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 저만 불편한가요?”
두 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 펴내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행복해야 하고, 하나로 뭉쳐야 되고, 쉬어야 할 곳이고, 모든 걸 다 믿어도 되고 기댈 수 있는 혈연 집단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변을 보면 가족이 다 그렇지는 않잖아요. 가족이 수렁이 되어서 개인이 발목 잡히게 되는 가족이 분명히 있거든요. 사실 저는 항상 행복한 가족, 화목한 가족이라는 그림이 굉장히 불편했었어요. 제 안에는 그에 대한 반발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다. 노숙자 소녀는 길 위에서 엄마가 되고(「열세 살」), 지적 장애를 가진 어머니는 남성들의 폭력과 성폭행에 노출된 삶을 살다 떠난다(『나쁜 피』).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거나(『환영』) 대리모를 선택하고(「엄마들」), 화염상모반이라는 선천성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선화』).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너무도 어둡고 축축해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소설이 남기는 불편함의 잔상은 훨씬 더 길다. 방점은 ‘현실’에 찍혀야 한다. 그들과 같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이 소설은 왜 이토록 불편한 것인지’ 답할 수 있다. 그래서 김이설의 소설은 아프다.
소설가 김이설이 6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에서도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약한 건 쓸모없다. 쓸모없는 건 죽어야지. 죽지 않고 버틴 놈만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물려받은 것은 폭력뿐이고(「미끼」) 열심히 살아 온 대가로 해고 통보와 산업재해를 떠안은 가족은 와해된다(「아름다운 것들」). 먹고 사는 문제는 비정한 선택으로 이어지거나(「흉몽」) 가정 내에서 폭력적으로 군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한파특보」). 모성까지도 위협하는 생계의 문제 앞에서 그들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가 되는 게 옳은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아름다운 것들」).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들은 ‘고요한 일상’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보여준다.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질 때, 다가올 날들에 희망을 걸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남은 날들도 오늘처럼 고요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는 그 절박한 마음으로 삶을 버텨온 인물들이 당신의 이웃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런 세계에서 오늘의 안녕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깨닫게 한다.
내 소설을 찢어 불쏘시개로 쓰겠다
작가님의 소설에는 비극적인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최근의 뉴스들을 보면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이다 보니까 아이에 관련된 사건 사고를 들으면 정말 힘들어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들이 피해자로 나오는 영화나 소설을 볼 수 있었는데, 아이를 낳고부터는 못 보고 못 읽겠어요. 몰입이 너무 강하게 되니까요. 그런 부분이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정말 필요에 의한 게 아니면 꺼리게 되죠. 제 소설 중에도 아이가 피해를 보는 이야기들이 두세 편 있었는데, 그런 작품들을 쓸 때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리고 쓰고 나서도 잘 못 읽어요.
「열세 살」과 같은 작품들인가요?
「열세 살」도 그렇고요. 그런데 「열세 살」은 하도 퇴고를 많이 해서 덜했는데(웃음), 소아성애자에게 피해를 입은 아이 이야기를 쓴 적이 있거든요. 물론 화자는 아이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시선이었지만, 그 작품을 쓰고 나서도 굉장히 힘들었죠. 이번 소설집에서도 「아름다운 것들」에 아이가 피해를 입는 장면이 있는데, 퇴고를 할 때까지는 냉정하게 작업하니까 그렇게 힘들거나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건 설정이고 내가 만든 인물들을 사건 안에 넣어서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발표를 하거나 책으로 묶인 후에는 굉장히 힘들어져요. 그제야 인물들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책으로 묶여서 나온 걸 볼 때는 몰입이 되어 버리거나 감정이 들어가요. 그래서 힘들죠.
집필하실 때는 인물들과 거리를 둔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소설 속에는 온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인물들의 삶이) 다 힘든데, 작가마저도 밀어내려고 해요. 쓰는 사람인 저마저도 인물의 편을 들지 않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밀어내는 거예요. 독자들이 읽을 때 작가도 내친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 번 더 눈길이 가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화자를 감싸 안으면 자꾸 징징거리게 되죠.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느냐고,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게 어떻겠냐고, 자꾸 구걸을 하거나 감정을 억지로 끌고 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그래서 쓸 때는 아주 모질게 내몰아요.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요. 살아있지 않은 존재처럼 계속 밀쳐내야 소설을 쓸 수 있죠.
작가의 말에서 “내가 만든 소설 속 인물들을 모두 한자리로 불러들이고 싶다”고 하셨어요. 막 끓여온 미역국을 대접하고 싶으시다고요.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인물들의 감정을 만져주지 못해요. 그런 것보다는 기술적인 부분도 필요한 거죠. 이야기가 매끄러워야 되고 설정에도 맞아야 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제가 몰입이 되면 독자들에게 자꾸 손을 벌리게 되기도 하고요. 저는 계속 상황을 만들어주고 인물들을 내쳐야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이야기가 책으로 묶이면 그제야 살아있는 인물 같아요. 저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 공감이 되니까요. 『오늘처럼 고요히』의 인물들은 ‘내일은 행복할 것인가, 내일은 웃을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제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들을 다 불러다가 미역국이라도 한 그릇 같이 먹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죠.
인물들과 모여 앉아 화톳불이라도 피운다면 “기꺼이 내 소설이 박힌 책들을 찢어 불쏘시개로 쓰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문제의 상황이나 사안들에 대해서 실천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기 엄마라는 핑계로, 지방에 산다는 핑계로, 매체를 통해서 보고 분개하지만 항상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는 거죠. 혼자 고민을 하고 있고, 이게 굉장히 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일인 거예요. 정말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늘 말로는 ‘그들을 보듬어주겠어, 그들의 이야기를 쓰겠어’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게 없잖아요. 그게 늘 송구스럽고 죄송하죠. 내가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물론 모두가 투사가 될 수는 없고 모두가 돌을 던질 수는 없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들로 실천을 하고 연대를 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배부른 사람 같은 거예요. 따뜻한 방 안에서 아이들이 웃는 거 보면서, 남편이 출근 잘 하는 거 보고 안심하면서 지내잖아요. 사실은 그것이 아무렇지 않아야 할 일상인데, 요즘 우리 사회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죄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꾸 무용한 소설 같고, 할 수 있는 건 소설밖에 없고... 그런 생각을 늘 하죠.
‘어떡하지?’라고 묻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오늘처럼 고요히』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되지?’라는 거였어요. 지금도 우리 곁에는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쓰면서 바라는 건 그거예요. 읽는 분들이 그런 고민을 하길 바란 것 같아요. 소설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소설은 질문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질문을 하고 독자들은 같이 고민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렇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지?’라고 질문을 하는 게 제가 가장 바라는 목소리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불편한 이야기들을 쓸 수밖에 없는 거고요. 웃으면서 끝나는 이야기들은 고민할 여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안 써지는 거죠. 웃고는 있되 문제가 많은 상황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거죠. ‘지금은 웃고 있어서 괜찮은 것 같지만 이 사람들의 내일은 어떡하지?’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열세 살」 같은 경우에도 아이가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갈 일상이 어떨지 걱정되잖아요. 그런 고민들을 같이 시작할 수 있는 계기, 아니면 자기한테 던지는 질문이 되길 바라요.
인물들이 처한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에 보면 해직과 산재로 고생하는 부부가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아무도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어요. 그런데 이 부부는 결국 내 손으로 내가 낳은 아이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 이야기는 가상으로 만든 게 아니거든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이야기이고 저는 각색만 했을 뿐이에요. 소설이라고 하기도 죄송할 정도로요. ‘이들이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불행해야 되지, 왜 스스로 죽어야 하지’ 이런 질문을 해보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나 사회의 문제인 거죠. 아무도 이들에게 ‘너의 잘못이야, 네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몰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가장 답답하고 속이 상하죠. 소설가의 자아로서도 힘든 부분이고, 그걸 배제하고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도 굉장히 힘든 거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는 더 힘든 문제예요.
「미끼」와 「한파 특보」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생존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폭력에 대한 무감각으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세대는 부모한테 받은 것 없이 다 자신이 일궈서 이뤄냈잖아요. 그걸 전부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줘야만 했고요. 없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서 모으고 모아서 물려줘야 하니까 악착같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잠깐 정신을 놓쳤다가는 뺏기기 십상인 세상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나와 힘이 비등한 사람과는 같이 갈등하고 싸웠을 테고, 나보다 약한 사람은 빨리 없애려고 했겠죠.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 세대 분들을 보면 안타깝죠. 먹고 살기가 힘들고 일단 살지를 못하는데 대의나 인권 같은 것들이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물론 모든 분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 세대의 특징이 그런 부분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건 본인들의 선택인가요? 아니면 작가님께서 밀어붙이시는 건가요?(웃음)
단편 같은 경우에는 제가 컨트롤이 돼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인물은 죽어야겠구나, 살아야겠구나, 사는 데 아프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결정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장편의 경우는 인물들이 스스로 간다는 걸 알 것 같기도 해요. 제 뜻대로 잘 안 될 때가 분명히 있더라고요. 그런데 단편은 워낙 분량이 적고 그 안에서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니까 대체적으로 제가 결말을 만들어낸 상태에서 정해진 길로 가게끔 쓰기는 해요.
‘정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야속하게 느껴지는 인물은 없으세요?
「복기」에서 ‘정미’는 조금 안타까워요. 물론 소설 안에서는 각각의 마땅한 논리가 있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려서 선택을 하지만, 실제로 제 옆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잡을 것 같아요. 잡아야 될 인물인 것 같아요, 정미는. 사실 소설을 쓸 때는 정미보다는 정미가 죽고 나서 남편의 행동들을 보여주는 데 포커스를 맞췄었는데요. 소설의 인물들 중에서 안타까운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신다면 정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미를 보면 ‘아무리 이해 받지 못하고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조금 더 뻔뻔하게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안타까워요.
「아름다운 것들」의 주인공은 어떤가요?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같은 엄마로서 밉지는 않으셨어요?
그 소설은 두 가지 버전이 있었어요. 밤새 죽이려고 생각만 하다가 끝나는 결말도 고민했었는데, 저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한 거죠. 소설을 위해서는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소설을 쓸 무렵에 일가족이 다 같이 죽는 상황이 많았거든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매체에서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은 자살이 아니잖아요. 부모가 아이들을 살해하고 자기가 죽은 건데, 살해 후 자살인 거죠. 그런데 부모라면 내 아이 손톱에 박힌 가시 하나를 봐도 가슴이 아픈데, 내가 내 아이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건 정말 갈 데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에서 여자의 선택도 안타깝지만 마땅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마땅한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일인 거죠.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홀로 남겨졌을 때, 이 아이가 과연 제대로 클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을 못 하잖아요. 그런 상황이라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문제인지 고민할 수 있는 거죠. ‘그 엄마한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주인공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어요. ‘오죽하면 저런 선택을 할까’ 싶더라고요.
「아름다운 것들」은 책에도 명시한 것처럼 <시사IN> 기사를 보고 쓴 소설이에요. 제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기사에 있던 여러 에피소드들을 짜깁기한 거거든요. 실제로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고 가족이 와해된 분들이 더 많다는 거죠. 그 분들은 실제 삶 속에 살고 있는데 저는 있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와서 소설로 쓰기만 한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정말 아파하고 있는 것도 사치인 것 같고 죄스럽죠. 그런데 그 분들 이야기를 꼭 한 번 하고 싶었어요. 그 분들에게 엄청난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경찰들도 파손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이런 현실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그것도 강자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서 약자를 누르는 일인 거죠. 그런 구조에 우리는 계속 소비되고 있는 거잖아요. 큰 집단의 한 마리 개미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개미의 삶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다 사연이 있고 아프잖아요. 그런 것들을 자꾸 봐야 하는 게 제가 소설을 쓰는 일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 저만 불편한가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가족 안의 문제들이나,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가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가족이라는 게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잖아요.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행복해야 하고, 하나로 뭉쳐야 되고, 쉬어야 할 곳이고, 모든 걸 다 믿어도 되고 기댈 수 있는 혈연 집단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변을 보면 가족이 다 그렇지는 않잖아요. 가족이 수렁이 되어서 개인이 발목 잡히게 되는 가족이 분명히 있거든요. 사실 저는 항상 행복한 가족, 화목한 가족이라는 그림이 굉장히 불편했었어요. 제 안에는 그에 대한 반발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와 아이 둘만 살든,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이가 살든, 이혼한 부모와 사는 아이든, 가족처럼 잘 사는 게 좋은 거잖아요. 그리고 가족보다 친한 친구가 더 위로가 되고 더 기댈 수 있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 걸 생각해 보면 가족이 대물림을 위한 기계적인 공간 같은 느낌도 들어요.
가족 안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든 생각인데요. 아이들은 처음에 정말 백지와 같거든요. 그런 아이에게 감정을 입히고 가르치고 아이를 만들어가는 역할이 집이고 가정이고 부모예요. 저는 환경에 따라서 분명히 한 개인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인물을 그릴 때, 이런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항상 가정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인물의 문제적인 부분이나 처하게 된 상황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거죠. 제 소설에서는 부모라든지 자식이라든지 다 엮여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필요하지 않은 소설도 분명히 있는데 제 소설에는 그게 빠져 있지를 못해요. 제가 이미 전통적인 가족관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이 때로는 불편하고 힘들어서 ‘이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작가님 개인에게 가족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건가요?
소설 쓰는 김이설에게 가족이라는 건 개인의 악의 기원일 수도 있고, 상처의 뿌리일 수도 있고, 사건 상황의 시발점일 수도 있는데요. 소설 쓰지 않는 생활인으로서 저에게 가족은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공간이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거예요(웃음). 제가 등단하기까지 10년 정도 걸렸는데, 아버지가 저한테 ‘왜 돈을 안 벌어 오냐’ 라거나 ‘왜 나잇값을 못하냐’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고급 룸펜이라고 이야기하시기도 했지만(웃음), 뭐라고 하시거나 내보내지 않으셨거든요. 제가 골방에 파묻혀서 소설을 쓰겠다는 열망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아량 덕분이었던 거죠. 그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는 집에서 글을 쓰다 보니까 보통의 전업 주부들과 조금 달라요. 집안일은 완벽하게 해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저는 가족들의 이해, 믿음, 희생을 받아서 소설가로 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가족의 힘을 받아서 가족들이 와해되는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조금 아이러니하죠.
불행한 가족사를 가진 인물들에 대해 쓰시니까, 독자 분들 중에는 ‘혹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든 건가’ 하고 짐작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웃음).
『나쁜 피』와 두 번째 단편집이 나왔을 때는 가끔 기자님들이 물어보셨어요. 조심스럽게 ‘혹시 작가님의 성장기에…’ 하고요(웃음). 그런데 제가 ‘아니요, 저는 너무 밝게 자랐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저도 암울했어요’ 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을 만나면 가족 이야기,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아줌마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웃음), 누가 이야기하길 ‘너는 너의 소설과 너의 삶이 다르다는 걸 계속 밝히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2011년에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시길 “10년쯤 지나면 아이에게 엄마가 쓴 소설을 읽어보라고 할 생각”이라고 하셨어요. 아직 아이들은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겠네요.
그렇죠. 큰 아이가 궁금해 해요. 언제 읽을 수 있냐고요. 그 인터뷰를 할 때는 ‘10년 뒤에 읽을 수 있어’라고 했다면 지금은 ‘네가 똑똑한 소녀로 자라면 고등학교 때도 읽을 수 있어’라고 말해요. 책도 안 읽고 독해력이 부족하면 성인이 돼서 읽을 수 있다고요. 지금은 왜 못 읽냐고 물어보면 ‘무서운 장면도 많고 그래’라고 하죠. 그러면 ‘왜 무서운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라고 물어보는데, 그러면 ‘만화 보면 항상 악당이 나오지 않냐’고 하면서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고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주인공이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여주고 같이 생각하기 위해서 나쁜 상황들과 나쁜 인물들을 만드는 거야’라고 설명해요. 그래서 저희 딸은 빨리 고등학생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죠. 엄마 소설을 읽고 싶어 하죠. 아이들이 어려서 잘 모를 때는 파지 뒷장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파지도 관리를 해요. 딸이 읽을 수도 있으니까요. 내용 자체는 문제는 없는데 대사에 나오는 욕이라든지 세밀한 묘사를 아직은 접하면 안 될 나이니까요. 그런 부분들은 조심하고 있죠. 그런데 작은 아이는 관심이 없어요(웃음).
아이들이 엄마의 작품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셨겠죠?
그럼요, 많이 하죠. 어떤 반응이라기보다, 아이가 ‘엄마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아’라고 말할까 봐 더 걱정이죠. 제가 여자로 살아온 40년과 저희 딸들이 살아갈 40년은 달라야 할 텐데 그 차이가 크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게 걱정이고 안타깝죠. 우리 아이들이 똑똑한 어른으로 컸다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를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고요. 이건 엄마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소설 쓰는 김이설의 영역이니까요. 다만 아이가 커서 소설을 읽을 때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라면, 그 점이 더 절망스러울 것 같아요. ‘엄마, 예전에는 정말 이랬어?’라고 질문해야 되는데 ‘맞아, 요즘 이렇지’라고 읽히면 먼저 산 세대로서 미안해할 일인 것 같아요. 속상한 일인 거죠. 나아지지 못했으니까.
아이들이 소설을 읽은 후에는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은 곳’이라고 이야기해주실 건가요?
그렇죠. ‘세상은 아름답지 않고 힘들어, 그런데 힘든 상황에서도 가치를 찾는 건 너 자신이어야 돼’라고 가르쳐야 할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세상은 무지갯빛 찬란한 곳은 아니고, 밝은 곳이 있으면 어두운 것이 있고, 항상 이면들이 있다’고 이야기하죠.
‘더 날카롭고 많이 불편한’ 단편을 쓰겠습니다
「미끼」와 관련해서 “그동안 보여준 소설의 정점 같은, 더이상 비슷한 작품을 쓸 수 없도록 여한 없이 쏟아부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쓰고 싶으셨던 작품과 가장 닮은 모습이라고 봐도 좋을까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아주 많이 거친 작품이라는 의미로써 정점이었던 거예요. 아주 난폭한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한 거고요. 제가 난폭한 이야기를 추구하는 건 아니에요. 「미끼」는 ‘아주 기분 나쁘고 불편한 이야기를 작정하고 써보고 싶어서’ 썼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고요. 내재되는 폭력, 폭력을 유지하기 위한 부분들,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부분들,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낚시를 하다 보면 바늘이 물고기를 채야 끌려오거든요. 그러면 물고기들이 바늘에 걸린 부분이 너덜너덜해져요. 바늘이 입에 물려야 하는데 가끔 지느러미에 물리기도 하고요. 「미끼」는 그런 의미로 작정을 하고 써봤던 소설인데, 표현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되게 힘들었어요. 자연스러운 욕설을 써야 하는 게 가장 힘들었고요. 말로는 자연스러운 욕인데 글자로 썼을 때는 맛이 안 나는 부분도 있어서, 대화를 만들 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는 순간도 종종 묘사하시잖아요. 그런 장면을 쓰실 때도 많이 괴로우실 것 같아요.
그렇죠. 괴로워요. 그런데 쓸 때는 괴로워하지 않으려고 해요.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무생물 다루듯이 해야 하거든요. 작가가 여자라거나 남자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상황으로만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쓸 때는 이 인물이 아이인지 여자인지 제가 인식을 안 하려고 하고요. 감정을 넣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써요. 독자들이 제 소설 속의 여자들을 보고 불쌍한 존재들, 약한 존재들이라는 측은한 마음을 갖기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아요. 소설을 쓸 때 제 인식 안에서는 사회의 한 약자일 뿐인 거지 여자라고 표현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제 스스로의 느낌은 그래요. 그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쓸 때의 입장은 약자 혹은 끝에 있는 가장 연약한 존재, 이런 느낌인 것 같아요.
작가님의 소설은 짧은 문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느낌이에요. 술술 써 내려가신 게 아니라, 굉장히 많이 다듬고 깎아내는 과정을 거치셨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는 어떠셨나요?
퇴고할 때 최대한 많이 버리려고 하죠. 정말 경제 원칙에 입각해서 쓰고 싶어요. 되도록이면 수식어를 안 넣고 싶고요. 물론 그게 소설마다 달라야 하는 건 맞아요. 아름다운 장면, 부드러운 장면에서는 수식어도 넣어야 하고 부드럽게 써야 하는 게 맞죠. 그런데 저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핍진한 이야기들이 많고 건조한 느낌이기 때문에 문장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으니까 하는 거예요. 퇴고를 할 때는 되도록이면 접속어도 빼내고, 가장 기본적인 문장 연습을 하는 것처럼 해요. 이 문장이 없어도 이야기가 된다고 판단되면 버리고요. 어려운 한자어도 안 쓰고 싶어 하죠. 최대한 짧고 건조하고 수식어 없고, 그래야 그 상황이나 인물이 건조하고 핍진하다는 게 더 잘 부각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되도록이면 군더더기가 없기를 바라죠.
등단 후 당선소감을 쓰실 때 ‘계속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등단 10주년을 맞은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10년 뒤에도 살아남아 있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요(웃음). ‘좋은 소설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아요. 말씀 드렸던 것처럼, 지금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 좋은 소설 같아요.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테고, 조금 더 견고해지는 생각들이 생기겠죠. 그런데 계속 그 고민들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이제 하면 너무 늦었나 싶기도 한데 ‘좋은 소설이 무엇일까’가 늘 큰 문제이고 걱정거리이고 ‘좋은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개인적인 고민도 계속 깊어가겠죠. 그런데 나이 들어서까지도 계속 현장에서 쓰고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떤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고요히』라는 제목으로 여덟 편의 서로 다른 작품이 엮였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 가지는 단일한 색깔이라든지 느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의 색깔로 보여서 그게 김이설의 색깔이 되는 것도 좋은데, 그것이 자기 복제처럼 보일까 봐 염려되는 부분이 있기는 해요. 스토리가 다 다르지만, 여하튼 현실의 문제로 궁지에 몰려서 나락으로 빠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다 거기에 부합되는 작품들이잖아요. 자기 복제라는 지적을 받는 것이 걱정이죠. 그러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고민하고 있고요. 어떤 분이 쓰신 글을 보니까 자기 복제라는 이야기를 하셨던데, 그 표현이 오히려 시원한 느낌 같은 걸 줬던 것 같아요. ‘남들이 알면 어떡하지’ 하고 혼자 속으로만 조심하던 부분을 탁 터뜨려 주니까 오히려 시원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점에서 ‘계속 정신을 번쩍 차려야겠구나, 안일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자각하고 다잡는 계기가 되는 단편집이기도 한 것 같아요. 『선화』 같은 경우는 많이 유한 작품이었는데, 유해지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시선을 쫓되 색깔만 조금 다르게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죠.
다음 작품도 준비 중이신가요?
<악스트 Axt>에 연재 중인 소설이 노인 분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래서 지금은 늙음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노년의 삶에 관한 책도 보고 있고요. 다음 작품은 그 소설이 완결이 돼야 할 것 같아요. 가을까지는 완결을 할 계획이고요. 단편들도 올해 써야 될 것들이 있는데, 책도 나오고 하니까 마음이 조금 흐트러진 부분이 있어요. 마음을 빨리 다잡아서 더 날카롭고 많이 불편한 단편들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저 | 문학동네
제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부고」와 2016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으로 선정된 「빈집」을 포함해 총 9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을 통해, 김이설은 그 벗어날 길 없는 세계에서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삶도 과연 지켜나갈 만한 것인가, 라는 둔중하고도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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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 죽을 거야.” 그렇게 되뇌니, 세상처럼 마음도 고요해졌다. 햇빛 덜 받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정직한 눈길과 그 주위의 그늘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엄정한 태도, 이 삶이 나빠지길 멈추지 않는 한 김이설의 소설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이 당선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