절로 수양을 하게 됩니다. (웃음)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삶과 죽음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시라.”
우리는 매순간 깨어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습관, 카르마가 삶의 주인이지 내 자신이 삶의 주인은 아닌 거예요.… 내가 내 운명의 주인,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카르마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습관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늘 깨어서 삶을 살아야 해요.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