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에 어떤 책을 준비할까?
휴가철만 되면 시의적절한 책을 골라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딱히 휴가철에만 읽기 좋은 책이 따로 있을까? 하긴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미뤄두었던 독서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만도 하겠다.
휴가철만 되면 시의적절한 책을 골라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딱히 휴가철에만 읽기 좋은 책이 따로 있을까? 하긴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미뤄두었던 독서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만도 하겠다. 평소 독서를 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이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자, 한번 길찾기를 해볼까?
휴가철 독서 1
청소년 시기에 한 번쯤은 읽었어야 마땅한 4천만의 고전 중에서 놓쳤던 작품을 몇 편 읽는 방법. 누구나 제목과 기본적인 줄거리는 다 아는 작품들, 그러나 어쩌다가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평생 읽지 못하게 되는 작품들, 그런 책들이 의외로 많다. 미국의 어떤 언론사가 유수한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유명한 고전 명단을 내놓고 읽지 못한 책을 체크해보라 했더니 정말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못 읽은 고전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사정은 누구나 비슷한 모양이다.
아무런 자료 없이 기억 속에 살아나는 ‘감동의 명작’을 떠올려본다. 제일 먼저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떠오른다. 고교 시절에 읽었건만 유태인 의사 라비크, 그의 애인 조앙 마두, 그들이 즐겨 가던 클럽 세헤라자드, 그들이 건배할 때 나누던 말 살뤼뜨, 그들이 즐겨 마시던 술 칼바도스 등등이 줄줄이 생각난다. 그걸 읽으며 연애라는 게 하고 싶어 한없이 설레던 그 여리고 어렸던 가슴(사실 비극적인 시대상황은 이해할 수도,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연애소설로만 읽었다.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샤로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백치』,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 한이 없겠네. 하여간 이렇듯 백만 인의 고전에 속하는 작품 중에 놓친 것 몇 편을 골라 푹 빠지면 분명 기억에 남는 휴가가 되리라.
ps: 문학작품만 언급했지만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파울 프리샤우어의 『세계풍속사』,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철학의 즐거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조동일의 『우리 문학과의 만남』, 박이문의 『하나만의 선택』 같은 책들은 의외로 재미있게 읽힐뿐더러 상당한 감동을 안겨준다. 소설 두 권, 비소설 한 권쯤으로 안배를 해도 좋을 듯하다.
휴가철 독서 2
당대의 정신적인 흐름을 타고 있는, 다시 말해 현재 크게 각광받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두루 읽는 책은 읽어두는 게 좋다. 그런 책은 시기를 놓치면 다시 읽기 싱거워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런 정신적 맥락을 섭취한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꽤 벌어진다. 가령,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이 한창 유행하여 길거리 리어카에서조차 팔리고 있을 때 어쩌다 읽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토플러 이전에 허만 칸이라는 미래학자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곤 했는데 어쩐지 그런 동네는 점쟁이 비슷한 사이비들의 혹세무민이라고 우습게 봤던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던가. 문명의 대전환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고 뒤늦게 그것의 맥락을 알고자 허둥지둥 생고생을 해야 했다.
어떤 책들이 당대의 정신적 맥락 운운에 적합한 것일까. 우선은 세계화에 관한 책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그것의 비판서인 에릭 홉스봄의 『노동의 세기』,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허울뿐인 세계화』 등등이 있겠다. 사람 사는 방법에 관한 책으로는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2,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등을 권하고 싶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피터 드러커의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 같은 책들도 현대의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데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역저이다. 철학적 기류로는 최고의 ‘인기인’ 들뢰즈를 비롯해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의 저작들을 찾아 읽는 게 좋을 듯하고, 겸해서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도 읽어둘 만한 책이다.
휴가철 독서 3
휴가가 재충전의 의미라면 독서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에너지를 얻는 일은 권장할 만하다. 그런 용도로는 단연 인물평전류가 좋다. 자서전?전기?평전에 의외로 좋은 책들이 즐비하며 선택의 폭도 꽤 넓다. 대단한 인물의 생애를 접할 때 기가 죽어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람을 본다. 나는 그런 말 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존경심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평전의 대상이 되는 존재, 가령 마르크스나 슈바이처 박사 같은 사람에게 경쟁의식을 갖는다는 얘긴데, 우와 놀라워라. 그것도 상당한 경지다.
한 인물의 평전은 아니지만 모택동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다룬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이 우선 떠오른다. 예전에 그 책을 다 읽고 진짜 아침이 밝아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베스트셀러가 됐던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은 실상 그리 좋은 책이 아니다. 인물이 대단한 거야 틀림없지만 저자의 글이 좀 서툴기 때문이다. 하여간 트로츠키, 레닌, 모택동, 등소평 같은 러시아, 중국 혁명기의 지도적 인물들의 전기가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 현실 사회주의가 궤멸된 시점이라 그 같은 이상주의적 혁명가들의 꿈과 투쟁이 아프게 되새겨지기 때문이다. 그 원조 격으로 새로 번역돼 나온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도 별 넷은 되는 책.
휴가철 독서물로 인물평전류를 거론하고 있는 중인데, 이리저리 헤맬 것 없이 아주 간단히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한길사가 내는 인물평전 ‘한길로로로’ 시리즈를 섭렵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한 50여 권 나왔는데 대상이 다채롭고 내용도 충실한 편이다. 읽고 좋은 기억이 남았던 것으로는 오토 슈바이처의 『파솔리니』, 베르너 발트만의 『버지니아 울프』, 얀코 라브린의 『도스토예프스키』, 에버렛 헬름의 『차이코프스키』 등이 있다.
그밖에 얼마 전 작고한 앤서니 퀸의 생애를 다룬 대니얼 페이스너의 『원 맨 탱고』, 어빙 스톤의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도 꽤 내용이 충실하다. 여성들이라면 시몬느 뻬트르망의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 데어드르 베어의 『시몬 드 보부아르 : 보부아르 전기』,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부인의 자서전 『다니엘 미테랑』 등에서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겠다. 괴이한 인물로는 모리스 르베가 지은 3권짜리 전기 『사드』가 흥미롭다. 『사드』는 초반부가 매우 지겨운데 그 고비만 넘기면 술술 읽힌다.
휴가철 독서 4
앞에서 거론한 고전물, 유행서적, 인물평전 등은 모두가 실용적인 목적을 배제한, 즐거움을 위한 독서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 반면에 휴가철 한 시기를 이용해서 특정 분야를 섭렵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힘이 남아돌아서 그런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사실은 꽤 영양가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부족한 어학공부에 집중 투자할 수도 있고 회사원이라면 경영이론 또는 재테크 비법에 몰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혹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문학이론서를 쌓아놓고 씨름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공자로서 그것만은 절대 말리고 싶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는 이론서를 보면 구체적인 효용이 생기는 반면에 문학이론서는 작품을 읽거나 습작을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쓸데없는 비평 용어에 대한 상식만 늘어 작품의 감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씨네 21》을 지나치게 애독한 사람들이 얼치기 영화평론가화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집중 독서의 관심분야야 사람마다 구구 각각일 터이니 하나의 사례로서 나 자신의 계획을 소개해본다. 어찌 된 까닭인지 나는 이른바 프릭freak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상한 것, 비정상적인 것, 변태적인 것에 끌리거나 매혹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서구나 일본에는 그토록 흔하다는 프릭에 대한 자료를 한국말로 접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드나 조르주 바타유 소설의 번역물, 파솔리니나 스탠리 큐브릭의 일부 영화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인터넷 변태 사이트를 찾아가봐야 죄다 변형된 포르노물이라 지겹고 역겹기 그지없다. 프릭의 세계란 신학에 방불하는 인간학의 한 경지라고 여겨지건만. 이 여름에 아예 프릭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세 권의 책을 쌓아놓았다. 게르트 호르스트 슈마허의 『기형의 역사』, 제프리 버튼 러셀의 『마녀의 문화사』, 조르주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이 그것이다. 이들 책이 그 분야의 대표성을 지닐 만한 역저인지 나는 모른다. 이럴 때는 무조건 읽는 수밖에 없다. 읽다 보면 어떻게 길을 찾아나갈지가 보이는 법이니까.
지금 절반쯤 읽은 『기형의 역사』는 의사가 쓴 책이라 문화적인 구라가 주는 재미는 전혀 없지만 매우 신뢰가 간다. 전편이 구체적인 사례의 나열. 의미부여와 상상력은 독자의 몫이다. 『마녀의 문화사』는 같은 저자 제프리 버튼 러셀의 『악마의 문화사』와 병행해 읽어야 할 것 같은데 뛰어난 책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반드시 독파하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저주의 몫』은 읽기에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래전 조르주 바타유의 다른 명저 『에로티즘』을 붙들고 꽤나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을 쓸 때는 초특급으로 읽히는 문장력의 소유자가 철학적 저술에서는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까닭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여간 프릭에 대한 공부를 통해 보편적인 한국인의 심성을 파악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
너무 많은 저서를 거론한 것 같다. 네 파트로 나누어서 언급한 책들은 같은 분야에서 이념적으로 상반된 것들도 있고 더 뛰어난 명저를 지나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독서 체험의 산물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휴가 중에 독서 따위는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작가 최인호가 20년 만에 펴낸 중단편 모음집 『달콤한 인생』이 그것이다. 새로운 소설이 이것저것 꽤 있는데 왜 그중에 최인호인가?
나는 최인호에게 감동 먹는 사람이다. 나도 남들처럼 초기작 「술꾼」이나 「견습환자」 같은 작품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이어지는 『별들의 고향』이나 「바보들의 행진」『내 마음의 풍차』 따위에서 실망을 금치 못했던 독자의 하나였다. 그때부터 그의 존재는 비평의 대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 변신을 시도해왔다. 때론 역사로 때론 종교로 혹은 막막한 자아의 방황으로. 그 궤적이 이번 작품집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첫 작품 「이별 없는 이별」은 별다른 소설적 가감 없이 별세한 작가 큰누나의 행적을 자전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산문山門」은 천도제를 지내는 불가의 세계를, 「달콤한 인생」은 악마와 천사의 내기에 걸린 한 인물의 기박한 인생유전을, 「몽유도원도」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설화를 평역한 고전물이다. 아울러 1980년대 초반에 쓴 「깊고 푸른 밤」「이상한 사람들」이 담겨 있다.
일일이 개별 작품을 거론한 까닭이 있다.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전체를 통해 한 작가의 인생이 느껴진다. 소설의 안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기를 반복하게 되는 작품집이다. 최인호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읽는 이를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슬프거나 괴로운 이야기를 해도 독자는 편안해진다. 작가의 눈높이가 평범한 독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휴가철에 책 따위는 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라도 한 권은 읽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면 바로 이 책 『달콤한 인생』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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