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안정효 역
이 소설은 마르케스가 노벨문학상을 타기 훨씬 전에, 이어령 선생이 경영하던 월간 『문학사상』에 번역 연재되던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쓱 보고는 덮었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리고 1982년에 한 번 더 읽으려다 실패했어요.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소감을 적어 내라는 과제가 떨어진 거예요. 저는 복학생이었죠. 열심히 읽으려고 했으나 낯설고 정신 없어서 반밖에 읽지 않고 대충 과제물을 제출했습니다. 제대로 읽은 게 등단 직후였어요. 그때 저는 부천시 역곡동에서 광화문까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출퇴근 때의 1호선 전철은 콩나물시루였죠. 이 책이 있어서 콩나물이 되는 줄 몰랐고 콩나물이 되어도 좋았습니다. 『인생론』 이후 오랜만에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던 것 같아요. 안정효 선생이 영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거니까 중역이었죠. 스페인어-영어-한국어.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사정없이 사로잡혔던 이유를 저는 안정효 선생의 훌륭한 번역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신기 혹은 한없이 멋들어진 귀기라고 생각했어요. 소설 안목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 같아 많이 뿌듯했고, 이후로 미친 듯 마르케스를 읽었고, 저도 모르게 마르케스 풍의 소설을 몇 편 연달아 썼고, 당시 한창 유행이던 인터넷 통신의 첫 등록 아이디로 MARQUEZ를 썼습니다. 그때를 행복하고 아름답던 시절로 기억하게 하는 책이죠.
노자 저/오강남 풀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아마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도덕경』도 그 중 하나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이니, 그래서 중복될 터이니 피해가자, 이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책을 ‘타나토스의 빛나는 효용’이라고 불러요. 다들 잘 살고 잘 먹고 떵떵거리려고 매진하다가 보면 지레 스트레스로 숨 넘어가기 십상이지요. 그러기 전에 미리 죽어버리면 어떨까 싶어요. 내 안의 욕망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살기 위해서죠. 이런 얘기를 그럴싸하게 해줄 그럴싸한 스승이 노자 아닐까요. 번역자에 따라 그 스승이 그 스승이 아닐 수도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여러 번역본을 틈틈이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노자가 하나가 아니겠네요. 그것도 괜찮네요.
토머스 핀천 저/김성곤 역
김성곤 선생이 1986년에 번역한 이 소설을 읽었죠. 저는 1987년에 단편으로 등단했는데 그때 이미 장편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이 소설의 충격으로. 그렇게 나온 것이 제 첫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이었고, 뒤 이어 제 평생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두 권짜리 『비밀의 문』이 출간되었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제 두 장편소설에 각각 등장하는 ‘나림의 무리’와 ‘비밀회좌 집단’은 모두 이 작품의 ‘지하 우편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약음기가 달린 나팔’ 그림을 본 따서 저도 소설 속에 버섯 모양의 비표(秘標)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장편소설 『악당 임꺽정』과 『랩소디 인 베를린』, 그리고 최근의 『동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제 소설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끝없는 방법론적 부정이 시도된다면, 그 영향은 단연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온 것입니다. ‘트리스테로’라는, 핀천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설적 탐색에 동의하는 것으로써 저의 방법론적 부정은 정당화됩니다.
가라타니 고진 저/박유하 역
속표지에다 제가 ‘놀라운 책’이라고 흘림체로 적어놓은 걸 얼마 전에 봤어요. ‘놀랍기까지야.’라고 중얼거렸지만 첫 독서 때는 많이 놀랐나 봐요. 저는 이 책을 일본에 관한 책도 아니고 문학에 관한 책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이 좀 이상하다면, 이 책은 일본에 관한 책만도 문학에 관한 책만도 아니라고 고쳐 말하지요. 이것저것 다 빼니까 ‘근대’만 남네요. 저는 이 책을 ‘근대성’을 아는 입문서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근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근대를 알면 전근대와 후근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근대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책은 많지만 한 나라의 문학연구를 통해 근대성의 핵심을 찌르는 책은 저에겐 이것이 여전히 최고가 아닌가 싶네요. 근대를 아는 일은 다른 말로 하면(제 방식으로 말하면) 인간을 아는 일이기도 하지요.
박솔뫼 저
1985년생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이며 등단 소설입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놀랐고 행복했고 부러웠고 겁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 온 소설작법을 송두리째 흔들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이전부터 조금씩 흔들려 왔고, 그 균열과 진동이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이 소설이 미적거리는 저를 꽝 쳤습니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네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가야겠습니다. 이유를 모르는데도 놀라고 행복하고 부럽고 겁이 난다는 게 신기합니다. 신기해서 또 읽습니다.
쇼펜하우어 저/김재혁 역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계기는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죠. 교회 다니는 친구가 성경을 읽듯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어요. 철학가의 책 치고는 쉬웠기 때문이기도 했겠죠. 흔히 그를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좀 부정적으로 말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그의 염세의 언어와 논리가 매우 통쾌했어요. 그리고 곧 그의 철학이 염세도 뭣도 아닌, 다만 세상을 정확히 꿰뚫어보자는 노력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하여튼 고2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한 권의 책을 외우다시피 읽다 보니 그의 언어와 태도가 제 안에 오롯이 들어앉았겠지요. 세상을 곱게 보지 않는 버릇이 그때 생긴 걸까요? 아닐 거예요. 원래 그런 기질이 제 안에 가득했는데 쇼펜하우어를 만났을 뿐이겠지요. 세상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이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버텨나가는 한 방법이라는 걸 그를 통해 알게 되었고, 나중에 니체를 반갑게 받아들였던 것도 그의 독서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저에게 염세와 허무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힘을 주어요.
<토리노의 말>을 보고 다시 보기 시작한 게 왕가위의 영화들이지요. <중경삼림>,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한결같이 사랑 얘기 같지만 ‘만날 수 없다’는 얘기들이더군요. 사람이든 일이든 뜻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만나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만날 수 없는(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례를 끝없이 보여줌으로서 왕가위는 감각세계의 질서에 매이거나 속거나 머물지 않으려 하네요. 영화를 보면서 저도 <화양연화>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 한편을 썼습니다.
Turin Horse (토리노의 말) (한글무자막)(Blu-ray) (2012)
Janos Derzsi,Erika Bok
최근에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를 연이어 세 편 봤어요. <토리노의 말>,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사탄 탱고>에요. 선택이 아니라 우연히 <토리노의 말>을 보게 되었죠. 그리곤 쉬지 않고 두 편을 더 봤는데 <사탄 탱고>는 7시간 25분짜리 영화에요. 전부 흑백영화고 느리고 긴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영화인데 그걸 열심히 본 이유는, 감각과 언어뿐만 아니라 속도(시간)라는 것도 우리를 속이는구나 싶었어요. 익숙한 속도, 기대 속도 혹은 허리우드 식 속도를 배반하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보지 못했던) 것들이 마구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감각세계를 넘어서는 한 방법을 본 거죠. 시간과 감각세계와의 상관관계.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을 어서 구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었어요.
구효서 작가 “소설도 커피 같아요. 쓰더라도 맛을 보면” 여덟 번째 소설집 『별명의 달인』 펴내 작가라는 직업이 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끝없이 별명을 짓는 사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