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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권상미가 말하는 ‘주노 디아스’ 소설의 매력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번역 유니오르 주변의 여성들을 눈여겨봐야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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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 디아스는 스스로도 ‘아주 느리게 쓰는 작가’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고, 『오스카 와오』에서 보듯이 단어와 문장이 매우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는 작가다.

첫 장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주노 디아스의 신작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가 국내에서 출간됐다. 주노 디아스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출간 이후 5년 만에, 펴낸 소설집으로 작가 자신의 소설적 자아(alter ego) ‘유니오르’와 그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사랑’에 관한 9편의 옴니버스 단편집이다. 주노 디아스는 2010년 한국 방문 당시 “평생 장편을 3편쯤 쓰면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천천히, 완벽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에서 2012년에 출간된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에 관한 독자와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12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2012년 스토리 문학상 최종 후보, 2013년 앤드루 카네기 메달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도미니카 태생의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는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한때 묵시록적 영화와 책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1996년 첫 단편소설집 『드라운』이 전례 없는 호평을 받으며 미국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2007년, 그는 11년 동안의 침묵 끝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퓰리처상을 비롯해 전미비평가협회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전 세계 2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국내 출간을 기념해 주노 디아스의 작품을 연이어 번역한 권상미 번역가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권상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한 뒤 캐나다로 날아가 오타와대학교에서 번역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캐나다에서 영어와 스페인어 책을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올리브 키터리지』, 『드라운』, 『에드거 소텔이야기』,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리틀 블랙북』,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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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와 번역자와의 긴밀한 소통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드라운』,『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이어 주노 디아스의 세 번째 작품 번역이신데요. 전작 『드라운』과 동일한 주인공 ‘유니오르’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드라운』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한 인물들이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작과 비교하여 이 책만의 매력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동시대성이 아닐까요? 『드라운』『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하 『오스카 와오』)』은 유니오르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80년대와 그후라고 해도 90년대 정도의, 성장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일 겁니다. 반면,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해와 달과 별들」,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에서는 다소 변화한(아마도 좀더 성숙하고 상실에 아파하는) 유니오르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유니오르의 아버지 라몬의 현지처 야스민이 화자로 등장해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유니오르의 어머니) 비르타의 모습을 라몬의 편지에서,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풍경을 그린 작품 「겨울」에서, 또 라파의 마지막 나날들과 그후(「푸라 원칙」과 「미스 로라」)의 세월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은 유니오르 주변의 여성들을 눈여겨봐야 하는 소설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 유니오르의 관찰에 의해서만 접할 수 있는 인물인 형 라파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자세히 펼쳐집니다. 개인적으로 유니오르의 입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어 더더욱, 가장 개성적이고 독특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라는 권위 앞에서는 움츠러들고 순종적이었던 어린 소년이었으나, 자라서는 유니오르에게 ‘인간 말종’으로 비쳤던 그의 마지막 나날의 결정들은, 언제나 해답을 주는 대신 ‘왜 그랬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주노 디아스의 서사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번역 작업 중 작가와 직접 소통하시며 문제를 해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작업 과정을 간단히 말씀 드리면, (1) 우선 직역에 가깝게 번역을 하고, 의문 나는 점을 표시한 후 개인적으로 조사를 통해서 확인을 합니다. (2) 문장을 다듬고, 언어적인 의문점인 경우 원어민에게 확인을 하고 (3) 마지막으로 작가만이 답변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작가와 소통을 시도하여 해결합니다. 물론 (3)단계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작가들도 있어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나 제니 다우넘의 『나우 이즈 굿』은 (1) (2)단계의 과정을 통해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주노 디아스 외에도 작가와 직접 소통한 해외 작가들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생존해 있고, 작가에게 묻는 것 외에 다른 경로로 해소할 수 없는 의문이 있다면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합니다. 주노 디아스 이외에도 이언 매큐언, 산드라 시스네로스, 게일 포먼, 스페인어권의 프란세스크 미랄례스 등 여러 작가들과 소통을 통해 의문을 해결한 바 있습니다. 매큐언과 시스네로스는 아직 미출간 작품인데, 편집부에 번역 원고를 송고하기 전에 몇 가지 확인을 위한 질문이었어요. 매큐언의 경우 『Black Dogs』라는 작품인데, 원문에 맥락 없이 ‘Auden’이라고만 표기된 부분이 있어 각주를 넣으려고 작가에게 확인했고, 시스네로스의 경우에는 화자가 여자아이였는데 성장소설처럼 쓰인 작품이어서 각 챕터마다 어떤 연령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인지 확인하는 질문이었어요. 우리말 종결 어미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나이에 따라 어미를 달리하지는 않았으나,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또한, 역자 교정 단계에서 편집부에서 제게 상세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럴 경우 편집 단계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긴 질문지를 작가들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그 단계까지 가서 나오는 질문들이라면 제가 답변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오스카 와오』와 같이 수수께끼처럼 모든 단어와 문장에 다른 지칭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경우에는 우선 다른 언어권 번역가들의 질문에 이미 답변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디아스는 세 작품 모두 이미 꽤 긴 답변서가 있었어요. 그 외에도 추가 질문이 많았고요. 디아스는 비속어를 많이 쓰는데 가급적 문체의 수위를 맞추고 우리말에 어의나 어감 면에서 가까운 표현이 있다면(가령 비속어 수위와 어감을 전달하려 ‘fuckface’를 ‘쌍판’으로 옮긴 경우) 최대한 찾으려는 편이에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에서는 ‘Eurofuck’이라는 낱말이 나왔는데, 최고급 리조트의 희멀건 백인들이 백사장에 도미니카 여자를 끼고 있다는 문맥이었어요. 같은 맥락에서 여러 경로로 고민하다가 ‘유로떡’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봤어요. 운도 맞고 성적인 비속어 수위도 맞추려는 의도이긴 했지만, 도미니카의 해당 리조트에 실제로 가봤더니 백사장이 그런 분위기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성적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게 맞느냐고 디아스에게 이메일로 확인차 다시 물었던 것이 이번 책에는 유용했지요. 오역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해당 단어는 원고 최종 단계에 ‘유럽 흰둥이’로 옮겨짐. 편집자 註)

 

직접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쓰인 작품을 번역해야 할 때도 있을 텐데요. 원작자와의 에피소드를 더 들려주신다면요?

 

개인적으로 고전 번역 작업은 좋아하지 않는데, 원작자에게 질문을 확인할 수 없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론 애로가 있겠지요. 한편, 전혀 소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과 같은 작가도 있습니다. (편집부를 통해 듣자니, ‘미국 대통령보다 만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런 경우에는 존중하는 게 예의이겠고, 당연하겠지만 연락을 할 때도 꼭 필요한 내용만을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합니다. 한마디로, 원작자와 소통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번역 작업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에 따르면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정확히 번역되는 것을 대단히 반기고, 그 과정에도 대단히 협조적인 경우가 많으므로, 가급적 정확한 답변을 듣고 반영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가령, 「해와 달과 별들」에 ‘바이스프레지던트/부통령’과의 만남이 언급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려고 해도 마땅한 정보를 찾을 수 없고, 세 인물이 그 동굴에 대체 왜 간 건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노 디아스에게 아주 오랜만에 질문을 하기 위해 연락을 했어요. 부통령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달라고. 그러자,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보이(남자)’들은 원래 그렇게 짓궂은 장난으로 서로에게 도전하길 좋아한다는 답변을 보내왔더군요. 도미니카에 갔을 때 그 동굴에도 찾아가볼까 했었는데, 하마터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맬 뻔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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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권상미

 

 

주노 디아스, 치밀하게 천천히 쓰는 작가

 

국내 독자들에게 주노 디아스는 뭐니 뭐니 해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장편이었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2008년 퓰리쳐상을 수상하며 미국 현지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만큼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서였을까요. 5년만의 신작은 다소 길었던 공백으로 느껴집니다. 그 시간만큼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데뷔 이후 '작가'로 활동한 시간 대비 '다작'에 속하는 편은 아닌데, 그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을까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경우 국내에는 올해 나왔으나 미국 현지에서는 2012년에 출간된 책이에요. 디아스는 스스로도 ‘아주 느리게 쓰는 작가’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고, 『오스카 와오』에서 보듯이 단어와 문장이 매우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는 작가입니다. 또한 작가의 에이전트에게 듣기로 첫 작품 『드라운』 당시부터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등을 포괄하는, 앞으로 낼 여러 작품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장기적인 집필 계획을 큰 그림으로 짜놓고, 동일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작소설 형식의 소설집을 낼 예정인 것으로 보아, 치밀하게 천천히 쓰는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다른 이유로는, 2012년에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번역 초고를 작업하면서 접한 인터뷰 자료에서 유추해보자면, 개인사가 몇 년 동안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제한 연인과 결별한 뒤 추간판탈출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 부분적 마비 증상 등 건강 문제가 있었고요. 이번 책의 마지막 단편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의 소재가 된 듯한 일련의 사건들을 실제 겪은 것으로 보아, 작품 속 유니오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랜 연인을 잃은 원년부터 5년에 이르는 ‘사랑의 반감기’가 주노 디아스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오스카 와오』의 헌사와 오스카 가족의 성(姓)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 반감기가 개인에게는 진정 핵폭탄급 영향이었을 거라 쉽게 짐작이 될 것입니다.

 

질문 때문에 몇 년 만에 주노 디아스에게 연락을 했을 때 “지난 몇 년이 네게 친절했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을 제게 건넸어요. 그 인터뷰를 읽은 뒤라 그랬는지, 그의 인사가 “내게는 친절하지 않았지만”처럼 들렸던 기억이 나네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누구였나요?

 

라몬과 야스민은 절절하고 열정적인 커플이 아니에요. 그들은 추운 아파트에서, 얼음장 같은 침대 시트 속에서, 방금 추위에서 떨다 온 상대방의 차가운 몸을 덥혀주지도 않고, 야스민은 연인의 옷을 병원 환자들의 피고름이 묻은 환자복과 함께 세탁하는, 어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그의 작업복에서는 내 일터의 냄새가 날 테지만 ‘빵은 피보다 진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사랑법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은 ‘악마도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미국에서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겠지만 마음을 주는 정도마저 생존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야스민은 언제라도 가족에게 돌아가버릴 수 있는 남자에게 너무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었을 테지요. 라몬은 지붕 골조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동료 얘기를 하면서, 야스민에게 자신이 같은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녀를 떠봅니다. 라몬이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 적이 있어요. 이들은 상대방을 너무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자신을 지키려는 게 아니었을까요.

 

장면을 꼽아주신다면요?

 

개인적으로는 유머를 잃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제3세계스러움’을 묘사한 장면들을 좋아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라파의 ‘시민권자 정자’로 임신해 팔자를 고쳐보려 한, 눈치 없고 무식한 여자 푸라를 미우나 밉지 않게 그린 장면,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에서 미국에서 온 손님에게 어떻게 해서든 ‘프리마(여자 사촌)’를 붙여주려 하면서 손님이 조금이라도 생활고를 해결해주고 가기를 바라는 시골의 모습이 카리브 지역의 정확한 현주소가 아닌가 합니다. 다른 온라인 매체에 연재중인 ‘도미니카공화국 여행기’에도 이 장면들을 인용하고 싶었는데요, 몇 문장만 따로 선택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어요. 불쾌한 사건을 유쾌하게 서술하는 작가의 문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들이지요. 가난하지만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고, 문제가 있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서 살아내는 모국에 대한 비판과 애정을 동시에 엿볼 수 있지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를 번역하시면서 소설의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을 직접 여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여행을 가시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를 작업하면서 작업한 작품의 배경이 된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특히 미국은 캐나다에 사는 저로서는 비교적 가기 쉬운 곳이니까요.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일 때문에 멕시코에 가게 되었는데, 스페인 건물 양식의 안뜰이나 물 길어 붓는 항아리 등, 다니다 눈에 띄는 사물을 보면서 당시 작업 중이었던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Caramelo』에 대입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도 혹시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몰라서 정확히 작품의 배경인 오아하카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찍어두기도 했어요.

 

도미니카공화국 여행은 우연히 출간 일정과 맞아떨어졌어요. 작년 여름에 쿠바에 처음으로 갔다가 그 여행기를 페이스북에 잠깐 남겼는데,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던 지인이 그걸 보고는 다음에 꼭 도미니카에도 놀러오라고 해서 비행기 표를 끊어 크리스마스 휴가 때 다녀왔고, 여행지에서 짬짬이 역자 후기 초고를 썼어요. 어쩐지 거기서 써야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돌아오기 전날, 섣달그믐 밤에 초고를 썼지요.

 

물론 가족 여행이었고 지인들도 있어서 제가 원하는 만큼 디아스 작품 배경지의 답사 기행처럼 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위에 말씀드린 도미니카 식 사랑을 이해하고픈 고민도 줄곧 있었고요.  

 

『올리브 키터리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 등 다수의 작품 번역을 하셨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소설을 번역하는 작업은 고충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번역하시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고충’이라고 할 만한 것은 사실 번역 외적인 문제들이에요. 가령 송고한 원고가 출판사 사정으로 몇 년이고 출간이 안 된다든지, 역자 교정을 하면서 편집부와 의견 조율이 어렵다든지. 하지만 이런 고충은 제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질문하신 의도는 번역의 애로를 가리키시는 듯하네요. 사실 번역에 ‘대한’ 얘기는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좀 궁금합니다(웃음).

 

『올리브 키터리지』는 사실 작업의 난이도로 따진다면 무난한 편이었어요. 3인칭 시점이고, 작가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심리 묘사만 잘 따라가면 되었으니 문학적인 표현만 고민하면 되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문체를 살리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외려 쉬운 편이에요. 요즘 탱고가 다시 주목 받고 있으니 탱고를 비유로 들자면,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탱고를 추듯, 원작이 ‘땡길’ 때 끌려가주고, 놓아줄 때 힘을 빼면 된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알마」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19금 욕설이 난무하는 장면이 있는데, 수위야 원작에 맞추면 되지만 단어를 모두 하이픈(-)으로 연결한 수식어구를 어떻게 해야 비슷한 효과를 줄까 고민하다가 띄어쓰기를 없애는 방법을 택했지요.

 

특히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나요?

 

‘시제’예요. 영어인 경우에는 언어의 특성상 과거의 일을 현재로 기술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스페인어였다면 분명 과거형으로 쓰였을 문장이 영어에서는 현재형으로 쓰이는 거지요. 그런데 화자의 시점이 현재이면서 먼 과거의 얘기를 하는 게 분명하며, 또 현재의 상황에 대한 진짜 ‘현재 시제’의 서술도 뒤에 나온다면, 과거의 시점을 현재형으로 쓴 것은 우리말에서는 과거형 어미로 쓰는 게 맞지요. 그러나 원작과 ‘가깝게’ 하는 것이 늘 가장 안전하므로 편집부에서는 ‘같은 시제’를 쓰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말은 시제가 서양어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할 정도로 세분화된 게 아니에요. 구두점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말과 서양어의 구두점 쓰임새가 다른데 똑같이 가져가려고 하면 외려 독이 된다고 봅니다. 편집부와 이런 의견 차가 있을 때 ‘고충’이 발생하지요.

 

시제 선택 외의 어려움은 없나요?

 

비슷한 맥락에서, ‘2인칭 주어’일 때도 상당히 고민되지요. 가령 『오스카 와오』에서 롤라가 화자로 등장하여 ‘you’를 주어로 쓴 부분이 있었는데, 그 ‘you’가 롤라 자신이므로 실은 내용상 일인칭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우리말은 어미가 발달한 언어이므로 가령 편지글처럼 직접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는 ‘~어/~지’를 쓸 테지만 이 경우에는 (1) 편지글이 아니라고 작가가 확인을 해주기도 했고, (2) 내용상 혼잣말과 마찬가지였으며, (3) 일반 주어 대신 ‘you’를 쓰는 것은 영어에서 너무나 보편적인 화법이고, (4) 결정적으로 ‘~어/~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일인칭을 택했어요.『드라운』에서도 「브라운 걸, 블랙걸, 화이트걸, 하피와 사귀는 방법」에서 2인칭 주어가 나왔는데, 이 경우에는 십대 소년이 여자를 사귀는 법에 대해 (자랑하듯) 말하는 것이라 거의 대화체처럼 완전히 입말체로 썼어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미스 로라」 같은 경우에는 성인이 된 후에 과거를 돌아보는, 서정적이고 다소 성찰적인 문체이므로 의미상 ‘나’를 뜻하지만 ‘너’를 주어로 쓰되 어미는 ‘~다’로 선택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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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권상미

 

 

토니 모리슨,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 번역하고 싶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언론 서평에서 “거리의 지혜가 돋보이는 리드미컬하고 유희적인 언어를 한국어로 제대로 바꿔낸 이 소설의 번역가는 상찬을 받아 마땅하다”라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고충도 있겠지만 보람과 기쁨이 없다면 지속할 수 없는 작업이실 텐데요. 이제까지 번역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나 크게 보람을 느낀 적이 있으셨다면 들려주세요.

 

물론, 모든 단어를 의심해야 했던 『오스카 와오』 작업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에 애착이 갑니다. 이 작품은 한국어판뿐 아니라 다른 언어도 역주가 백 몇 개씩 달려있는 걸 봤으니 아마 그 역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짐작이 되네요. 역자를 언급하지 않고 작품에 반해서 열변을 토하는 독자 리뷰를 접할 때, 역자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다는 뜻인 것 같아 내심 흐뭇해하지요. 위와 같은 언론사 리뷰에 기운이 솟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아, 인세로 작업한 책이 잊을 만하면 인세가 들어올 때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구나, 싶어 뿌듯하지요. 한국에 살고 있지 않아 그런지, 안타깝게도 이 이상으로 썩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네요.

 

번역가의 책 고르는 법이 궁금합니다. 눈길이 가는 책,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들게 되는 책은 어떤 책들이신가요? 공통점이 있을까요?

 

제가 한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좀 특수할 텐데요, 한국에 살았다면 팟캐스트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많이 사게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은 책을 읽고 마음에 들면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팟캐스트는 아마도 북클럽의 한 형태가 아닐까 싶어요. 얼마 전에도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을 e-book으로 사려다 결제가 복잡해서 포기했는데, 독자로서 문학 작품만큼은 한글로 된 것을 읽고 싶거든요. 

 

캐나다에 살면서 책은 도서관을 더 많이 이용하고요, 제가 서점에서 사게 되는 책은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 달라요. 김영하 작가의 책을 우리말로 구하기가 어려워 못 읽고 있다가 영어판으로 나온 걸 보고 산 적도 있고, 도미니카에 여행 가서는 기념품 대신 도미니카 출신 작가 훌리아 알바레스의 기행 에세이 『A Wedding in Haiti: The Story of a Friendship』이라는 책을 샀어요. 쿠바와 도미니카의 비슷한 듯하면서도 큰 차이를 확인하고 요즘은 카리브와 제3세계, 개발,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림이 예쁜 책을 보면 소장하고 싶어서 사기도 하고, 한마디로 책을 고르는 기준은 그때그때 즉흥적이에요.

 

번역가로서, 번역하고 싶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어떤 책들을 번역하고 싶으신지요?

 

번역하고 싶은 책은 물론 제가 좋아하는 책이겠지요. 많은 문학 작품이 그러하듯이, 역사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서사가 뛰어나고 수사가 적은 작품을 좋아해요. (어떤 번역가께서 복식에 대한 묘사가 싫다고 하셨던 생각이 나네요.) 그러니 판타지 팬은 아니겠네요.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고전 번역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김이 새서’예요. 실수를 피해 가기 위해서는 기존 번역 작품을 참고해야겠고, 또 그러면서도 기존 작품에서 사용하지 않은 표현을 골라 써야겠고, 그러다 보면 김이 다 새버리죠. 좀더 진득해야 할 텐데, 아직 하산하려면 멀었나 봐요.

 

작가를 굳이 언급하자면 토니 모리슨, 조이스 캐롤 오츠,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에 관심이 있고, 언제나 치밀한 전개로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이언 매큐언의 작품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작업해보고 싶어요. 스페인어권 작가로는 이사벨 아옌데의 스토리텔링을 좋아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번역가 외에 어떤 일을 하고 선택하고 싶으신지요?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었다면, 드라마 작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번역가처럼 혼자 일하는 직업 말고, 밴드나 연극처럼, 여러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고 대중과 직접 상호작용 하는 일이라면 보람도 더 클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는 지금으로서는 출판 번역이 아닌 다른 일을 더 많이 하는데, 재미있어요. 새로운 분야를 접할 때마다 세상에 내가 잘 모르는 분야가 이렇게 많구나, 하면서 새로이 배우는 걸 좋아하거든요.

 

책을 좋아하고, 번역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번역가께서 돈은 다른 데서 벌고 책은 좋아서 한다고 하셨던가요? ‘알파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요즘 같은 변화의 시대에 출판, 문학 번역이 쉽게 동기부여가 되는 분야는 아니지요. 하지만 모든 콘텐츠의 기본은 ‘텍스트’이니, 누군가와 무엇을 만들어가는 창의적인 활동으로서(위에서 말한 ‘좋아서 하는 일’에 해당하겠지요) 한동안은, 번역가들이 문학 번역하는 알파고로 대체되기까지는 저도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계속하겠지요. 모두가 힘들다는 때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책을 쓰고 만들고 팔고 또 읽는 모든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를 특히 추천해주고 싶은 독자 대상이 있으실까요?

 

단연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사랑한 분들이겠지요. 장편의 함축적인 서사와는 다르지만 『오스카 와오』에서 화자일 뿐 주인공이 아니었던 유니오르와 주변 인물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이번 책의 ‘옮긴이의 말’에도 드러나듯,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작품은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였어요.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하다시피 한 라몬(유니오르의 아버지)과 야스민의 관계를 현란한 수사 없이 담담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힙니다.

 

번역 작업하면서 특히 역자 후기를 써야 하니 내내 고민되었던 지점이 (소설의 주된 독자층으로 알려진) 여성 독자들의 ‘공감’이었어요. 고결한 사랑이라는 통념을 비웃듯, 즉흥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사랑을 비속어 충만한 문장으로 전달해야 했고, 저 자신도 그들의 사랑법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런 고민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문득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유니오르(어쩌면 남성 일반)가 아니라 상대방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사, 간호사, 착하고 참한 여성, 유니오르 못지않게 리비도가 강한 여자, 유니오르보다 더 똑똑한 하버드 여대생, 다른 인종간의 사랑을 믿지 않는 듯한 유니오르가 자꾸만 밀쳐내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백인 여자, 그리고 필생의 사랑 엑스. 이 넓은 스펙트럼의 여자들이 모두 나쁜 남자와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걸까요? 독자께서는 어떤 여성에 해당하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야스민에 가까운 듯.)

동물적인 면모와는 달리 의외로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상실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들의 사랑이란, 인생을 꽤 살았다 싶은데도 저 자신 새로이 알게 되었던 일면이었어요. (남자들은 정말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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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주노 디아스 저/권상미 역 | 문학동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는 전작 『드라운』에도 등장했던 주노 디아스의 소설적 자아 유니오르와 그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사랑’에 관한 9편의 옴니버스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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