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 “호모 저스티스, 정의의 인간”
『호모 저스티스』의 저자 김만권 ‘정의의 인간’의 필요성을 말하다.
호모 저스티스는 이제껏 없던 정의를 복원하는 사람이 아닌, 당대의 정의를 새롭게 짓는 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같은 정의의 인간입니다.
마음이 불편하다. 얼굴을 찌푸리는 뉴스가 매일 같이 보도된다. 그 어느 때보다 ‘옳은 것’이 절실한 시기다. 매일 같이 드러나는 비리에 많은 이들이 정의가 사라졌다며 통탄하고 있지만, 막상 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정의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아직까지 마땅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아픔을 넘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정의(定義)란 무엇일까.
지난 22일 등촌 강서도서관에서는 김만권 저자의 『호모 저스티스』 강연이 있었다. 이날 강연은 그의 저서인 『호모 저스티스』를 바탕으로, 정의의 진정한 의미와 실현을 위한 방법을 청중에게 설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다방면의 저술과 강의 활동을 통해 대중의 정의에 대한 접근을 도와왔던 저자는 이날 행사 역시 청중의 (정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정의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통해 핵심을 짚은 뒤, 그것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날 강연을 통해 청중이 단순히 정의에 대한 개념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바라는 저자의 사려 깊은 배려였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먼저 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5년 전 유학 시절의 일이네요.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10만 권이 채 안 나간 책이었는데, 한국에서는 50만 권이 넘게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죠. 사실 이 책이 무척 어렵거든요. (웃음) 하버드 대학원생들도 미리 공부를 하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 수준의 책인데,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다니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저자가 살펴본 『정의란 무엇인가』는 무척 철학적인 책이었다. 특히 이 책은 공리주의의 효용, 권리주의자의 권리, 미덕을 통해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이 정의를 논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이 기록적 판매고를 기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정의’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책이 50만 권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가 조금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스템이 부당하다 생각하고, 내가 믿고 있던 ‘옳은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게 되니 사회의 정의를 논하는 이 책이 이토록 많이 팔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만약 그렇다면) 문제는 (미국 사회의 정의를 다룬) 이 책이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이에요.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거든요. 미국의 문제가 기본적인 사회 정의가 전제되는 가운데 몇 가지의 (옳은) 선택지 중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우리 사회는 그러한 기본적 정의조차 적용되지 않는 사회였죠. 특히 명백히 그른 일이 옳은 것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불의는 스스로를 정의라 불렀고, 정의를 이용해 불의가 완성되는 현상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한국 사회의 정의를 말하는 책이 따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의의 기본 개념과 함께 한국 사회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들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힘으로 시작한 정의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본격적 강연이 시작됐다. 저자는 우선 역사 속에 나타난 정의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정의에 대한 청중의 기본적 이해를 돕고자 했다.
"정의라는 말 자체가 출발한 곳은 고대 아테네 그리스입니다. 보통 정의라 하면 옳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당시 정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정의는 옳은 일이 아닌, 상황에 맞는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강자가 사람을 지배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이 시대에는 당연한 정의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의는 모든 강자들에 의해 힘으로서 다뤄졌죠.
당시 정의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에 나온 ‘멜로스 대화편’을 들 수 있습니다. 멜로스는 아테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뒤에서는 스파르타의 편을 드는 나라였죠. 아테네의 입장에서 중립을 지키는 척하며 스파르타의 편을 드는 멜로스는 눈엣가시였고, 결국 그들은 참지 못하고 멜로스를 공격하고 맙니다. 아테네의 침공이 시작되자 멜로스의 지도자는 아테네의 장군에게 협상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아테네 장군은 협상 테이블에서 (평화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죠. ‘도덕적 입장으로 정의를 이야기하지 맙시다. 도덕적 입장에서의 정의는 오직 관계가 평등할 때만 성립하며, 두 관계가 불평등할 땐 약자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덕적 이름의 정의는 오직 관계가 평등할 때만 성립하며, 관계가 불평등할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같은 관계 아래 강자는 약자에게 명령하는 것이 가능하며, 약자는 이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 같은 기록은 도덕적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평등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결국 정의로운 것을 강하게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강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도덕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강한 것이 힘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 정의가 오랜 시간 동안 ‘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유의 저항
"힘의 이름으로 쓰인 정의의 역사 아래, 가장 먼저 도덕적 정의를 실행한 이는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아테네 수뇌부를 비판하고, 힘이 정의로서 기능하는 지금 상황에 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반가울 리 없었겠죠.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유하길 그만두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당시 주장했던 사유하는 삶은 아테네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하게 살아왔던 젊은이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지도부의 명령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한다는 행위는 이제껏 그들이 한 번도 염두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기점으로 그들은 비로소 당연시 해왔던 행동을 돌아보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명령이 마침내 옳고 그름을 심판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유를 통해) 정의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테네 정부에게 축출당한 소크라테스처럼, 힘에 맞서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내부고발자로 몰려 강한 응징을 받았기 때문이죠. 이 같은 문제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정유라 사건 때도 내부고발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죠. 힘을 넘는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내부고발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 같은 내부 고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할 뿐만 아니라 강한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민주 사회가 도달한 오늘날 과거와 같이 물리적인 힘을 통해 약자를 제압하는 경우는 더 이상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강자가 힘을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강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힘을 통해 약자들을 지배하려 하고 있죠. 이제 그들의 힘은 미디어와 같은 여러 기술을 통해 포장되어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은 지배층의 힘이 약자들이 사유에 작용한 예 중 하나다. 황우석 박사는 연구 윤리를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위험한 실험을 자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심판받아야 마땅한 대상이었지만, 초기의 뜨거웠던 여론이 식자 그를 옹호하는 입장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줄기세포의 가치를 생각해봤을 때 그를 축출하는 것은 국익의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과학적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 같은 주장은 결국 도덕 대 국익의 대결로 점차 변질되어 갔고,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엄청난 판단의 부담을 안겨주었다. 특히 이 사태를 처음 보도한 피디수첩의 피디들은 오히려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 보여주었다.
세월호 사태에 대한 미디어의 접근 방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방송국은 세월호 당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을 이유로 세월호 때문에 경기가 침체되었다는 식의 뉴스를 연일 보도하고는 했다. 슬픔에 빠져 경제가 침체되었다는 이 같은 보도는, 경제적 이득이라는 미끼를 통해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고 한 조작 기술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도덕적 정의를 추구하다
"정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소크라테스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은 정의를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힘을 넘는 도덕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과연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의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정의의 승자가 되어온 건 언제나 강자였거든요. 힘이 지배원리로서 작용하는 세계에서 도덕적 정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책장 안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서양 정의의 역사가 온전히 힘에 의해 지배받은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정의를 깨달은 사람은 힘에 꾸준히 저항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정의의 역사는 힘을 가진 사람이 차지했던 정의를, 도덕으로 맞선 사람이 그 영역을 뺏어오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의의 영역은 여전히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제는 도덕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올 수 있어야겠죠."
저자는 이 같은 정의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추가로 설명했다.
"최근 들어 더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탄식이 여러 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강한 것이 쉽게 정의로 탈바꿈하는 현실 앞에, 우리는 마땅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 좌절감에 빠지고 있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정의의 역사가 도덕을 가진 사람이 힘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뺏어오는 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그 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힘과 도덕의 입장에서 정의를 생각해보신다면, (정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의) 좌절에서 벗어나 문제를 똑바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정의로운 인간
저자는 이 같은 정의가 단순히 추상적 개념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분이 정치 활동을 힘을 가진 이가 약자를 억압하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치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입니다. 정치와 법은 인간이 삶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우리는 정치를 통해 삶은 보다 윤택하고 나은 것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정의의 개념을 정치에 적용할 수 있어야겠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법과 정치 안에 정의가 분리되어있다면 우리 삶은 동물과 다름없어집니다. (힘만이 사회 원리로서 작용한다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동물과 똑같아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치에 반드시 정의라는 요소를 불어넣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인 호모 저스티스는, 정의의 사람들이라는 라틴어인 ‘호모 유스티치아’를 쉽게 풀어쓴 것입니다. 이때 정의로운 사람은 물론 강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의미하죠. 이제 우리는 정의의 추구를 정치의 본질로 여기고, (정의를) 새롭게 짓고 갈망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의 추구는 (정의의) 복원이 아닌, 당대의 것으로 새롭게 짓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정치를 통한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야 함을 다 강조했다. 그는 정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정의가 없어도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정의가 없어 고통을 겪는 이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죠. 정의가 부재하면 중산층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괴로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부 고발자의 케이스에서 알 수 있듯) 정의를 실천하면 겪게 되는 위험에, 많은 이들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정의를 과감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드라마 <송곳>의 인물들처럼, 우리 사회에는 적극적으로 문제의 옳고 그름을 가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호모 저스티스(라는 개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호모 저스티스는 (역사적 맥락에서) 권력자로부터 도덕적 정의를 추구해온 사람이며, (개념적 맥락에서) 정치의 본질을 정치의 추구로 인식하는 사람이며, 사회의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호모 저스티스는 이제껏 없던 정의를 복원하는 사람이 아닌, 당대의 정의를 새롭게 짓는 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같은 정의의 인간입니다."
호모 저스티스 김만권 저 | 여문책
25년간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3년간 집중적으로 이 책을 준비하면서 정의는 먹물들의 현학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절실히 필요한 일상의 이야기임을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에 따라 주요 철학자 11명의 사상과 주장을 소개하면서 중간 중간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현실감을 더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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