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연세대 이훈구 교수의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를 읽었다.
몇 차례나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감상感傷은 경계해야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연세대 이훈구 교수의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를 읽었다. 몇 차례나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감상感傷은 경계해야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의 일로 울어줄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다. 다 제 설움에 겨워 우는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 공감의 눈물이 터져 나온 개인적인 이유를 드러내기는 괴롭다. 어쨌든 이 책 읽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참 많을 것이다.
어느 봄날, 뉴스에 크게 오르내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소위 명문대생 부모 토막살해 사건. 살인의 경중에도 학벌이 작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멀쩡한 고려대 공대 재학생이 잠자는 부모를 차례차례 망치로 쳐 죽이고 10여 토막을 내서 시내 곳곳에 내다버린 사건은 엽기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이 사건 이전에 더 떠들썩했던 부친 살해범 박한상 사건도 있었고, 그밖에도 심심찮게 존속살해 사건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잔혹하고 동기가 불분명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교육심리학자 이훈구도 망연한 심정으로 TV 보도를 보고 있었다. 잠깐 화면에 살해범의 친형이 등장했다.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형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저는 동생을 이해할 수 있어요.”
순간 심리학자의 뇌리에 퍼뜩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저건 분명 뭔가가 있다.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 심리학자 이훈구는 마음속에 짚이는 바를 추적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앳된 얼굴의 부모 살해범 이은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건 직전까지 모두 21권의 방대한 일기를 남겨놓고 있었다. 인터넷 영화 동호회 회원이기도 한 그가 게시판에 올려놓은 영화평도 있었고, 검찰의 도움으로 각종 조서, 진술서도 열람할 수 있었다. 패륜아 동생을 이해한다고 말한, 그래서 한때 공범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했던 형도 만나보았고 가까운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도 들었다. 무엇보다 당사자 이은석과 구치소에서 몇 차례 특별 면담을 할 수가 있었고 편지 교환도 여러 차례 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이훈구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된다.
“이은석은 무죄다!”
이은석의 가정은 외형적으로 참 번듯했다.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의 어머니는 어릴 적 꿈이 퍼스트레이디였다고 밝힐 만큼 당차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중령으로 예편한 아버지는 장성의 꿈이 좌절된 대신 대기업 부장으로 특채되어 순탄한 사회생활을 해온 인물이었다. 교양과 일정한 경제력도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 물론 그 집의 둘째아들 은석은 별다른 말썽도 피우지 않았고 공부도 잘해 장래가 촉망되는 명문대생이다. 그런 가정의 그런 젊은이가 부모를, 그것도 토막살해를 벌이다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추리소설이나 범죄영화에 흔히 나오는 감춰진 집안의 비밀이라든가 하는 거창하고 특별한 내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은석의 가정은 사랑이 없는 가정이었다. 권위적인 아버지는 집에 돈만 벌어다 주면 제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야심만큼의 인생을 살지 못한 어머니는 온갖 짜증과 울화를 자식 둘을 들들 볶으며 풀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부부간에 사이가 무척 나빴다. 부부가 각방을 썼고 식사도 따로 하고 말도 나누지 않았다. 사랑 없는 가정에서 은석이는 가족 간의 신뢰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든 화초처럼 자라야 했다.
은석이 자신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그는 163센티미터라는 자신의 키와 용모에 굉장한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연애를 열망하면서도 자신에게 친절한 여성에게 적대적이고 무례하게 굴기 일쑤였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거였다. 중고교 시절에는 학급 친구들에게 왕따와 폭행을 당해왔고 군에 입대해서는 하급자에게조차 모욕을 당하는 신세였다. 그는 늘 세상이 비관스러웠고 할 수만 있으면 자살을 하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출구는 영화와 게임이었다. 특히 고교 졸업 후 총 5백 편, 평균 한 달에 19편의 영화를 보며 내부의 세계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 것이다.
사랑 없는 가정의 학대, 왕따, 영화나 게임 등 환상의 세계, 이것이 은석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반항도 할 줄 모르던 그가 어머니와 처음으로 크게 다투고 냉랭했던 여러 날이 지나간 끝에 저질러진 일이 부모 살인이었다. 시체를 토막 낼 생각은 하도 많은 영화에서 흔히 봤던 터라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이런 살인의 동기를 어떻게 이해?야 한다는 말인가.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는 은석이의 각종 일기나 문서 등 그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고, 대목마다 이훈구 교수가 분석과 설명을 다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전문가 분석이라고 특별히 관대한 것이 아니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연평균 3백 건 이상이나 자식에 의한 부모 살해사건이 발생하는데 상당수가 무죄방면된다고 한다. 학대에 의한 정당방위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은석이는 1심 사형에 이어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우리나라 법체계에서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형량이라고 한다.
학대받은 자식이 모두 부모를 살해하지는 않는다. 은석이가 받았다는 학대가 남다르게 심했던 것도 아니다. 은석이는 정말 악마의 심성을 타고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청년이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은석이의 행위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 주위에 그처럼 사랑 없는 가정, 그래서 마음속으로 수없이 은석이의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은석이 사건은 웬 미친놈의 일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도 아니라는 점이다.
책의 제목은 검찰에서 은석이가 했던 말이다. 그때, 그러니까 은석이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크게 항의했던 그때 단 한마디라도 ‘미안하다’고 말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그는 절규했다. 세상의 횡포한 부모들이여,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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