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특집] 천재가 아닌 만화가의 일상
<월간 채널예스> 9월호 특집
이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학교 수업과 만화 연재를 병행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만화를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2017.09.06)
오랜만에 실시간 음원 차트 top100을 재생시킨다. 어쩌다가 마음에 드는 노래를 발견하면 어떤 안도감이 느껴진다. 아직 감성이 살아있구나, 이것은 대중을 상대하는 만화가로서 시대의 감성에 반응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증해보는 나만의 의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반복재생 하면서 추억 속에 매몰되는 것은 오히려 경계하는 편이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는 음악이나 작품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천재들의 몫이고,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대중의 감성을 리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감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과연 나는 언제까지 대중을 상대로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오늘은 마감 전날이다. 일주일 가장 바쁜 날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업무가 많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강의계획서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학기에는 새로운 수업을 하나 맡았는데 강의준비가 걱정이다. 하지만 일단 원고마감부터 하자. 현재까지는 어시(어시스턴트 준말)가 원고의 밑색까지 완성한 상태, 이제 차분히 앉아서 배경을 앉히고, 명암을 입혀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사, 대사를 다듬어야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공정을 건너뛸 순 없다. 내가 쓴 대사를 내가 직접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하듯 육성으로 읽어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컷 속에 인물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대사와 잘 어우러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자칫 이 공정을 소홀히 했다간 등장인물은 여럿인데 정작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감 2시간 전. 이제는 마무리해서 송고해야 한다. 아직 명암을 넣지 못한 컷들이 좀 있는데, 아무래도 다음화로 넘겨야 할 것 같다. 최근 댓글에 스토리 전개가 느리다는 불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붙들고 있다간 펑크다. 어차피 퀄리티는 자존심이고, 마감은 생명이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누구는 원고를 몇 편씩 미리 세이브 해놓고 작업한다고 하던데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자책과 자괴감을 번갈아가며 느끼고 있지만 도대체 개선되질 않는다. 그렇게 간신히 마감을 끝내자 아내에게 전화가 온다. 딸아이를 픽업할 시간이다.
오후 11시경 만화 업데이트 되면 신기하게도 한 두 시간 안에 댓글이 수백 개가 올라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을 달아주는 독자들이 고맙기도 하고, 때론 무심코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 무섭기도 하다. 그렇게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때로는 캡쳐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SNS 계정에 간단한 마감후기를 올리면 이번 주 마감은 끝. 한 숨을 돌리면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어시스트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 “형, 다음 화는 아직이야?” 그렇다. 어서 다음 화를 준비해야 한다. 이제 막 마감을 끝낸 상태라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펜선 작업을 하자. 펜터치를 할 때는 머리가 쉴 수 있기 때문에 팟캐스트나 TV를 틀어놓을 수 있다. 오늘은 지난주에 동료작가들과 함께 녹음했던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모니터링이나 해야겠다. 그래도 내일은 또 학교를 가야하는 날이니까 너무 늦게 자면 안 된다.
요즘 학교에서는 웹툰창작을 위한 교과과정을 개편하기 위한 교수회의가 한창이다. 만화가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을 하는 것이 좋은가?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이미 만화가인 나는 너무 쉽게 만화가가 된 것은 아닌지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학생들과 상담을 해보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데뷔하기를 원한다. 막상 데뷔를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오히려 데뷔한 이후에는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 없을 텐데,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한편으로 학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학생들도 못미더운 것은 마찬가지다. 학점 순으로 좋은 만화가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지만 너무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고 함부로 조언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내가 살았던 시대와 그들이 살아갈 시대는 다를 것이며 과거에 내가 했던 방식들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라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에게 <재미의 원리>라는 수업을 통해서 각자의 재미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가끔 술자리에서 동료작가들을 만나면 만화연재와 학교수업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힘들지만 재밌다”라고 둘러대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다. 매 학기마다 “이번 학기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매달마다 “이번 달만 지나면 좀 살만하겠지” 그리고 매주 “이번 주만 지나면 숨통이 좀 트이겠지”라는 기대감을 갖고 버티는 중이다. 때로는 내가 지금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기도 한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학교 수업과 만화 연재를 병행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만화를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실제로 만화창작과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다 보면 만화가로서 유효기간이 조금씩 연장되는 기분이 든다. 내가 배웠던 지식과 주관적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 같다. 사자성어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만화를 가르치면서 만화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만화를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오늘도 마감과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1978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 웹툰 「암연즈」로 만화계에 입문하여 새로운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활동을 벌였다. 현재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웹툰 창작을 지도하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움비처럼』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