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민담 속 주인공들은 왜 행복할까?”
『민담형 인간』 신동흔 저자 인터뷰
이야기판의 꽃이 설화라면 민담은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민담은 그 자체로 재미있습니다. (2020.06.03)
전 세계 어디든 신화와 전설에선 비범한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민담은,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보통 이하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민담은 신화나 전설, 소설과 어떤 점이 다를까? 왜 다른 것일까? 30여 년 동안 구비설화를 연구한 신동흔 교수는 한국, 러시아, 터키, 독일 등 동서양 각지의 민담을 읽으면서, 민담 속 주인공들에게 특별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신동흔 저자는 민담형 인간이 "뒤에 몰래 딴마음을 감춰두지 않으며"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 '펭수'나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 <톰과 제리>의 '제리'가 전형적인 민담형 캐릭터이다. 저자는 오늘날 민담형 캐릭터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무기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담형 인간』은 민담에 대한 오랜 관심과 집요한 연구로 뒷받침된 책이다. 신동흔 저자에게 민담의 어떤 점에 이끌렸는지, 민담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는지 등을 물었다.
오늘날 도시에서 자란 많은 사람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비설화는 낯선 이야기로 여겨질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구비설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 책의 포인트가 ‘소설형 인간에서 민담형 인간으로’인데, 실은 저도 그런 삶의 과정을 거쳤어요.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절에 현대문학을 공부하려 했었고 소설과 비평에 관심을 뒀었지요. 연구자 겸 비평가…. 그런데 그 삶이 회의가 드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할 일인데 거기 이름 하나 보태서 뭐 하나, 이런 회의였지요. 현대소설과 비평이 회색빛으로 좀 우울하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에 구비문학을 만났지요. 설화나 민요 같은 것도 문학일 수 있다는 건 충격이었어요. 어린 시절 등잔불 켜고 듣던 도깨비 이야기랑 꾀쟁이 하인 이야기가 떠오르고, 대학교 초년 시절에 처음 갔던 학술 답사에서 노인한테 전설을 듣던 때의 벅찬 충만감이 되살아났어요. ‘내 할 일은 이거다. 녹음기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거야!’ 이렇게 마음먹었지요. 제가 인생에서 한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같은 구비설화인 신화, 전설과 비교해서, 특별히 민담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민담의 어떤 점에 이끌리셨는지요?
이야기판의 꽃이 설화라면 민담은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민담은 그 자체로 재미있습니다. 마음껏 상상을 펼쳐내는 이야기가 민담인데, 현실의 이해관계나 잡념에서 훌쩍 벗어나는 해방감을 전해 주지요. 주인공이 극적 반전을 통해 해피엔딩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그럼에도 민담은 신화나 전설에 비해 현실성이나 합리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상상을 통한 대리만족 같은 거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렇지가 않아요. 요즘 저는 “민담은 과학이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구비전승의 과학이고 상상력의 과학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 안 돼 보이는데 이면적 논리를 살펴보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주인공의 해피엔딩도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더군요. 행복해질 만한 무언가가 거기 있었던 거예요.
민담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하고 비슷합니다. 찾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고, 뭔가 단서를 발견해서 보물을 찾아낼 때의 희열은 더할 나위가 없지요. 많은 분들이 그 즐거움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 민담이랑 친해지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민담형 인간』에는 한국, 러시아, 독일, 터키 등 동서양 민담 서른한 편이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이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민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이유도 함께 설명해주세요.
우와, 이거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세계의 수많은 민담은 제각기 독특한 매력이 넘쳐서 무얼 하나 딱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신화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바리데기’를 첫손에 꼽는데 민담은 훨씬 어렵군요…) 어릴 때 강한 충격으로 마음에 들어앉은 <장화 신은 고양이>가 생각나고, 퇴물들이 펼쳐내는 멋진 반전이 일품인 <브레멘 음악대>도 떠오르고, 캐릭터가 다른 두 민담형 인간의 어울림이 흥미로운 <차복과 석숭>도 떠오릅니다. 아, <보리밥 장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제가 어려서부터 밥을 워낙 좋아하고 많이 먹었던 터라서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아요. 터키의 장편 민담 <황금 나이팅게일> 같은 작품도 정말 매력적이지요. 세상의 어떤 장편소설하고 비교해도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기상천외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도 무척 좋아하는데, 러시아 민담 <얼간이 에밀리아>에 그런 화소가 가득이라서 완전 매력적이에요. 영국 민담 <몰리 후피>에서 어린 소녀 몰리가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인을 갖고 노는 것도 놀라움 자체지요. 뭐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100개로도 모자랄 것 같네요. 민담의 매력에 한 번 빠져들고 나면 벗어나기가 어렵지요. (웃음)
‘소설형 인간’과 ‘민담형 인간’의 대비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소설형 인간'을 "행동할 줄 모른 채 생각에 갇혀 고뇌하고 통곡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소설형 인간과 민담형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소설형 인간’의 특성은 제가 잘 알지요. 왜냐하면 제가 전형적인 소설형 인간이었거든요. 이 책에서 소설형 인간을 마구 공격한 것도 일종의 자기반성과 자기 변신의 주문(呪文)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소설형 인간과 민담형 인간의 차이를 딱 하나만 말한다면 ‘생각과 행동의 일치 여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소설형 인간은 생각은 많으나 그것이 행동과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우울과 자괴감에 빠지곤 하지요. 민담형 인간은 생각과 행동이 시차와 낙차 없이 일치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바로바로 행동에 옮겨서 미련이나 후회를 남기지 않지요. 저는 민담형 인간을 일컬어서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본능적일 정도로 거침없는 행동파가 민담형 인간이지요.
사실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캐릭터에는 ‘신화형 인간’도 있는데, 신화형 인간은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쪽이에요. 결연한 비장함이 특징이지요. 이에 비하면 민담형 인간은 몸이 가벼워요. 그냥 ‘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런 ‘가벼움’과 ‘자유’ 또한 민담형 인간의 핵심 자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화형 인간 외에 소설형 인간에게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요소지요.
한국의 민담 여러 편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한국 민담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 있을까요?
이 책에 실린 한국 민담을 보면서 독자들께서 다른 나라 민담에 비해 ‘아주 생생하다’고 느끼실 거라고 생각해요. 다 구술 현장에서 길어 올린 자료거든요. 날것 상태의 구술 민담 자료를 한국만큼 풍부하게 자료화한 나라는 세계에서도 드뭅니다. 한두 세대 뒤에 한국 구비설화 자료가 ‘K-Story’로서 세계적인 자산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내용상의 특징으로 본다면, 한국 민담에서는 ‘가족’이 중시되고 ‘윤리’가 주요한 화두가 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실 문화의 무의식적인 반영이겠지요. 다만 그 화두는 민담에서 ‘가족을 지키고 윤리를 실천한다’는 쪽으로만 서사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족으로부터의 독립’과 ‘윤리로부터의 자유’가 주제적 의미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요. 가족윤리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원형적 가치를 지키고 생산해온 담론이 민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고 원초적 지향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념’으로 가히 억누를 수 없는 게 민담적 상상입니다.
왜 지금 시점에서 ‘민담형 인간’이라는 화두를 들고나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민담형 인간’은 사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두고 책에서도 종종 언급했던 화두예요. 요즘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흐름이 강한데, 그런 시세에 발맞춰서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민담이 하루아침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최소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흘러온 이야기지요. 그 속에 담겨 있는 원형적 인간상을 찾아내서 부각하고 싶었습니다. 시대나 지역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망과 철학 같은 것을요.
제가 책에서 21세기를 ‘민담의 시대’로 칭했는데, “드디어 기회는 왔다”라는 쪽이라기보다 “결국 오게 될 것이 이제야 왔다”는 쪽입니다. 20세기 동안 사람들이 민담적 상상과 삶의 방식을 도외시한 채 합리적 사고와 현실적 이해관계 등에 갇혀서 산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물론 현실이 더없이 중요하고 합리적 지성이 긴요하지만, 삶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러시아 민담 <지성과 행운>을 빌려서 말하면, 지성과 행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요. 현실과 꿈, 또는 이성과 직관의 조화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양식으로 치면 소설과 민담의 조화가 되겠지요. 그런 상생적 조화를 통해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에 기여하고자 하는 한 인문학자의 꿈이 이 책에 담겨 있다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민담형 인간』 이전에 『살아있는 한국 신화』, 『스토리텔링 원론』 등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이렇게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앞으로의 목표도 들려주세요.
이 질문은 조금 민망한데요, 사실은 이미 또 다른 책들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해설을 곁들인 구비전설 모음집을 곧 출간할 예정이고, 자기서사와 치유를 화두로 한 세계민담 에세이도 원고를 마무리해 가고 있어요. 이주민 구술설화 자료집도 출간 예정이고요. 이거 너무 많이 책을 내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설화에 대한 책을 이리저리 많이 쓸 수 있는 원동력은 명확합니다. 설화 안에 무한한 힘과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도 다시 보면 숨겨져 있던 의미가 새롭게 나타나곤 하지요. 그런 이야기가 세계에 무궁무진하니 쓸 거리가 많을 수밖에요. 앞에서 민담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보물찾기’ 같다고 했는데, 귀한 보물이 화수분처럼 쏙쏙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음을 잡아끄니 벗어날 수가 없지요. 행복한 사로잡힘입니다.
참고로, 앞으로 지금까지 낸 것보다 더 많은 책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녀와 나무꾼> 같은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될 만한 내용이 넘쳐나지요. 그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내서 펼쳐내는 글쓰기를 구상 중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저의 오랜 꿈인 ‘창작’에도 뛰어들 생각입니다. 이왕이면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로요. 아니, 오랜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숨은 장르’일 수도 있겠네요.
찾아주시는 분이 없더라도 그냥 하려고요. 그게 저의 자유이고 행복이니까요! 감사합니다.
* 신동흔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충남 당진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등잔불 밑에서 부친의 옛이야기와 징용 체험담을 들으며 자랐다. 민담, 신화, 전설 등 구비문학을 만난 뒤 평생의 반려로 삼았으며, 원형이 살아 있는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고 풀어내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설화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구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문학치료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야기와 문학적 삶』(2009),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2012), 『살아있는 한국 신화』(2014),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2014), 『우리 신화 상상 여행』(2017), 『스토리텔링 원론』(2018) 등이 있고 『세계 민담 전집 1: 한국 편』(2003)과 『국어시간에 설화읽기』(전2권, 2016) 등을 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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