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계에서 ‘노장’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어색하다. 가요의 역사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었음에도 1980년대를 이끌고 1990년대를 받쳐 준 사람 가운데 2000년대를 장악한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요의 역사에는 나이테 수에 비해 뿌리가 많이 없다. 이것은 한국의 음악팬들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한국의 음악인들에게도 큰 불행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올해로 57세를 맞은 송홍섭은 그야말로 귀객 중의 귀객이다. 1979년 그룹 사랑과 평화의 2집 멤버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요계에 투신했다.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로서, 김현식, 한영애, 이은미 등의 음반 프로듀서로서, 삐삐밴드, 유앤미블루, 신윤철 음반의 제작자로서 그의 인생은 창작의 연속이었다.
건강 악화로 죽을 고비를 넘긴 2000년대에도 송홍섭은 후학을 양성하며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3집
<Love You... Honey>(2009)이 나온 지난해, 그의 나이는 이미 50대 중반을 넘어 있었다. 무명에 가까운 젊은 음악인들과 함께한 이 앨범에서 송홍섭은 작곡자와 베이시스트로서의 역할에 주력하며 또 다른 실험을 완성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붙은 ‘불사조’라는 별명이 오로지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1월 29일 저녁, 상상마당에서 만난 송홍섭은 열정과 여유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가 즐겨 입는 청바지와 짧은 머리 스타일도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송홍섭은 자신의 세 번째 앨범과 베이스 이야기와 관련하여 시종일관 기쁘게 반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음악 선배이기도 한 이남이의 사망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진 이날,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건강’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예전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괜찮은가?
2003년과 2004년 즈음에 두 번의 고비를 거의 1년 간격으로 겪었다. 하나가 심근경색이었는데, 이건 내가 중환자실에 갈 정도로 심각했다. 5분 차이로 겨우 살아남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끔찍하다. 그 후로 하루에 네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김종진(그룹 봄여름가을겨울 멤버)이 권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봄여름가을겨울 공연 연주를 끝내고 뒤풀이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췌장에 문제가 생겼다. 암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위험했다. 이렇게 두 번 고비를 넘기고 요즘에는 시골에서 살고 있다. 확실히 50대에 들어서니까 체력에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하루에 18시간 정도로 일하고 잠은 5시간 잘까 말까 했는데 이제 이건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에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5, 6시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신보에 담긴 곡들이 참 좋다. 자신의 송라이팅에 만족하는가?
되도록이면 단순하게 가려고 노력한다. 항상 이 부분을 고민한다.
2집 <Meaning Of Life 1>이 베이시스트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던 반면 신보인 3집 <Love You... Honey>는 멜로디도 잘 들리고 기대 이상으로 대중적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한 방향으로만 간 것 같다고 하더라. 어쨌든 나 스스로가 원했던 것을 만들어서 후회는 없다. 하지만 다음 앨범에서는 뭔가 다른 실험을 해야 할 것 같다.
앨범의 콘셉트가 궁금하다.
특별히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작업 진행의 틀은 갖고 있었다. 2집에 담긴 노랫말이 너무 자조적이고 생기가 덜해 보여서 이번에는 가사랑 노래를 잘하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는 곳 근처에 친구가 운영하는 조용한 펜션이 하나 있는데, 한동안 거기에 들어가 혼자 지내면서 수록곡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3집에 담긴 곡들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 둔 곡들이 아니라 서너 달 사이에 한꺼번에 나왔다. 한마디로 내가 미진했던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고, 작곡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작곡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웃음) 음악적으로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든다. 이번 앨범이 내 음악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공연 연습을 하면 앨범과 완전히 다른 짓을 한다.
자신보다 훨씬 젊은 음악인들과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베이스 연주를 어디에 어떻게 위치시킬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대부분 스탠다드하다. 여기서 베이스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기본 패턴을 적어보고 컨디션이 좋을 때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보았다. 요즘 사람들이 멀티 녹음을 많이 하기에 나는 원 테이크로 작업을 진행했고, 그 기대치의 반 정도를 실현한 것 같다.
왜 신보의 모든 드럼 연주를 프로그래밍으로 구현했는가? 명색이 리듬을 책임지는 베이시스트인데.
내가 원하는 리듬 모양새가 있었는데 그걸 리얼 드럼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리얼 드럼으로 작업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큼 질을 높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한 음씩 분해해서 다시 편집을 했다.
드럼 소리가 자꾸 걸려서 레벨 조절에 이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레벨 조절은 내가 의도했던 것이다. 다른 엔지니어를 고용하지 않고 내가 직접 믹싱을 했다. 엔지니어에게 맡길 수 없는 나만의 고집적인 밸런스가 따로 있다. 보통 드럼이 베이스보다 살짝 앞으로 간다면 나는 그것을 역전시켜서 베이스를 조금 더 올리곤 한다.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송홍섭은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스가 자리만 잡으면 어떤 음악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웬만한 베테랑이라면 자신의 음악에 랩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텐데, 신보에서는 첫 곡부터 랩이 나온다.
지금은 또 랩을 안 쓴다.(웃음) 주변에 랩퍼가 없어서 그냥 안 한다.(일동 웃음)
이 기회에 앨범 수록곡을 차례대로 살펴보겠다. 첫 곡 제목인 「Psycho Path 887 」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강동완이라는 친구가 이 곡의 가사도 쓰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노래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조금 집요하게 굴었다. 결국 이 친구가 이 노래만 887번 불렀다.(웃음) 일부만 녹음한 건 다 못 찾아서 옆에 ‘ ’을 붙였다.
이 곡에서 베이스로 드러내고 싶었던 건 무엇인가?
이 곡에선 딜레이로 실험을 했다. 딜레이에도 여러 가지 계산법이 있는데 아주 맘에 드는 계산법을 발견한 다음에 여기서 여음만 가지고 소리를 냈다. 소리가 특이해서 치고 나면 쾌감도 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에는 송홍섭 특유의 곡 스타일이 나타난 것 같다.
워낙 블루스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블루스 넘버가 나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는 왜 3부작으로 엮었나?
처음에 남자 보컬을 썼는데 뭔가 미진한 감이 있어서 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조금 더 강한 느낌을 원했다. 두 번째 버전은 여성 보컬이, 마지막에 있는 「Outro」는 남녀 보컬이 같이 불렀다. 이 곡에서 ‘모퉁이’라는 표현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벽이나 힘든 일을 비유한 것이다.
음악적으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는 언제인가?
이번 앨범이다.(웃음) 1집은 정리를 못 한 탓에 굉장히 어수선했고, 2집은 원하던 걸 실현하긴 했지만 너무 단순하고 유치했다. 2집 완성 후에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는데 여기서 만난 친구들이 3집에 참여했다. 음악을 만들고, 작업에 젊은 친구들을 참여시키고, 함께 연주하는, 이렇게 세 단계로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렇게 만든 3집에서 내 음악이 전환점을 돈 것 같다. 이제 뭔가 새로운 게 이루어질 것 같다.
「사랑해 기억해」는 순수하고 재미있게 들린다.
나에게도 아직 이런 순수한 감성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내가 언젠가 기록했을, 내가 가진 여러 가지 감성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 곡의 노랫말은 내가 먼저 써 놓은 가사를 나머지 친구들이 풀어쓰는 식으로 완성했다. “사랑해 기억해” 다음에 이어서, 또 “사랑해 기억해” 하면 또 이어서??????. 곡은 내가 썼어도 공용으로 풀어 놓은 셈이다. 젊은 친구들 각자가 여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다.
이 곡의 베이스는 비교적 점잖게 들린다.
요새 전자 장비가 아주 좋기는 해도 어떤 소리가 컴퓨터를 통해서 나오면 시간이 조금씩 걸린다. 이것이 반영된, 소리를 마지못해 내보내는 식의 이펙트가 따로 있는데 이 곡에서 그 이펙트를 썼다. 마치 무언가가 창호지를 힘겹게 뚫고 나오는 느낌이 있다.
「들어봐!!」에서는 보코더가 인상적이다.
그것은 내가 창안했다. 그렇게 세팅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소리에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이걸 실제로 무대 위에서 하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베이스음은 굵고 덩치가 크기 때문에 기타처럼 소리가 빨리 안 나온다. 소리가 늦게 나오는 만큼 미리 쳐야 하니까 그만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금도 찾고 있다. 가사는 건반을 치는 정다움이라는 친구가 썼다.
「세계 정복」은 즐겁게 녹음한 것 같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의 일상들을 모아 보았다. 앞에 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내가 직접 가르치지는 않은 어느 학생의 연주를 그대로 녹음한 것이다. 이 곡의 베이스 연주는 평범하다. 리프가 먼저 나온 다음에 곡이 완성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리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노랫말은 여러 학생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게 한 다음에 내가 수정하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학생들에게는 이런 작업이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Gypsy」는 소화하기 어려웠다.
노래 진행에 베이스 연주만 붙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이 곡을 무대에서 해보니 생각만큼 잘 안 됐다. 노래하는 사람이 베이스 연주에만 의존해서 노래하는 것을 낯설어 하는 것 같았다. 음을 잡는 것도 힘들어했다. 보통 록 밴드를 보면 기타, 베이스, 드럼이 전부이고 어떤 경우에는 베이스만 있어도 노래를 잘하던데??????. 드럼을 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에서 잘 나와야 잘 만들어진 곡인데, 참 안타깝다.
「Love you」는 멜로디가 정말 좋다. 후렴은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잘 남는다.
펜션에서 혼자 곡을 만드는데 지팡이를 든 어떤 할머니 한 분께서 건물 앞을 아침저녁으로 지나가셨다. 아주 더운 날 할머니께 잠깐 쉬다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내 옆에 앉으셔서 굉장히 긴 이야기를 하셨다. 9살에 식모 생활을 시작해서 13살에 시집을 갔고, 9남매를 키웠는데 그중에 4명이 죽었다고 하더라. 농사짓는 일, 애들 키우는 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펜션 옆집에 사시는 분이셨다. 「Love you」는 그때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만든 곡이다.
그래서 곡 중간에 국악이 들어간 것인가?
그렇다. 할머니 이야기에 가장 알맞은 음악이 사물놀이 같았다. 나는 항상 국악으로 무언가를 시도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영화음악을 만들 때 국악도 샘플로 써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할 때마다 촌스러워지는 것 같다. 국악 양식이 양악과 달라서 무언가를 같이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옛날에 군 복무를 김덕수랑 같이하면서 양악과 국악을 여러 차례 섞어 보기도 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무언가 두드리는데 아무런 리듬이나 그루브가 안 나오다가 30분 정도 지나서 리듬 하나가 겨우 만들어지곤 했다.
「인생 뭐 있어」의 가사는 본인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이 노랫말도 「사랑해 기억해」처럼 내가 “인생 뭐 있어.”라고 쓰면 강동완이 나머지를 채우는 식으로 완성했다. 간결한 가사를 원했는데 약간 어수선하게 나왔다.
신보에 들어간 10곡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거나 기억에 남는 베이스 연주는 어떤 곡에 있나?
우선 「Love you」가 재미있었고, 「Psycho Path 887 」이나 「사랑해 기억해」는 그야말로 실험이었다. 참고로 「들어봐!!」에서 나오는 슬랩 베이스는 한두 부분만 연주하고 샘플을 떠서 작업한 것이다. 나도 슬랩 베이스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사실 슬랩 베이스는 옛날에 배워 놓고 감성적으로 잘 안 맞아서 한동안 버려둔 주법이었다. 다음에는 안 할 것 같다. 그리고 「Gypsy」는 듣는 사람에게 호감을 못 주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어느 날 내가 원하는 부분이 만족스럽게 재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번 앨범을 대중들이 어떻게 들어주었으면 좋겠는가?
그것은 내가 요구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좋아하면 괜찮고, 혹평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사실 많이 부끄러운 작품이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싶다. 그래도 요즘 시도하고 있는 음악이 잘 정리가 되면 모든 게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송홍섭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겸손’이었다. 이미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여러 장의 명반을 낳은 거장임에도 그는 이제 갓 데뷔한 신인 가수처럼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낮추었다. 그에게서 확인한 것은 과거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반성이었다. 작은 표현 속에 담긴 거대한 야망을 통해 그가 천생 음악인임을 느꼈다.
50대 중후반인 지금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팔자대로 산 것 같다. 음악 외에 달리 아는 게 없다. 송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나름 사업도 해봤지만 그것이 나에게 직접 음악을 하는 것만큼의 쾌감을 주지는 못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실제로 음악을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나에게는 항상 음악으로 기록하고 싶은 것들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것을 어느 기간 동안 구체화시켜서 반드시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하면 딴 짓은 안 한다. 지금 나를 위해서 음악을 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좋다. 아마 70세까지 현장에서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베이스를 처음 잡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
예전에 클럽에 가면 무대 옆에 조그마한 대기실이 바로 붙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인천에서 고1 때 그러한 구조를 갖춘 클럽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대기실에서 보니 베이스 연주자가 내가 있는 쪽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때 연주 모습을 보고 베이스가 내 머릿속에 선명하고 재미있게 각인되었다. 너무 멋있었다. 당시 그 선배는 옛날 음악을 현대화시킨, 조금 유치하지만 신나는 음악, 패턴이 뻔히 보이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주 퇴폐적인 록 음악의 진수를 보았던 것이다. 가끔 나도 연주가 잘 되면 그렇게 ‘양아틱’하게 변하기도 한다.(웃음) 사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서 알토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그리고 기타를 조금 쳤을 뿐 베이스는 전혀 몰랐다. 그러다가 나중에 베이스라는 대안을 찾은 것이다. 그 뒤로 계속 베이스만 잡았다.
누구를 사사하거나 특별히 연주 지도를 받은 적이 있나?
없다. 음반 듣고 카피를 한 게 거의 전부이다. 화성학은 국내에 자료가 없어서 아는 사람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자료를 번역하면서 혼자 공부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NHK 실황>(1983)이 최초였고, 5집(1983) 녹음부터 정식 멤버로 들어갔다. 7집(1985)에서는 내가 위대한 탄생을 직접 구성했다. 이때 유재하, 김광민, 정원영 등이 있었다. 7집이 온전하게 내가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거 만들 때 유재하가 나한테 「사랑하기 때문에」를 용필이 형이 부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이 곡을 용필이 형한테 전해 주었더니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어했다. 결국 녹음을 하긴 했는데 곡 스타일과 창법이 서로 맞지 않아 별 호응이 없었던 것 같다.
김현식과 함께한 경험은?
옛날에 사랑과 평화 매니저가 이장희 씨였다. 이장희 씨가 나한테 부탁해서 김현식 1집(1980)에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다. 당시 세션 멤버 중에는 배수연, 김양일이 있었다. 그 뒤로 한참 있다가 내가 김현식을 다시 만난 게 4집(1989) 때였다. 이 앨범에 유재하 곡이랑 송병준 곡도 들어갔다. 이때부터 1991년 유작까지 김현식과 함께 작업했다.
김현식의 유작인 6집에 들어간 베이스 연주는 송홍섭의 베이스 같지 않다.
오버하면 곡이 망가지니까 균형을 잡고 평소보다 연주를 덜 했다. 나도 치고 나서 이상했다.(웃음)
지금까지 참여한 음반 가운데 자신의 세션 연주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괜찮은 게 하나도 없다.(웃음) 그나마 애정이 있는 것은 한영애 씨 2집 <바라본다>(1988)이다. 한영애 씨가 이전까지 포크를 하다가 2집부터 록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미팅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후에 세운 송 스튜디오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음반들이 여러 장 나왔다. 스튜디오가 결정적으로 어려워진 계기는 무엇이었나?
삐삐롱스타킹이 방송 출연을 금지당하고 나서 상당히 어려워졌다. 밴드가 방송 출연을 못 해도 팬들은 음악을 들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 땅에는 아예 ‘록 음악팬’이라는 게 없었다. 밴드가 방송에 안 나오니 그냥 끝이었다. 그렇게 비즈니스가 불가능해진 다음에 곧 IMF까지 터졌다. 거기서 결정적인 치명타를 맞았다.
솔로 앨범을 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랫동안 다른 작업을 하다 보니 생각만 하고 쉽게 이루지를 못했다.
한국에서 누가 베이스를 잘 치는 것 같나?
요즘은 학생들도 기술적으로는 다 잘한다. 옛날에 일본 연주자들이 드럼이나 베이스 연주하는 것을 보면 저렇게 좋은 기술을 가진 연주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몇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 이 부분은 해결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음악가로서 자기 소리를 내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문제는 표현력에 있다. 베이시스트들은 소리든 음악이든 자신만의 무언가를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우선 자기만의 표현법을 갖길 바란다. 심지어 나도 최근에 주법을 바꿨다. 21살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주법이다. 어떤 주법이 익어서 빛이 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내가 이걸 바꾼 지가 3, 4년 정도밖에 안 돼서 여전히 애를 먹고 있다. 그래도 2집보다 3집에서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아 기쁘다. 요즘도 밸런스를 못 맞추면 예전 주법을 쓰거나 피크로 연주를 할 때도 있지만 앞으로 10년 안에는 새 주법이 완전히 익을 것 같다.
그것을 이루려면 일단 건강해야 한다.
맞다.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이제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반드시 좋은 음반을 내고 가겠다.(웃음)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추천하는 음반을 꼽아 달라.
우선 자코 패스토리우스(Jaco Pastorius)와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 그리고 폴 잭슨(Paul Jackson)의 연주를 꼭 들어보기 바란다. 아마 폴 잭슨은 허비 행콕(Herbie Hancock)과 <Head Hunters>(1973) 앨범부터 같이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커스 밀러는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랑 같이 있을 때 많이 매료되었다. 참고로 나의 영원한 우상은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이다. 무대에서 흥이 나면 바로 그쪽으로 간다.(웃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지금까지 아쉬울 것 없이 좋은 일들이 이어졌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건강 나빠지고 쓴맛 본 건 아쉬워도, 지금은 너무 좋다.
인터뷰: 임진모, 김두완
사진: 정혜리
정리: 김두완
- 글 / 김두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