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당신이 만들어낸 언데드는 매우 비범하다
『언데드 다루는 법』 출간한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이야기를 쓰는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그를 통해 나의 희망과 두려움을 탐사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 John Ajvide Lindqvist
열두 살 외톨이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기이한 우정을 그린 『렛미인』으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돌아왔다. 뱀파이어에 이어 이번 작품 『언데드 다루는 법』에서 그가 선택한 대상은 호러 장르의 또다른 독보적 몬스터 좀비로, 시체들이 깨어난 한여름의 스톡홀름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 군상의 모습과 사회상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2005년 발표한 두번째 장편소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시체들이 깨어난 스톡홀름 전역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다.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는 1968년 스웨덴 블라케베리에서 태어났다.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십대 시절부터 거리 마술쇼를 선보였고, 마술사로 활동하며 북유럽 카드 트릭 챔피언십에서 2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그 후 12년 동안 스탠드업 코미디언, 텔레비전 코미디쇼와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블라케베리에 사는 뱀파이어를 그린 자전적 작품 『렛미인』을 완성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는 이유로 여덟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결국 2004년 우드프론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작품은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듬해 노르웨이에서 ‘최고 번역소설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스웨덴, 독일, 미국 등지에서 영화화 제안이 밀려들어 그중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린드크비스트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렛미인』으로 한국 팬과 이야기를 나눈 지 8년 만이다. 한국의 두번째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나?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앗, 한국? 『언데드 다루는 법』은 이미 출간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게 얼마 만이야……”
『렛미인』은, 다른 여러 나라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연극 무대에 오르는 등 여전한 ‘현상’이다(한국에서는 호러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악마에 사로잡힌 소녀를 연기했던 배우 박소담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첫 작품으로 줄곧 글로벌 센세이션이 되는 기분은 어떤가? 『렛미인』이후, 당신 개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잭 손이 시나리오를 쓴 <렛미인>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한국 무대에 오른 <렛미인>도 같은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멋진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출중한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이 내 작품을 좋아해주다니 난 정말이지 억세게 운이 좋구나 싶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정작 내 삶은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밤이나 낮이나 쓰고 또 쓸 뿐. 그래도 “안 할래요”라는 말을 예전보다 더 많이 하게 되었고,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는 점은 말해야겠지.
본격적으로 『언데드 다루는 법』 이야기를 해보자. 이 작품을 언제 처음,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혹시라도 『렛미인』 같은 데뷔작을 쓴 후,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진 않았는지? ^^;
2001년 『렛미인』을 쓰던 어느 시점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건 사람을 해치지 않는 좀비가 등장하고, 그로 인해 ‘위협’이 아닌 감정의 문제에서 접근하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렛미인』을 출간해주겠다는 출판사를 만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소포모어 징크스도 없었다. 덕분에 두번째 작품에 대한 부담 없이 썼다.
첫 질문은, 김빠질지 모르겠지만 ‘언데드’의 개념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데드’를 ‘좀비’와 혼용해 쓰는 것 같다. 호러 픽션 장르에 그다지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언데드보다 좀비 쪽이 훨씬 더 친숙하게 들리고. 둘 사이에 딱히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언데드가 좀 더 시적(詩的)이라는 영국 작가의 코멘트를 발견했는데, 스웨덴어 원제의 ‘ododa’도 ‘undead’와 같은 개념인지? 그렇다면 ‘언데드’라는 개념은 작가로서 선택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까?
맞다. ‘ododa’와 ‘undead’는 같은 뜻으로, 좀비에 비해 인육이나 인간의 뇌를 먹는 괴물과의 연관성이 덜해서 편의상 쓴 것이다. 죽었으나 시체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내 목적에 딱 부합하는 말이었다. 만약 제목이 『좀비 다루는 법』이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해뒀던 제목이 훨씬 좋긴 하다. ‘죽은 자들이 일어날 때’였는데 뒤늦게 헨리크 입센의 희곡 중 똑같은 제목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생각을 접었다.
ⓒ John Ajvide Lindqvist
도입부가 묵시록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좀비가 깨어나기 전, 불길한 폭염, 전원이 꺼지지 않는 전자기기, 집단 두통에 시달리는 스톡홀름 시 같은 요소들은 어떤 계기/이유에서 구상하게 되었나?
여름과 폭염의 소재는 이야기를 구상하던 막바지에 떠올랐다. (그런 점에서 도입부부터 겨울과 눈을 필수 요소로 정했던 『렛미인』과는 대조적이다.) 그런 구상을 하게 된 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인식하는 상황과 그런 인식이 불러온 훨씬 더 비정상적인, 즉,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사회를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스웨덴 정부에서 언데드를 일종의 ‘국지적 바이러스’로 취급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사스부터 에볼라, 메르스 등의 바이러스는 신세기 지구상의 가장 무서운 신종 질병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혹시 이런 바이러스에 관한 기사를 접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내 기억엔 없다. 그리고 2001년 당시, 좀비 묵시록이라는 소재 자체―맥스 브룩스(‘월드 워 Z’ 시리즈의 작가) 기타 등등―는 전혀 화두가 되지 못했었다.
이 밖에도 특히 신경 써서 반영한 스웨덴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있는지?
요새 들어 더 심각해지고 있는 이 사회의 이민자 처우 실태라고 말하면 명약관화하겠지만, 정작 『언데드 다루는 법』을 쓰던 시점의 나는 특정 부류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와 같으면 ‘우리’라고 규정하고 나와 다른 부류는 ‘그들’로 배제하는 현실을 고찰하고 싶었다는 점이다. 살아 있는 누구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분류될 수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죽은 자만이 ‘그들’에 속하겠지.
2009년 호주 출간 기념 동영상을 유튜브로 보았다. 당신은 좀비 영화를 좋아하지만 좀비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지는 데 회의가 들었다고 말하더라. 즉, ‘늘 공격적이기만 한’ 언데드 캐릭터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그것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나?
물어본 그대로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와 소설을 즐겨 보는 사람이지만 정작 내가 그런 스토리를 쓰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고백하자면 예전에 진부한 좀비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 한 편을 쓰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싶어서였고, 38일 만에 탈고했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거의 2년이 걸렸다.)
당신이 만들어낸 언데드는 과연, 매우 비범하다. 당신의 언데드는 생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동물적 욕망만 있는 거의 전적으로 ‘수동적인’ 괴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초현실적으로 충격적인 능력을 드러내니, 대면하는 인간의 감정을 반사해 증폭하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캐릭터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어이쿠, 절대 말해줄 수 없다.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 상대의 내면을 읽는 인물을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말해줄 수 있다. 스토리를 구상하던 막바지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결국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을 공격하게 되는 건 살아 있는 인간에게 내재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일 때가 많다는 메시지에 좀 더 힘을 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언데드 다루는 법』에서 이 이상적인 개념을 실질적인 현실로 발전시켰다. ‘두려움에서 위험이 나온다.’
ⓒ John Ajvide Lindqvist
‘장르의 낡은 관습을 부숴야 한다’는 것이 당신의 좌우명인가?
딱히 좌우명 같은 걸 챙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냥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가끔 신선한 걸 건지는 정도다. 말하고 나니 신선하지 않은 아이디어를 과연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나 싶네, 그렇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며 내건 슬로건)’가 어디 아이디어인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는 거지. ‘미국이 옥수숫대로 연명하는 꼴을 보자.’ 옳거니, 이 정도는 돼야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지. 시시껄렁하지만 처음 것보단 낫다.
당신이 보기에 참신한 좀비 호러 픽션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언데드 다루는 법』에 영감을 준 영화나 소설이 있는지도.
없어서 미안하네. 『언데드 다루는 법』을 쓰던 당시, 좀비 영화나 소설을 그리 많이 보진 못했다. 일반적으로 좀비 장르가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에 대한 감이 있었고, 좀 더 다른 결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을 뿐.
전작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인 현상을 뉴스나 병상일지, 군 보고서 형식으로 조명하는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극화된 상황을 탈극화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농담이지만, 장르의 장치에만 현혹되지 말라는 린드크비스트의 찬물 끼얹기?
르포르타주 기법은 『렛미인』 때와 마찬가지 의도로 끌어들인 것으로,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실제로 대응하는 사회가 이야기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하되, 우리가 동질감을 느낄 만한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채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사회란 얼굴 없는 실체로, 대상에 따라 ‘위협’ 아니면 ‘지원’의 형태로 인식된다. 『언데드 다루는 법』을 쓰던 초창기 등장인물 가운데 언데드를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고생하는 사회에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균형을 잃게 되었고 부득이하게 빼버리게 되었다. 지금 썼다면 얼개를 좀 더 복잡하게 짜보자는 생각에서 그를 살렸을지도 모르겠다.
중심인물들―안나와 엘리아스, 다비드와 에바―은 각각 사별, 비탄, 재회, 해방의 과정을 겪는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삶과 죽음에서 해방되는 이야기는 얼마간 불교적인 내세관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 가족의 꿈에서 애벌레로 나타나, 죽음을 상징하는 갈고리에 꿰뚫리고, 종래 나비가 되는 과정이. 이 과정은 소름끼치는 동시에 해방적이다. 영혼의 이주, 환생을 믿나?
그럴 리가. 하지만 작품을 쓰는 동안엔 내가 쓰는 내용을 ‘한시적으로나마’ 믿고, 인물이나 일체의 개념으로서의 스토리 안에 들어가 있으려고 노력한다. 고로 『언데드 다루는 법』을 쓰는 동안만큼은 영혼이 실재한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단연 흥미로운 캐릭터는 엘뷔 아닐까.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샤먼처럼 오컬트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처음에 그녀는 언데드 현상을 최후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말하자면 세례 요한의 길을 걸으려 하지만, 차츰 일어나는 일들에 의심을 품다가 결국 자기가 착각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기독교적인 해석은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메릴린 맨슨―악마교 숭배자 로커로 유명한―을 좋아하는 플로라를 거쳐 오류를 드러낸다. 현대사회의 면면을 담아내지 못하는 기독교적 세계관, 그 한계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될까?
체계적인 세계관은 결코 미궁과 같은 삶과 심리의 층위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점에선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고, 성경을 읽은 사람으로서 가끔은 특정 종교적 세계관과 연관해 이야기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연인의 사랑했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형상으로 변했을 때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인터뷰도 보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답이 있는지? 아니면 다시 살아난 아들과 제대로 이별하고 재회를 확신하며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나는 안나를 그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봐도 될까? 그리고 말레르의 최후를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참되게 받아들이지 못한 사례로 해석해도 될까?
말 잘했다. 이야기를 쓰는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그를 통해 나의 희망과 두려움을 탐사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언데드 다루는 법』의 경우는 사랑하는 존재를 알츠하이머나 죽음을 계기로 잃는 두려움에 대해서 썼다. 또한 우리 인간 대부분은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죽음은 ‘과연’ 부조리한 것이고, 『언데드 다루는 법』을 쓰면서 그런 부조리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집중했다.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음…… 여러분이 『언데드 다루는 법』을 너무도 좋아해준 나머지 출판사에서 내 작품을 계속 출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이라고 말해볼까? 스웨덴에선 『언데드 다루는 법』 이후 다섯 권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러 영화는 변함없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라는 점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이다. 그리고, 살 떨리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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