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사람] 이진, 편집자라는 성실한 세계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책이라는 게 한 권을 끝내면 계속 다른 주제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2021.01.06)
16년차 편집자 이진은 푸른숲에서 처음 출판 일을 시작해 현재는 사계절출판사에서 인문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은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반응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한 달여 만에 5쇄를 찍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 책의 마케터는 벌써 올해 어린이날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후문. 이진 편집자는 좋은 책을 만들고, 그 책을 아껴주는 독자들의 사랑을 느낄 때 책 만드는 보람을 느낀다.
“동료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아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작업을 하고 좋은 시너지가 날 때, 행복감을 느껴요. 『어린이라는 세계』가 나오고 김소영 작가님이 출판사에 방문하셨는데, 직원들이 자기가 산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오더라고요. 우리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니까 책을 그냥 받을 수 있는데도 응원해주고 싶어서, 굿즈를 받고 싶어서 산 거예요. 뿌듯하고 고마웠어요.”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이진은 공기업에 취직했다가 1년만에 퇴사 후 출판사에 취직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상사들을 보았을 때, 스스로가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20년을 어떻게 살지?’ 고민 끝에 보게 된 출판사 공고. 서평을 내고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은 ‘과연 이 사람이 출판사에 들어올 것인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어필했고 합격했다.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집안에 분란을 좀 일으키고 출판사에 들어갔죠. (웃음) 학창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도서 대여점 맨 윗칸에 있던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세계문학 문고본을 한 권씩 빌려보곤 했어요. 그때는 청소년 논픽션 같은 책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편집자’라는 직업은 대학교 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됐어요. 도서관에 자주 가고 책을 열심히 읽는 편이었는데 진로를 고민하던 무렵 ‘책은 누가 만들지?’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님이 쓰신 『편집자 분투기』를 읽는데 저자와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푸른숲에 인문 담당 편집자로 들어가서 처음 받은 원고는 독일 심리학 책이었다. 마음속 내면의 아이를 이야기하는 책이었는데 내용 자체에 공감이 안 됐다. 그래서 당시 팀장에게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 책은 출판되지 않았다. 신입 편집자의 의견을 받아들인 출판사는 그에게 두 번째 책으로 『여성 철학자』의 편집을 권했다. 2005년에 출간된 마르트 룰만의 책이 이진 편집자가 만든 첫 번째 책이다.
“출간된 책을 받았을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뿌듯했어요. 제가 되게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뭔가 세상에 없었던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이라는 게 한 권을 끝내면 계속 다른 주제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 만나고 싶은 저자는 분명한 자기 생각, 남다른 경험, 고유한 세계가 있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진솔하게 잘 풀어내는 사람이다. 출판 제안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주제가 단행본의 형태로 다루어진 적이 있는가’,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의미나 재미를 줄 수 있는가’, ‘저자의 글뿐만 아니라 삶 전반이 나 그리고 내가 일하는 회사의 지향과 어울리는가’이다.
작업했던 각별한 여러 책 중 하나는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오랫동안 일을 쉬다가 새로 일하게 된 출판사에서 야심을 갖고 추진한 기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자의 삶에도 편집자의 경력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줬다.
“사계절출판사에 오기 전에 출산과 육아로 인해 3년 4개월을 쉬었어요. 경력에 공백이 있다 보니 아는 저자도 몇 없었고 이 일을 다시 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에 같이 일했던 저자들 가운데 가장 좋은 글을 쓰던 김원영 변호사님을 찾아가자! 했는데, 다행히 그가 여전히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던 덕분에 두 번째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었어요.”
가장 최근에 편집한 『어린이라는 세계』 역시 이진 편집자에게 각별한 책이다. 김소영 작가가 게스트로 출연하는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을 즐겨 듣다가 조심스럽게 어린이에 관한 책을 제안했다. 김소영 작가는 “우선 블로그에 글을 써볼 테니 천천히 봐달라”고 했고 초고를 완성한 후에야 정식 계약서를 썼다. 원고가 너무 좋아서 달뜬 기분으로 작업한 책 중 한 권이다.
편집자로 가장 뿌듯할 때는 저자, 번역자는 물론이고 팀 동료들, 디자이너, 마케터 등 같이 일한 여러 파트너들이 결과물에 만족하고 함께 좋아해줄 때다. 독자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만족감, 즐거움이 이진 편집자에게는 우선이다. 편집자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면, 책임감과 유연함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잖아요. 전체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도 편집자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편집자는 원고 작업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책임지고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요구, 사정, 일정, 비용 등을 고려하며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고요. 저는 ‘절대 안 돼!’가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저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업 중간에 생긴 여러 변화를 그때그때 공유해주는 것이다. 글의 내용이나 형식, 생각, 일정 등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편집자에게 알려야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미리미리 공유해주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력과 책임감을 잃지 않는 일은 편집자는 물론 저자에게도 꼭 필요하다.
“저는 기획을 엄청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교정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지도 않아요. 노력하는 건, 작업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는 거예요. 저자의 뜻을 최대한 반영해서 만족스러운 작업이 되도록 하고, 서로 호감을 만들어 다음 작업까지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해요. 저는 교정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교, 6교까지 봐요. 교정은 많이 볼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출판사 상황에 따라 빨리 출간해야 하는 경우에는 여유가 없겠지만, 교정을 계속 보다 보면 사소한 오류가 많이 나와요. 세 번 볼 때랑 다섯 번 볼 때는 확실히 다르거든요. 한 번 더 보면 표현도 좋아지고요.”
올해는 이진 편집자가 저자로 데뷔하는 해이기도 하다. 곧 유유출판사에서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이 출간된다.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전 과정을 소개하는 책인데, 다 쓰고 보니 ‘협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책이 됐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용감하게 일을 추진해가는 편이 못 되어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의견을 물으며 방향을 찾아가거든요. 그런 면에서 출판이 가진 ‘협업’이라는 속성이 제게 잘 맞는 것 같아요. 편집자는 원고만 보는 사람이 아니고,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결국 마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디자이너와도 잘 소통해야 하고, 가끔은 저자의 심리상담을 하기도 해야 하고요. 저자가 바라는 것을 위해 출판사 대표님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도 있죠.”
2019년 11월에 이진 편집자가 작업한 『아이들의 계급 투쟁』은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가 영국 최악의 빈곤 지역 무료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가난이 낳은 혐오와 차별이 아이들의 일상을 어떻게 침식하는지를 담아낸 책이다. 처음에는 기획이 통과가 안 됐지만 몇 달 동안 포기가 안 됐다. 다시 회사를 설득했고 출간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제가 스물 여섯살 때 함께 작업했던 저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저에게 ‘선생님, 제가 나이 오십에 교수가 됐어요’라고 연락을 주신 거예요. 제가 2년차 편집자였을 때, 그분은 강사셨거든요. 그 이후에 연락이 거의 못 닿았는데, 오랜만에 전화를 하셔서 최근에 있었던 좋은 일들을 전해주셨어요. 이럴 때 참 반갑고 뿌듯해요. 그래도 제가 아직 책을 만들고 있으니, 닿을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은 김원영 변호사와 김초엽 소설가가 <시사인>에 연재했던 『사이보그가 되다』. 김원영 변호사가 칼럼을 기획했고 이진 편집자에게 단행본 작업을 함께 하자고 했다. 새로운 저자를 계속 만나는 일도 좋지만, 지금껏 함께 작업했던 저자들과 더 깊게 교류하면서 후속작을 꾸준히 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업 과정에서 충분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동안은 저희 집 아이들이 ‘어린이’인 시기에 어린이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어린이라는 세계』를 만들면서 이룬 것 같고요. 그다음으로는 ‘꼭’이라기보다는 ‘언젠가 한 번쯤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제가 대학에서 전공한 ‘인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론서일 수도 있고, 현장 연구에 바탕을 둔 에세이나 교양서일 수도 있고요. 전공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관점 같은 걸 상당 부분 형성해주었기 때문에 보답하는 마음이랄까요?”
출판사에 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출판사의 출간 목록, 특히 최근 목록을 확인한 뒤에 원고를 보내달라고 조언한다. 출판사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책이라야 채택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일했던 선배들이 독립해서 자신들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출간하는 모습을 보면되게 좋아 보여요. 저는 출판사를 운영할 자신은 없고,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 작업하고, 못하게 되면 독자로 남고 싶어요.”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스스로 책을 고르는 수고로움을 즐겨보자는 것. 베스트셀러 순위나 단체에서 발표하는 추천목록, 선정목록 등에 포함되지 않은 책 중에도 좋은 책이 정말 많다.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을 갈고닦아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저자는 수년 만에 책을 쓰는 탓에 내내 자신 없어 했고, 나는 잘될 거라고 회사에 장담을 한 터라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을 가라앉힐 만큼 좋은 원고가 들어왔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저자 스스로 매주 마감을 지키며 독자를 만들고, 지면을 얻고,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인생극장』 노명우 지음
시간이 흐르며 사라져가는 것들, 잊거나 잃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 부모가 남긴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그 세대의 삶을 복원해보려는 저자의 노력에 보탬이 될 수 있어 좋았다.
『영화하는 여자들』 주진숙 외 지음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성실하게 임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일을 돌아보게 되었다. 편집에 관한 책을 쓰자는 제안이나 이 인터뷰에 응한 것도 어쩌면 이 책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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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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