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잡지 〈GQ KOREA〉의 편집장 이충걸은 지금까지 네 권의 책을 냈다. 독특한 시선으로 당대의 인물 스물아홉 명의 내면을 들여다본 인터뷰집 『해를 등지고 놀다』, 제목 그대로 엄마에 대해 쓴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이별에 대해 쓴 『슬픔의 냄새』, 쇼핑과 도시적 삶, 패션에 대해 쓴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그의 펜은 프리즘이다. 어떤 소재든 그의 펜에 걸려 굴절되면 다양한 빛깔로 나누어진다. 엄마에 대해 쓰든, 이별에 대해 쓰든, 쇼핑에 대해 쓰든 그의 글은 항상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그의 펜은 예민한 촉수다. 수많은 파랑 속에서 딱 맞는 파랑을 발견해낸다. 그의 글에는 신랄하고 자학의 경지까지 밀고 간 유머감각, 사물의 물성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감수성과 치밀함, 불친절하다고 느껴지는 단정과 편견, 고집이 있다.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는 가벼운 에세이집이라기보다는 소비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칭찬인가? 잘 썼다는 이야기로 듣겠다. (웃음) 일상에서 만나는 소비의 양식을 모두 포괄하고 싶었다. 백화점에서 좌판까지, 즐거움에서 괴로움과 죄의식까지, 중독에서 절제까지.
소비에 대해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소비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만나게 되고, 그 생각들은 계속 확장된다. 원래 예상했던 날짜보다 3년 늦게 원고를 넘겼다. 초고는 1,800매쯤 됐는데, 많이 쳐냈다.
기다려준 출판사도 대단하다. 잡지사에서 일하다 보면 눈이 높아지지 않나?
쇼핑의 괴로움은 하나다. 눈은 높고 돈은 부족한 거. 특히 사진 찍는 애들은 직접 보고 만지고 찍으니 더 괴롭겠지. 우리 같은 라이센스 잡지들이 찍고 싶어 하는 오브제들은 대부분 ‘차암’ 비싼 것들이다.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무덤덤하게, 굳세게, 살아가야지. 가진 만큼, 주관만큼, 신념만큼 산다.
〈GQ〉에 실리는 오브제들은 어떤 것들인가?
패션 잡지는 그 시대의 하이엔드한 것들을 보여준다. 〈GQ〉는 그런 물성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한 죄의식, 아웃사이더적인 시각 역시 가지고 있다. 편집장으로 그런 것들을 균형 있게 조절한다. 우리 사회는 사치나 명품에 대해 야유나 터부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잡지의 속성은 실용 이전에 일루전, 판타지다. 〈GQ〉에 실린 물건들 중에 비싼 게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비싼 물건이 아니다. 당대의 가장 벼린 디자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다. 수족관처럼 완상할 가치가 분명 있다.
독자들은 당신의 글에 대해 극명하게 호오가 갈린다. 열광하는 소수의 팬이 있고, 극명하게 싫어하는 사람 역시 소수지만 있고,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글은, 음악처럼 알 수 없는 기호가 만나서 우리 삶을 터치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장치다. 나는 잘 정제된, 팩트가 명료한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글, 골 아프다는 이야기 많이 듣는다. 나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되고 싶지도 않고. 내 글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책임질 의무는 없다.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하나?
진술적이고 모호하면서 언어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아베 코보,
『유자약전』『열망』의 이제하. 아니 에르노, 박상륭, 이문구의 글을 좋아한다.
책에 여자가 주인공인 글들이 많다.
쇼핑에 대해, 그 디테일을 여자들처럼 포만하게 고통스럽게 여기는 남자는 없다. 남자는 그걸 모른다. 남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층위다.
당신의 책에 따르면 지금 세대의 인간은 쇼핑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있을 듯 하다.
지금 세대 사람들은 고대의 왕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부자들이 갖고 있는 것들도 보통 사람도 가격만 다르지 다 갖고 있다. 가져야 한다는 건 숙명, 가지고 싶다는 건 인생의 동력, 어딘가로 운반시키는 에너지다.
쇼핑하는 걸 좋아하나?
일 년 반 전까지 쇼핑을 즐겼다기보단 잘 저질렀다. 시계를 좋아해서 많이 저질렀다. 나 같은 사람이 시계를 수집하면 집문서가 없어진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900년대 초반의 소파 두 개를 지른 적도 있고……. 그런데 최근에는 쇼핑에 흥미를 잃었다. 첫째, 돈도 없고, 두 번째는 ‘사야한다’는 욕구가 줄어들었다. 갖고 싶은 것도 줄었고.
편집장으로 일하는 건 어떤가? 편집장으로 89권의 〈GQ〉를 만들었는데.
나는 편집장으로 일하는 게 좋다. 피처 에디터로 일할 때 인터뷰를 하고 원고 쓰는 일이 싫었다.
인터뷰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가끔은 목격자로의 즐거움이 있긴 하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나?
나는 표리가 동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이다. 솔직과 정직은 물론 다르지만……. 역지사지도 잘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싫다.
에디터 시절 마감을 어기는 걸로 유명하더라.
많이 어겼다. 그런데 나한텐 마지막 이틀을 남겨두고 압축적 폭발력이 생긴다. 막판 뒤집기라고 할까. 그런 재주가 있다. 에디터들이 ‘편집장님도 늦게 하셨잖아요.’ 그러면 선배의 악덕을 배우지 말라고 한다.
마감 때 기자들을 몰아붙이는 편인가?
편집장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에디터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사회적 계몽의 역할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쫀다고 하겠나. 알아서 해야지. 그런데 커리어가 많을수록 에디터는 느슨해진다. 사실 후배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반면교사 노릇을 할 때가 많다.
〈GQ〉에는 언제부터 일했나?
창간멤버다. <보그>에서 피처에디터 일을 하다가 편집장으로 왔다. 2000년 6월부터 준비 작업해서 2002년 3월에 잡지를 냈다.
|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를 펴낸 GQ 편집장 이충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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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만드는 게 재밌나?
마감을 넘겨야 하는 일상이 신산스럽긴 하지만 드라마가 있다. 똑같은 비빔밥을 만들더라도 매호 들어가는 재료가 달라지니까. 과정의 디테일도 다르다. 잡지의 재미는 한 달을 만들어 잡지가 나오는 순간 모든 고생이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게 내 성격에 맞다. 자주 들추어보고, 지난 실책에 울부짖고 그런 건 별로다.
잡지를 만드는 건 본질적으로 수공업에 가깝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은 아티스틱한 노동자다. 여러 사람이 연합해서 수공업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작업이 잡지라고 생각한다.
〈GQ〉는 주로 누가 보나?
20대에서 30대까지, 스타일에 관심 있는 남자라는 외곽적인 정의는 있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나누고 싶지 않다. 40대 남자들도 많이 읽고, 여성들도 꽤 많이 본다. 〈GQ〉 독자 중 10%가 여자다. 한국에서 잡지는 다수보다 소수가 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순정한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GQ〉의 부수는 대외비라 밝힐 수 없지만 패션지 중 빅3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 잡지 시장이 워낙 어려우니까, 모두 가난한 형제자매다.
패션잡지 편집장이라고 하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델이 된 안나 윈투어가 떠오른다. 실제 모습은 어떤가?
모든 잡지사 편집장에게는 권력이랄까, 힘이랄까, 그런 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잡지를 만드는 공장을 지휘할 수 없다. 편집장은, 영화감독처럼 매순간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런 권한이 없으면 책을 마무리할 수 없다. 다른 점은, 한국에서 잡지라고 하면 ‘그까짓 잡지’ 그러는데, 미국에서는 잡지 편집장이 사회적인 명사다. 영향력도 대단하고.
잡지 중에 눈여겨보는 것들이 있나?
잡지의 레이아웃도 보지만 영향력 측면도 본다. <베네티 페어>라는 잡지가 있다. 한 사진가의 앵글 아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사?을 찍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잡지다. 그런 힘이 작열한다. 고급스러운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하고 영향력도 크다.
〈GQ〉의 에디터들에게 어떤 점을 강조하나?
비범한 사고체계. 일단 글을 잘 써야 한다. 아주 잘 써야 한다. 잘 못 쓴 기사가 있으면 견디질 못한다. 엄격하게 교정을 본다.
〈GQ〉에 지원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아는데. 〈GQ〉 에디터가 되고 싶다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나?
당신은 내가 찾는 마지막 조각이 아닙니다, 라고 말한다.
은퇴까지 꼭 해보고 싶은 기획이 있나?
은퇴는 권고사직이 되지 않을까. 그전에는 김정일도 인터뷰하고 싶다, 달라이 라마도 만나야지, 피델 카스트로도 죽기 전에 인터뷰해야 할 텐데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없어졌다. 잡지를 만드는 데 있어 내게 가장 부족하다고 여기는 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거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집에서 책 읽는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편집장 노릇이 좋다. 직접 연주하는 게 아니라 지휘만 하면 되니까. 일흔이 넘어서도 가능하다면 계속 잡지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