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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통에 ‘현재’를 빼앗기지 마 - 『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내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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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장, 기현의 시선 속에 등장하는 누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속내를 지닌 여자고, 그녀는 좀체 기현의 확신에 찬 감정을 받아 주려 하지 않는다.

누경은 그래서, 그랬다

소설의 첫 장, 기현의 시선 속에 등장하는 누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속내를 지닌 여자고, 그녀는 좀체 기현의 확신에 찬 감정을 받아 주려 하지 않는다. 정말 왜 그러는 거냐고 여자를 닦달하고 싶어질 무렵, 일기를 통해 누경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제까지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던 그녀의 마음은 이제 마치 카드의 양면처럼 완전히 다른 패를 보여준다.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나는 이전의 사랑, 그것은 앓도록 뜨거운 사랑이었다. 차가운 것도 불편하지만, 너무 뜨거운 것 역시 그것대로 편치 못하다. 모든 감정을 곤두세워, 때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듯한 서강주와의 사랑의 기록. 누경은 그날의 자신을 지켜본다. 희열, 또는 미열로 그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본다. 누경은 그래서, 그랬다.

‘한숨과 한숨 사이, 그 깊고도 먼 거리’마저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전경린 작가는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입 밖으로 한마디, 한 구절이 뱉어졌고, 그 사이사이의 공백이 바느질의 한 땀처럼 말들을 엮었다. 군데군데 중요한 부분에서는 잠시 말이 빨라지기도 했지만, 이내 그 리듬을 찾아갔다. 그녀의 글처럼 말 또한 어떤 결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마치 파도가 낮은 목소리로 쏴- 밀려 올라온 것처럼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파도가 소리 없이 빠지고 난 자리의 무늬처럼, 인터뷰 기록이 남았다.

상처에 내면을 응시하다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자, 상처의 기록이다. “소설에는 영향을 끼치는 어떤 환경, 기반이 있어요.” 그녀는 작가의 말에도 밝히고 있다. “이번 소설 속에는, 소설을 쓰게 한 힘으로 작용한,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한 여자가 숨어 있다. 나는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그 여자가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문장들을 썼다.”(p.248) 그 여성, 혹은 그 기반이 된 사건은 방송국 후배의 일을 도와주다가 접하게 되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다룬 라디오 다큐멘터리였어요. 마지막 대본 작업을 부탁했는데, 요즘은 성폭력 피해 여성을 ‘생존자’라고 표현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이란 거죠. 대본 작업을 하다 보니, 그 사건 자체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걸 주변에 이야기하거나, 알릴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이 훨씬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어요. 그런 상처의 내면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가장 먼저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내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p.248)라는 저자의 말과 더불어, 이 소설 속에서 사랑의 고통, 상처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누경의 이야기를 보고 ‘쓰는 사람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의 감상이 제일 먼저 치솟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소설 전체를 알고 관장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글쓰기의 시작점이라고 했지, 글쓰기가 고통스럽다고 한 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경의 일기 부분을 쓸 때는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작업을 했어요. 단체로 식사를 하고,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며 작업을 해 나갔어요. 환경이 밝아서 고통을 덜 느끼면서 썼어요. 이 작품은 연재를 했거든요. 처음에 따라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짐작하는 내용과는 다른 방향으로 소설이 진행될 때마다 당황했겠지만, 나는 전체를 알고 써 나가고 있으니까, 그런 혼란은 없었죠. 독자들은 그러더라고요. ‘기현만 한 남자가 어디 있나, 유경이 답답하다. 왜 저렇게 혼자 힘들어하나.’(웃음)

소설 초반은 누경의 이야기를 모르는 상태로 진행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저녁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한 여자가 기현이라는 남자의 눈에 띄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독자들은 기현의 시선으로만 따라가게 되죠. 그렇게 차차 누경에 대해 알게 되고, 이 소설 한가운데에서야 가장 깊은 상처가 드러나요. 그제야 독자들은 ‘아, 이래서 그랬구나.’ 느끼게 되는 거죠.”



이제 아버지 꿈은 꾸지 않는다. 한 생각뿐이다. 서강주.
나는 수심에 차 있고 끊임없이 번민한다. 나는 공원의 유령처럼 발밑이 푹 꺼지던 순간에 사로잡힌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내 정신은 그 공원의 호숫가와 주차장을 절룩이며 떠돈다. 그가 나를 좀 안정시켜주면 좋겠다. 하지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공원에 가보았다. 낙엽이 마구 쏟아지는 공원 풍경은 태연하기만 했다. 왜 전화조차 받지 않는단 말인가…….(p.113)


읽는 사람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사랑의 미열, 사로잡힌 마음의 뒤척임, 이런 것들을 어찌 앓지 않고 쓴단 말인가……싶었던 마음은, 아무래도 나만의 우려일 테지만, 행여 이 소설을 읽으며 나와 같은 우려를 했을 몇몇 독자들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거미줄같이 꽁꽁 동여매는 듯한 심리묘사와 다채로운 감정의 면면들을, 문장을 통해 감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해야만 했다.

“난 이번 소설의 문장은 가능하면 힘들거나 괴롭지 않게 배려한다고, 가볍게 쓴다고 쓴 거예요.(웃음) 실제 현실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진다면 굉장히 파괴적이고 아비규환인 상황인 거죠. 현실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건이지만, 소설로 담을 때, 특히 나의 문체로 담을 때는, 거리가 조절되어야 하고, 그래서 나는 상당히 배려하는 문체를 썼는데…….(웃음) 이번에도 작가들이 읽다가 틈틈이 책을 덮고 쉬었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한국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외상후장애

기현은 이 소설의 문을 열고 닫는 사람이다. 누경으로 인해 무미건조한 일상에 작은 불꽃을 얻게 되는 이 남자는 누경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많은 남자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의 목소리를 빌려, 기현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려준다. 누경 혹은 서강주의 사랑과는 다른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굳이 이렇게 기현의 목소리를 들려준 까닭은 뭘까.

“누경은 열여섯 살의 그 상처를 덮어놓고 부정하면서, 과거가 없었던 양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여자예요. 겉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직장 여성처럼 보여요. 긴 시간 동안 남자와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던, 누경에게 기현은 사실 숱하게 떼어냈고, 헤어졌을 법한 남자 중 한 사람인데, 기현은 그런 남자들과도 좀 달라요.

누경이 일방적으로 작별을 선언하는데도, 기현은 계속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혹은 욕하면서 등 돌리지도 않아요. 그때에도 그저 자신의 사랑에 좀 더 진실하게 대응하고, 누경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그 위치에서 관계 자체를 존중하는 남자죠. 그러니까 누경이 기현과 계속 끝까지 가게 되는 건데. 사랑이 꼭 어느 정도 가까워야 하고, 뜨거워야 한다고 정해진 건 없잖아요. 기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자기 사랑에 충실함으로, 어리고 비릿했던 사랑이 단련되어 가는 모습, 한 남자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런 것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캐릭터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마간의 보유주식과 홀어머니에게서 고스란히 상속받아 전세를 내어준 아파트 값의 등락 숫자에나 예민하고, 이십 년 가까이 한가하게 사보 편집이나 하며 별 야심도 없이 살아온데다 가족 하나 없이 혈혈단신이고, (…) 생에 대한 상미기간도 끝난 것 같다고 한탄해온 따분한 남자”(p.23)인 기현.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독자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누경은 어떠한가. 유리 공방에서 일하고 있으며, 얼마간 우울증을 앓았다는 소문이 돌고, 초산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이삼 년 정도라고 결혼을 강요받으면서도 기현같이 안정적이고 배려심 많은 남자가 좀처럼 접근할 수 없게끔 방어막을 치는 여자, 이런 그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독자와 소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누경이, 저자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30대 미혼 여성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누경은 개인적인 상처로 인해서 일종의 외상후장애를 심각하게 가지고 있는 여자죠. 30대 중반에 모성에 대한 초조감을 느끼는 그 시기. 전문직 미혼 여성들이 대개 누경처럼 남자와 관계를 의심하고, 나라는 개인과 상대의 거리를 어느 정도 두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한다고 봐요. 그 여자들이 결혼이라는 현실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한 부류인 30대 후반의 싱글 여성들이 뭔가…… 사회에 좀 떠있다는 거지.

그녀들의 삶은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는데, 기성세대들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삶이 시작도 되지 않은 것처럼, 자꾸만 ‘인생을 살아야지, 시작을 해야지.’라며 결혼에 대해 자꾸만 얘기하고 요구하거든요. (심지어 고모는 누경을 ‘인생 공휴일처럼 보내는 애’라고 말한다.) 그런 걸 많이 봐 왔어요. 우리나라 여자들이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크고 작은 외상후장애를 안고 있다고 봐요.”



고통은 현재의 시간을 뺏는다

책의 표지는 초록빛의 풀밭으로 덮여 있다. 그 위에 쏟아지는 빛을 보자니, 손을 대면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온기가 피어오른다. 보슬보슬한 풀밭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졸음이라도 머금고 싶다. 허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온기는 간데없이 날아가고 금세 독자는 공허한 냉기, 혹은 뜨거운 열기를 느낄 것이다. 이 소설은 제목만큼 따뜻하고 평온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따뜻함은 나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풀밭 위의 식사가 의미하는, 상처를 간직한 역설적인 평온과 태연을 그 여자에게 전해주고 싶다.”(p.249)고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 전경린 작가는 이 그림에서 ‘상처’를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그림을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에요. 어떤 상처의 들판에 놓여 있는 여자의 이야기라는, 작품 구상을 끝낸 단계에서 갑자기 이 그림이 떠올랐어요. 찾아봤더니, 사실 이 그림은 내가 오래전부터 참 좋아했던 그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그림을 처음 볼 때는 소녀 때여서, 이해를 잘 못했는데도, 뭔가 수수께끼 같은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좋아하니까 점점 그림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 생겼어요. 완전히 노출된 야외 숲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사이에 알몸인 여자. 자기를 노출한다는 것 자체가 상처잖아요. 맨몸의 상태로 앉아서,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이 세계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내가 소설을 통해 줄 수 있는 메시지하고도 일치하는 것 같아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어요.”

낙선자 전람회에 출품되어 스캔들을 일으킨 마네의 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 ‘낯섦, 도발, 대담’의 수식어를 붙이며 감탄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이 워낙 환하고, 그림이 너무 태연하잖아요. 모두가 옷을 입고 있는 야외에서, 홀로 맨몸을 드러낸다는 것, 전 이게 상처처럼 다가왔어요. 노출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한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현대는 상처투성이잖아요. 누구라도 어떤 부분의 외상후장애를 가진 존재들이라고 봐요, 상처에 대한 긍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 자기와 결합하고 화해하는 것. 그래야만 건강한 현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경의 상처의 고통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열여섯 나이에 겪은 성폭력, 그것은 서른이 넘은 누경에게 아주 머나먼 일 같지만, 번번이 현재의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뉴스에서 비슷한 사건이 들려올 때마다 그녀는 다시금 고통에 빠진다. 상처와 화해하고, 건강하게 현재를 딛는 일, 그것이 “아직도 누경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저자가 누경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열여섯 살의 누경이 누워있던 상처의 들판은, 그녀에게 (누경과 저자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서강주와의 사랑이 상처의 들판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줘요. 그 사랑이 끝나면 누경은 그 들판에 가서 서 있게 되는 거죠.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만나게 되고, 그제서야 화해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아마도 고통의 가장 나쁜 점은, 시간을 뺏는다는 점이에요. 언제나 과거로 사람을 데리고 가서 현재를 살지 못하게끔 만들어요. 누경 역시 그랬지만, 부정했던 과거와의 결합으로, 현재에 현존할 수 있고, 현재를 딛게 되잖아요. 그것만 해도 많은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것의 잔혹함

‘대개 경직되고 차갑게 보이는데, 문득 드러나는 수줍음과 어색해하는 동작 때문에’ 여대생들이 ‘어려워하면서도 사랑스러워’ 하는 교수님이 ‘굳게 잠근 셔츠의 단추를 풀고 곧은 목과 길고 단단한 팔뚝을 드러’내고, 때때로 잘 웃지 않는 그가 강의실에 긴장감이 돌 정도의 웃음을 터뜨린다면, 아마 누구든 이 교수님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으리. 이런 서강주에 대해서 독자들의 반응은 분분하다고 한다.

“나쁜 사람이라는 사람도 있고, 멋있다는 사람도 있고.(웃음) 자기 자신을 무심한 척 억누르기 때문에, 상대가 좋아하는 감정까지 억압시키죠. 이런 걸 어른스럽다고 할 수도 있고요. 서강주란 존재는 유경에게 첫사랑도 아니고 완전히 본질적인 사랑이에요. 나는 그런 존재가 모든 여자에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운명 같은, 본질적인 사랑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평생 동안 못 만난 채로 체념하고 끝날 수도 있고, 만났는가 접근해보면 아니어서 상처받을 수도 있는 거죠.”

누경은 어릴 때 본 서강주의 얼굴을 결코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을 모르는 채, 어린 시절의 특별히 다정한 시선과 공기와 냄새와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의 기억이 아니라 체온과 체액의 기억이고 더듬이 같은 감각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을 단 하나로 표현하자면 기쁨이었다. 체액 속의 기쁨, 체온 속의 기쁨,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에 밴 기쁨,(p.88)

서강주는 감각만으로도 충만한 기쁨을 주는 데 반해, 기현은 바로 곁에 있는데도 완벽한 공허감을 준다. 완전한 합치를 원하는 누경에게 기현은 애를 써도 와 닿지 않은 ‘낯선’ 사람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기현에게 노력하려는 찰나, 누경은 단 한 번 마주친 기현의 선배 인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가혹한 사랑의 작대기! 기현이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에 빠지는 묘약’은 운명이라고 말하는 걸까?

“인서의 등장 자체가 누경에게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는 굉장히 잔혹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현을 누경이 끝까지 거절하는 것을 누경의 잔혹함이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것의 잔혹함이라고 해야겠죠. 사랑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참 두려운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랑을 늘 꿈꾸지만, 사랑 앞에서 도망가는 사람도 훨씬 많을 거예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서를 누경이 먼저 바라보죠. 누경이 처음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장면이에요. 그래서 중요한 대목이죠. 이제까지는 늘 남자들이 다가왔고, 누경은 밀어내고 도망가려고 했다면, 인서에게는 자발적인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인 셈이니까요. 그럼에도 사랑에 대해 많은 걸 겪어 버려서, 가슴이 재처럼 다 타버리고 난 마음이, 다가오는 사랑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들의 인연은 공중에 흩어져 버릴 수도 있고, 어쩌면 이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 여지를 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말한다. 누경 역시 강주를 사랑하면서,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은 명확하게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p.235)라고 말한다.

“지금을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돈이 안 되는데도 유독 사랑은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갈망하는 이유가 뭘까요? 사랑은 참 신비로운 연금술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깨지기 쉽고, 변하기 쉽고, 잃기 쉬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신비로운 연금술을 체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랑의 궁극은 자기 변화, 자기 쇄신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하기 전과 하기 후에 이 세상이 바뀌는 거죠. 그랬을 때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은 연금술을 경험한다고 생각해요.
(고통스러울지라도요?) 고통을 지나서만이 그렇게 되는 거죠. 유리로 은유한 것처럼 엄청난 열을 지나서.(웃음) (굉장히 어려운 거네요.) 그렇죠. 인생이 신비로운 것이라는 걸 수긍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서강주는 누경에게 강한 여자가 되라고 말한다. 문득 『내 생의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인규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부턴 강해지기를 바라.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거야.” 욕망하는 사람은 강해져야 한다. 저자의 다른 소설 속에서도 욕망하는 인물들은 늘 강해지길 소망한다. 저자가 말하는, 강한 것,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주는 굉장히 현실적인 남자라서, ‘강한 여자가 되라.’는 그의 말은, 현실적인 의미 그대로 체력적, 능력적으로 강해지라는 뜻이에요. 내가 강하다고 하는 의미는, 순수한 몰입을 말하는 거고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조건들과 관계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 순수하게 자기 생에 몰입되어 있는 그 모습, 그걸 난 강하다고 봐요. 세상의 조건은 한도 끝도 없어서 늘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요. 그렇잖아. 세상의 조건은 무한히 경쟁하게 만들고, 무한히 더 갖게끔 하죠. 인간은 그런 조건 속에서는 끊임없이 약하고 비겁해질 수밖에 없어요.”

누경은 사랑이 지나간 후에, 그토록 두려웠던 상처를 응시한 후에야 강해진다. 얼마간의 외로움, 내면의 고요함, 자신만의 리듬을 회복한 뒤에야 행복을 느낀다. 그런 누경에게 친구 상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너의 자발성이 질투나!”(p.224)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현재에 머무는 것. 그것이 누경이, 전경린 작가가 바라는 행복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다. 난 후자에 속하지만.”(웃음)


소설로 삶의 실체성을 느낀다

“유리공방에 앉아 있으면, 가끔 이상한 느낌에 빠져요. 텅빈 극장에 홀로 앉아 있는 것 같은…….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세상 어딘가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난 그곳에 없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의 다른 곳에, 필름이 없는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있는 거예요.”(P.91)

전경린 작가는 삶의 질서에 어긋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 속에서 그녀는 욕망하는 여성들을 건져 올렸다. 그녀의 소설 속 배경은 대부분 일상이다. 그 속에 묻혀 있던 인물들은 욕망을 할 때야 비로소 삶의 주인으로, 하나의 개인으로 도드라진다. 그 욕망으로 비롯된 어긋남은, 기분 좋은 일탈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런 것들이 저자의 마음을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에 더 매혹적이니까요. 내 경향상 그런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보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잖아요. 일탈은 미래의 길이에요. 일탈하는 사람은 언제나 새 길을 만드는 사람인 거죠.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추구가 그토록 찢어지고 아픈 이유는,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서 그래요. 2009년 다보스포럼에서 세계양성평등지수 순위를 발표했는데, 135개국 중에 한국이 111인지 112위인지 거의 꼴지였어요. 그 밑에는 아프리카, 중동 국가밖에 없었고, 아프리카 몇 개 국가는 한국보다 더 높았어요. 그게 2009년 상황이라는 거지.(웃음)

한국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상처라는 것……. ‘난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정말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여자인 거고, 그렇지 못한 게 보편적이라는 거죠. 그 순위를 보면서 왜 내 소설의 주인공이 그렇게 아팠는지 이해가 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웃음) 우리는 지금도 사회가 다 발전하고,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이 사회는 아직도 너무나 완강해요. 내가 쓰는 소설의 인물들, 이 정도의 용신은 별로 상처 안 받고도 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는 거예요.(웃음)”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소녀가 여성이 되는 경계에 주목한다. 상처받기 쉬운, 그때.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라는 소설 속에서도 스물다섯 살은 심각하게 상처를 받는 나이로 나와요. 그래서 그 주인공이 여행을 선택해서 떠나고 하는데, 소녀가 여자가 될 때, 이 한국 사회에서는 상처받기 쉽다는 거죠. 그래서 더 유심히 그 지점을 머물면서 응시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 봐요.”

소설 속에서 누경은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한다. “글로 쓰고 또 쓰다 보면 고통은 당신 개인을 지나 세상 밖으로 흘러나갈 거예요. 세상의 것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쓰세요.”(p.221)라는 의사의 처방을 보니, 상처받는 시기를 지나온 작가에게도, 소설 쓰기가 이와 비슷한 행위가 아닐까 싶었다. 전경린 작가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유일하게 자기만이 느낀다는, 자기 믿음에서 글을 써요. 그와 동시에 자기가 단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믿고, 내가 이걸 쓰면 자기 이야기처럼 느낄 많은 여성의 대표자로서 글을 쓴다는 믿음도 있어야 돼요.

그러다 보면 내가 느끼거나 내가 경험한 어떤 부분들이 절대로 내 것만이 아니고, 이 세상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에 대한 권위가 없으면 소설을 다채롭게 쓰기 어렵죠. 사실 내가 쓴 이야기가 책이 되어 나왔을 때는 이미 세상의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소설을 하나하나 쓸 때마다 나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고, 그게 조금씩 누적되어 서서히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어쩌면 그녀에게 소설 쓰기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과 닮아있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견하는 것, 그녀가 오래전의 작가의 말에서 “삶의 실체를 갖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것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살면서 느낌의 결여를 느낄 때면 괴로웠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는 것처럼 당연한 단계들이 있잖아요. 대학 졸업하면, 결혼을 해서 남들처럼 자녀를 둘 낳고……. 마치 보험 회사 설계도 같은(웃음) 그런 삶을 밟아 가다 보면, 이건 나의 삶이 아니라, 삶이라는 이미지 정도에 실려서 가고 있는 희박한 느낌이랄까요. 그런 게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고 글을 통해서 실체성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실제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예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글 자체는 여전히 사실 이미지의 집합일 수 있어요. 글 자체는 허구고요. 그런데 글을 쓰는 행위의 치열함이나 행위의 응축성, 여기에 실체감이 존재하죠. 흐르는 시간 위에서 내가 쓸 소설을 구상하는 이 구체성이 힘이 되기도 하고요. 풍요롭죠. 그러니까 나는 좀 공허함보다는 차라리 상처를 받는 게 낫다, 이런 주의자예요.(웃음)

이 삶에서 가장 나쁜 것은 공허함이고, 삶의 희박성인 거죠. 마지막에 살고 난 뒤에 ‘아, 이게 누가 산 인생인지 모르겠다.’ 이런 것이야말로 무섭고 나쁜 거지. 내가 상처를 입으면서 머물렀던 시간이나, 그 상처를 벗어나면서 세상이 바뀌었을 때 느끼는 환함 같은 것, 그런 걸 겪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랑, 인생의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일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란 것을 알게 되었어, 몸 안에서 손톱으로 할퀴며 울부짖던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친 것처럼 조용해. 몸이 이렇게 고요한 거란 사실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어.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실내처럼 고요해.”(p.225)

이런 그녀 역시 고유한 생활 리듬을 지닌, 질투 날 정도의 자발성을 지닌, 누경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소설을 시작하게 되면, 대체로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는 좀 쉬면서 규칙적으로 지내요. 초고를 쓸 때, 그 규칙성이 생길 때가 제일 즐거운 것 같아요. 오전에 내가 뭔가 했으니까 오후에 나가서 마음껏 자유롭게 놀 수도 있고,(웃음) (요즘엔 주로 뭐하고 노세요?) 요즘은 인터뷰하고 놀아요.”

이 소설 역시, 인터넷 연재 작품이다. 저자는 ‘좋은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연재를 했는데, 가끔 독자들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실망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컥~’이라는 댓글을 달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단다. “예를 들면 누경이 기현에게 문자로 작별할 때, 독자들의 반발이 컸어요. ‘세상에, 문자로 작별을 하다니!’ 이런 일 겪어본 사람은 ‘엄청 상처야!’ 이러면서.(웃음) 그런데 누경의 내면을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그럴 땐 우두커니 서서, 이걸 어떻게 고쳐야 되나.(웃음) 책으로 출간할 때는, 거의 손을 안댔어요. 누경이 힘들어하는 부분들은 연재하면서 빼기도 했는데, 그 연재분보다도 분량을 줄였어요. 실제로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보고 ‘좀 이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되도록 짧으면서도 그 상처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게끔 했어요.”

“‘세 노르말’ 이 표현은 극복하거나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안고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쓰인다고 했다. ‘세 노르말.’”(p.237) 그렇게 중얼거렸던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누경의 사랑, 서강주라는 운명, 기현의 노력, 모든 것에 ‘세 노르말.’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인생이 신비롭지 않으면 사랑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묻던 저자의 말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 말은, 사랑을 해야만 인생의 신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 걸까?

전경린 작가는 이후에 문예지 연재를 할지도 모르겠다며, 어쩌면 판타지이거나 신화적인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직 쓰여지지 않았으므로 두고 봐야겠지만. 아마 한편의 소설, 하나의 세계도 단순히 저자의 고집과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리라. 문득 소설을 쓰는 일, 혹은 삶의 실체성을 획득하려는 어떤 노력은, 사랑하는 일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 혹은 삶에 대한 사랑. 아마도 사랑의 두려움을 무릅쓴 자가 인생의 신비로움을 발견해 내겠지. 다시 책을 내려다본다. 풀밭 위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뿌리를 깊게 박아 땅 위에 단단하게 선 나무. 『풀밭 위의 식사』를 마치고 난 소감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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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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