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춘삼월이 무색하게 폭설이 내렸어. 오전부터 기상청에서 대설 특보를 발효한 날이었지. 김포공항에서는 10여 대의 항공기가 결항하였고, 풍랑주의보로 인천에서는 11개의 항로의 여객선 운항이 통제되었다는 뉴스가 들렸어. 해가 질 무렵, 한차례 휘몰아치던 눈이 잠잠해졌어. 녹지 않은 눈을 사박사박 밟고 있자니, 마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데면데면한 누군가를 만난 기분이 들더라. 오후 7시. 눈 덮인 정독도서관을 걸었어. 3월의 풍경이라고 하기엔 꽤 낯설었지만 말이야.
| 3월, 눈 내린 정독도서관 |
|
3월의 눈 내리던 날. 이날은 전경린 작가의 낭독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어.
『풀밭 위의 식사』. 강당 앞쪽에 마련된 무대는 긴 커튼을 내려뜨리고 그 앞에 빨간 소파를 놓아두어서 어느 집의 거실 풍경 같았어. 그곳에서 햇볕 대신 아늑한 조명을 받으며, 식사 대신 이야기를 풀었지. 소설과 작가에 관한 질문들이 오갔어.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천천히 퍼져 나갈 때, 전경린 작가는 섬세한 소녀 같은 미성으로 소설의 일부분을 읽어 주기도 했고,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어. 이날, 스산한 마음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너에게 조금의 온기를 전해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야.
깊은 상처가 사랑을 길어 올리는 것
3년 만의 장편소설입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요?
“지난번 『엄마의 집』을 출간하고 쉬고 있을 때, 지방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특집 다큐 프로그램 마지막 대본 작업을 부탁했어요.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는데, 그게 두고두고 떠나지 않더라고요. 그 대본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게 주변에 이해받을 수 없는 아픔 때문에 상처가 오래 지속되고,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재현하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아픔을 가진 여자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 보자고 했죠. 또 하나는 일기체 형식을 소설로 한번 써 보고 싶었어요. 이런 두 가지가 기반이 되어 이번 소설이 나오게 되었어요.”
처음 마네의 그림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고등학교 때 처음 봤는데 수수께끼 같았어요. 풀밭 위에서 굉장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데, 그림의 분위기가 너무 평온했고, 한국에 태어나 성장한 소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어요.(웃음) 이번 작품 초고를 쓰면서, 제가 ‘풀밭’이라는 단어로 제목을 만들려고 고심을 했어요. 그러다 이 그림이 번뜩 떠오르더라고요. 예전에는 수수께끼 같던 그림이 나름대로 해석이 된 것 같아요. 외부에 맨몸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상처를 입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성이 상처를 입으면서 세계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태도에서 이번 작품과 일치되는 메시지를 읽은 거죠.”
그런데 혹시 알고 있나요? 들판이 두근거린다는 것을, 들판이 숨 쉬는 것을요. 들판은 멀리서 지나가는 누군가의 발소리에도 떨린답니다. 들판은 생각보다 상냥하고 포근한 곳이랍니다. 그런 향긋한 냄새와 부드러운 사람과 따스한 온기는 들판에 누워본 사람만 알 거예요.(p.246)
작가님은 기현과 서강주 중에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열정적인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서강주 같아요. 저도 오랫동안 그런 타입이 좋았어요. 최근에 와서는 기현 같은 타입이 좋아지고 있어요.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 인간이 꿈꾸는 사랑. 서로 보살펴 주면서 삶을 살아가는 사랑은 또 다른 종류인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와서는 인간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랑에 관심이 옮겨지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기현은 누경과 이루어지지 못한 건가요?
“누경이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누경에게 가장 가벼운 상대를 곁에 놓아주고 싶었어요. 그 인물이 기현이에요. 직장도 안정되면서 시간도 많고, 사회적 야심보다 자기 삶을 가꿀 줄 아는 여유로운 남자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집도 있어요.(웃음) 함께 지내기에 좋은 사람을 곁에 놔뒀어요. 누경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좀 더 운명적인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연결되지 못하고 어긋나지만, 사랑이 되지 못하는 채로 하나의 관계의 이르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 “이 소설을 쓰면서 상처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
|
소설 속 여러 이미지들이 기억에 남아요. 그 이미지들은 어떤 방식으로 삽입된 건가요? 상징인 건가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누경의 아픔, 아비규환의 상처, 부서지는 소리들을 굉장히 현실적인 언어로 썼을 거예요. 그러면 르포 소설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 소설적 성향이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상처를 의미하고 있는 몇 가지 메타포가 이 소설에 흐르고 있어요. 누경을 상체만 있는 비너스라고 한다거나, 깨진 유리병을 가지고 상처를 시각화한다든지 검은콩과 매실을 통해 일상 속의 반짝임, 삶의 기쁨을 표현한 것들. 곳곳에 숨어 있죠.
이 소설의 계기는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었는데, 쓰고 보니까 지독한 사랑의 이야기가 됐어요. 쓰면서도 상처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깊은 우물을 통해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상처가 시간을 붙들고 고이게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깊고 높은 차원으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랑 자체에 닿아 본 사람은 사랑을 이룬 거예요
보통 누경은 해마다 일기장을 새로 마련하는 식으로 썼다. 띄엄띄엄 쓰기 때문에 일기장들은 대개 반쯤 채워지고 나머지는 백지로 빈 채 다음 해의 일기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그 노트는 그해 늦가을에 새로 마련되었고 날짜도 거의 뛰어넘지 않은데다 어느 날은 두 번 세 번씩 기록을 했다. (…) 이 기록을 하는 것이 두렵다. 그런데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누가 읽을까 봐 무서워하면서, 나는 쓴다.(p.72)
일기 형식으로 소설을 쓰고 나서 어땠나요?
“현재가 진행되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배치되는데, 일기체 형식을 쓰지 않았으면 일일이 뭘 했었다고 의미를 붙이고 회고조로 써야 해서 문체가 깨끗하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두 겹의 현재가 소설에서 진행되는 효과를 줬어요. 일기의 특징이, 언제를 펴 봐도 ‘몇 월 며칠’이라는 것이 굉장히 현재적으로 육박해 오잖아요. 그 효과가 좋았던 것 같았어요.”
서강주는 어떻게 구상한 인물인가요?
“누경은 서강주를 얼굴도 모를 때부터 사랑하기 시작해요. 평생 찾아 헤매는 본질적인 대상일 수도 있어요. 이런 인물을 그려 낸다는 게 상당히 야심 찬 일이기도 하고, 뭔가 불안한 일이기도 하죠.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멋진 남자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약간 나쁜 남자로 만들려고 문어체를 사용했고. 사실 진짜 매력적인 사람은 자기 어법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자기 말투. 글쎄요, 젊은 남자가 질투할 만한 남자가 서강주였으면 좋겠어요.(웃음)
서강주가 어려운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남자라는 게 어떻게 보면 차가워 보일 수가 있지만, 전 그게 좋아요. 누경을 생각하고 쓸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쓰면서 내가 아픔을 가진 인물을 충분히 그려 내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죠. 그런데 서강주 쓸 때는 마음이 편안하고 이상하게 즐거웠어요. 인물마다 작가가 갖는 정서가 다르게 있나 봐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리 묘사가 혹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싶은데요. 이런 경험이 있는지요?
“계속해서 헤어지지 않는 게 사랑을 이룬 건지, 결혼인지. 이뤘으니까 헤어지자 하는 게 이뤄지는 건지, 사랑을 이루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요. 제 생각에는 이루어진 사랑이든,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든 사랑 자체에 닿아 본 사람은 사랑을 이뤘다고 생각해요. 신성(神性) 자체를 겪기는 어렵지만 겪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경지의 끝까지 가면 사랑 자체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 이룬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소설 말미에 인서라는 인물이 잠깐 등장해요. 그런데 주인공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사실 인서는 소설 초반부에 기현이 저녁 맥줏집에서 기다릴 때 기현을 만나러 나올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누경과 만나지 못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인서가 등장하죠. 첫 부분에서 누경은 자기의 팔을 못 쓰는 폐쇄적이고 상처의 인물이에요. 마지막에는 누경이 자기 상처와 화해를 하면서 자발적으로 사랑을 느껴요.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랑이 나를 선택한 건지 내가 사랑을 선택한 건지 헷갈리는 거죠. 인서와 이뤄지거나 안 되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서 결말은 열어 뒀어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굉장히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일 테니까요.”
존재의 비밀은 현재에 있는 게 아닐까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란 것을 알게 되었어. 몸 안에서 손톱으로 할퀴며 울부짖던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친 것처럼 조용해. 몸이 이렇게 고요한 거란 사실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어. 눈 내리는 날의 따스한 실내처럼 고요해.(p. 225)
|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실내’에서 전경린 작가와의 만남이 진행되었다. |
|
작가님의 습작 시절이 궁금합니다.
“마치 제 인생에 짜여져 있던 대본의 한 순간처럼 갑자기 습작 시절이 시작되었고, 갑자기 등단을 했어요. 아득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별로 그렇게 이성적이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한 해 동안 중편과 단편 여섯 편을 썼는데, 바로 등단하자마자 책을 낼 수 있어서 다음 작가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습작한 90년 중반에 쿤데라와 하루키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던 시기였어요. 두 작가랑 마르케스 작품을 상당히 심취해서 여러 번 읽었었고, 그때 저는 적어도 두 달에 한 편은 단편을 썼던 것 같아요. 습작을 할 때는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의 상태와 달랐던 시절이었어요. 뭔가 사로잡혀 있던 시기, 내 속에서 쏟아 내는 걸 받아 내느라 급급하던 시기. 그때는 희열, 놀람까지 있었어요. 돌아보면 습작기가 제 전체 글쓰기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희열이 있었던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작가가 되고 난 이후는 오히려 도망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어요. 글 쓰는 게 외부 생활과 고립되는 생활이기도 했고, 글 쓰는 동안에는 세계로부터 사라지고 싶다고 할까,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 뒤에는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아서 괴로워한 시기도 있었고요.(웃음)”
평소에 눈물이 많으신지요? 이 작품을 쓰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요?
“눈물보다는 웃음이 많은 편인 것 같은데, 둘 다 많은 사람이에요. 비 오는 날의 대목이 가장 슬펐어요. ‘제 속에 쌓인 빈 상자들이 모두 젖어서 무너졌어요.’ 그 다음 날 서강주가 전화를 하죠. ‘네 상자가 걱정된다.’고요. 우리들 마음속에는 실현될 수 없는 소망, 관계들이 빈 상자처럼 쌓이는 것 같아요.”
왜 글을 쓰시는지. 글쓰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른이 되면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있는 걸까, 자기가 느끼고 인식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표현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내가 겪는 일들이 보험 회사에서 설계한 것 차례차례 오는 것 같은 느낌의 희박성 때문에 힘들었어요. 모든 걸 아주 선명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경험이 아니면 뭐든 써야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죠.”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디를 지향하는 사람이신가요?
“정말 온전한 현재라는 것을 얼마나 느낄 수가 있나 싶어요. 시간에 담보 잡히지 않은, 미래로 몰려 있지 않은 순수한 현재. ‘아, 이게 현재구나!’를 느끼는 것만 해도 굉장히 해방감이 있고 자유롭거든요, 이 나이가 되니까 ‘현재를 좀 더 온전하게 갖고 있고 소유하고 있구나.’ 하는 것 때문에 좋았어요. 존재의 비밀이 현재 속에 있지 않은가 싶어요. 너무 미래를 불안해하느라고 현재를 희생시키지 말고, 현재를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 있나요?
“제가 낸 모든 작품이 저 스스로에게 다 좋지는 않아요.(웃음)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 떠오르는데요, 그 소설 속 주인공 미은은, 지금 소설 밖으로 걸어 나가서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것 같아요. 그 소설은 준비하는 과정도 즐거웠고 책을 낸 뒤에도 기뻤던 기억이 나요.”
또 한 명의 누경에게
그 얘기가 떠올랐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마음만 애달픈 네 사연. 거기에는 기현처럼, 운명이라는 조건, 단 하나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그게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노력한다고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어서 억울하다는, 그 울먹이던 네 목소리가 떠올랐어. 그 소중하고 귀한 마음이 사랑이 되지 못할까 봐, 그렇게 불리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누경의 일기처럼, 행복했던 일은 고작 몇 줄에 그칠 뿐. 나머지 공백은 불안과 조바심과 슬픔으로 채워졌을 테니까. 이날 작가님은 네 마음도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더라. 사랑을 이루는 것은, 사랑 그 자체에 닿은 마음이라고.
결코 지금은 알 수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네 숱한 고백을 들어준 일기장이 낯선 마리안느처럼 느껴질 즈음, 돌이켜 봤을 때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런 순간이 네게 있었으면 좋겠어. 추슬러지지 않는 그 마음을 충분히 겪어 내는 일은 비단 쉽지 많은 않을 거야. 여름이 지나가고 나면, 가을이 온다는 영화
<500일의 썸머> 속의 이야기가, 서강주를 온전히 겪어 내고 나서야 인서가 등장했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가 선뜻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한 것 같아. 영화 속의 톰도, 누경도, 그 순간만큼은 현재를 보고 있었다는 거야. 그 순간만큼은 과거의 썸머나 서강주를 돌아보고 있지 않았다는 거지.
때 아닌 폭설처럼 찾아온 그 사람이 자꾸만 너를 지나간 속에 고이게 하겠지만, 그 폭설이 지나갈 때까지 잠잠히 겪어낼 수 있길 바라.
“‘세 노르말’ 이 표현은 극복하거나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안고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쓰인다고 했다. ‘세 노르말.’”(p.237)이라는 말이 네게 온전히 납득되었을 때, 현재를 말끔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네가 간절히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때가 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
사람들은 내 눈 속의 사랑을 보고 당황하죠. 그것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고 싶어했어요. 정체불명의 사랑이 내 눈 속에 낙화처럼 떠돈다 해도, 나의 웃음이 도처에서 사랑처럼 보였다 해도, 실은 그 누구를 향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정말 그보다는, 들에서 핀 꽃나무가 누구를 향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밝히며 활짝 피어나듯, 내 사랑도 그런 것이면 좋겠어요.(p.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