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은유(메타포)의 영화 <일 포스티노>. 섬의 아름다움,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에 빠진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시인 네루다를 찾아가서 말한다. “전 사랑에 빠졌어요.” 심각한 병이 아니라고 답하는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치료되고 싶지 않다며 덧붙인다. “계속 아프고 싶어요.” 사랑의 본질이 ‘아픔’에도 있음을 간파한 절묘한 장면이다. (한국영화 <연애소설>도 같은 대사를 읊는다) 아프지만, 계속 하고 싶은 것, 사랑이다. 그런데, 그런 아픔과는 다른 또 다른 아픔이 스며든 것이 현대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그리고 불안하고 막연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었던 시대는 끝났다. 실질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거나 사랑이 돈으로 교환된다고 믿는 시대가 됐다. 그러한 시대, 정혜윤 PD가 우리 시대의 사랑을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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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랑은 계산적이고 전략적인 이해관계를 포함하기에 결혼 희망자의 경제상황과 감정기질이 유일한 문화의 형틀로 굳어졌다. 이렇게 짜인 형틀은 판박이 결혼을 찍어낸다. 그러니까 현대와 더불어 일어난 문화적 변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 사회적 이동성을 고려하는 경제적 전략과 뒤섞인 것이다.”(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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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기?
누군가는 지금, 사랑이 위기라고 말한다. 과거라고 위기가 아녔을까마는 지금 사랑이 겪는 위기의 원인에 대해 정혜윤 PD는 소비자본주의를 든다. 경제적 이유 등으로 사랑 또한 미래의 불안에 잠식당한 것이다. 그는 ‘내 탓이야’라는 발언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도덕적으로는 고결해보이지만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책은 따라서 사회가 이성, 도덕을 강하게 지배하는 것은, 곧 신자유주의의 지배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도덕은 지배 세력과 일반 시민들에게 적용 정도가 다르다. 전체적으로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거나 교통질서를 지키는 도덕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배 세력이 그토록 강조하는 준법은 고작해야 그런 것이다. 자신들에겐 그 준법의 기준도 적용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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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랑을 불안함과 막연함, 심지어는 절망의 만성적 원천이 되게 만들었는지는 내가 보기에 사회학을 통해서만, 현대라는 문화와 제도의 핵심을 이해함으로써만 풀릴 문제다.”(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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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PD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건넨다. 한 시인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구속됐고, 그를 풀어달라는 행사에 가서 한 해고노동자와 방송을 했다. 해고노동자는 방송이 끝나고, 다음에 자신의 아이에게 방송국을 구경시켜주고 싶다며, 가이드를 부탁했다. 정 PD, 왜냐고 물었다. 해고노동자는 부모가 힘겨운 상황이라 아이에게 꿈이 없어지는 것 같다며 꿈을 꾸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른들을 위해 책 읽기 강연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해고당하고 보니 그제야 보이는 세계가 있었고,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긴 싫으니 달라져서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 PD, 크게 감동을 받았다.
“사랑은 늘 미완성이다. 그런데도 사랑의 지속, 사랑의 존재에 대해서만 우리는 말한다.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을 게 아니고, ‘사랑이 움직이고,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어야 한다. 사랑은 존재가 아닌 만남이다. 소통이다. 그 노동자도 해고당하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 해고를 당한 뒤 겪은 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생명력, 사랑의 생기
그는 살면서 놀라운 사랑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음이 있었다. 사랑이 일상을 바꾼다는 것. 즉, 약간 마법에 도취된 일상을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 를 꺼냈다. 그가 보기에, 안나는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다. 라라(
『닥터 지바고』), 나타샤(전쟁과 평화)와 함께. 안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생기, 생명력을 들었다.
“안나를 따라 파티장에 간 러시아 여인들도 말하잖나. 당신이 진짜 아름답다고, 살아 있다고. 허리가 잘록하거나 뭔가를 입었다고 아름다운 게 아니다. 소설을 보면 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때 뒤돌아본다. 이 장면은 되게 중요하다. 이성이라고 믿고 판단하는 것들이 우리를 작아지게 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나중에 안나는 브론스키와 싸운다. 안나는 가상의 질투를 한다. 나랑 헤어지면 무척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할 거라고. 우리는 사랑을 증명하라고 말하곤 하는데, 안나는 살고 싶다며 인생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 말이 안나를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었다.”
이어
『테스』. 주인공 테스는 한 번 잤다가 인생이 끝장난다. 그만큼 우리가 사회의 지배를 어마어마하게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사랑에 미성숙한 사랑도 있고, 성숙한 사랑도 있다고 말했다. 미성숙한 사랑은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가 엄마 치맛바람 잡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사회에서 주어진 것을 비꼬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 없이, 전에 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삶을 생성하는 것 없이 사회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면 사랑은 위기일 수밖에 없다고 이 책은 말한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를 찬양하는데, 지금의 영국인과 너무 닮지 않아서 찬양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랑도 그렇다. 자아가 너무 중요해졌다. 사랑은 섞이는 것이다. 너랑 나랑. 자아가 흔들리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뭐든지 책임을 지고, 비대해지고 상처도 잘 받는 자아만 있다. 자기 비하도 있고.”
멘토 열풍을 부정함
우리는 강연을 왜 들을까. 정 PD는 좋은 판단, 좋은 삶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좋은 책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나온다. 놀라운 행동을 해서가 아닌 반응과 생각, 말이 놀라운 것이다. 내가 못해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놀라운 것.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가장 좋은 건,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구나 느끼는 순간이라고 전한다.
“나는 멘토 열풍을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다닌다. 불안을 감당할 수 없으니 확실하고 안정된 것에 마음을 열고, 그래서 멘토를 따라서 움직인다. 바로 지금 옆 사람에게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자아성찰, 자아계발에 대해 멸시한다. 우리는 자아성찰에 너무 익숙해 있다. 나는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진단을 내린다. 그러지 말라는 거지. 무엇을 보고 빛난다고 느끼는지,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끄집어내야 한다. 경험이 언제 내 것이 되느냐면 생의 커리큘럼을 만들 때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이야기의 맥락을 잡아주는 것이 책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널 만나서 내 인생의 맥락이 잡히는 거지. 사랑은 나의 삶의 형태를 잡아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주인공은 남자를 만나고, 여섯 겹의 우연이 내려앉았다고 말한다.”
그는 주례사에서 틀린 말을 지적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 그는 진짜 사랑은 두 사람이 둘, 셋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둘이 같이 있어서 생성되는 것,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책에는 실망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누구나 다 실망한다. 그럼에도 진짜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게 한다.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한다.
사랑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책에는 욕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정PD에 의하면, 타인을 좌지우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며, 외부의 시선에 휘둘리는 것이 욕망이다. 나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내가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은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
“이 책은 사랑이 너무 계산적이 된다는 것에 노골적인 반감을 품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사랑마저 그러면 어떻게 살아, 라고 말한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함정에 빠지는데, 그게 나름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우리가 사람을 그저 그렇다고 느끼는 건, 똑같은 질문만 해서다. 다른 걸 물어보지 않아서다. 지금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표준화되고 서열화 된 시대다.”
그는 한 어부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바다에서도 금지어종이나 사이즈 작은 물고기를 놔주는 어부였다. 그를 만나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에서 지킬 걸 지키는 남자가 됐느냐. 어부가 답했다. 내가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정 PD,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만 나온 어부였지만, 이 사람에게 자유는 스스로를 지키는 자유였던 것이다. 물고기를 안 먹는다는 어부의 말에 왜 그러냐고 물었다. 눈이 매우 예뻐서 먹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덧붙였다. 인간은 슬픔을 아는 존재다. 그가 지킬 걸 지키는 남자가 된 것은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누를 끼치지 말고 살자는 다짐 때문이었다. 생명의 근원에게 누를 끼치지 말자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어부와 달리 백옥 같이 하얀 피부의 부인도 만났다. 너무 상반된 두 사람의 인연을 물었다. 놀라운 사랑이 있었다. 세 살에 고아가 된 어부, 군대를 갔으나 아무도 면회 올 사람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위문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통씩 오는 편지를 받으며 3년을 버텼다. 제대를 했으나 으레 그러하듯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다만 겨울에 TV를 볼 때, 특히 일기예보에 전주에 눈이 왔다고 하면 생각이 났다. 그녀가 봄소식 온다고 편지를 꼬박 보낸 덕분이었다.
그러다 25년가량이 흐르고, 위문편지를 보냈던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기대 않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그녀였다. 이름을 말하면서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어부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로부터, 바다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기억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 순간, 그 시간이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1~2년 편지가 오갔다더라. 마침 둘 다 싱글이여서 결혼하게 됐다. 여자는 이전에 명품족이었다더라. 어부의 아내가 돼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게 예쁜 옷을 입지 않을 때도 자신이 사랑스러운 여자일 수 있는지를 잊은 거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더라. 화장하지 않고 예쁜 옷을 입지 않으면 괜찮은 인간인지 알 수 없다는 거. 그래서 물고기를 보면 호들갑을 떨고 반응을 했다. 어부에겐 권태로웠을 그 일이 새롭게 보인 거지. 이 세상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생기는 변화였다. 사랑은 계산하게 만들지 않는다. 내가 기꺼이 널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심지어 그것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사랑이 무척 많다.”
영원한 사랑. 사랑의 신화는 영원이라는 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정 PD, 영원이라는 말을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라고 말한다. 언제나. 힘들거나 초라하거나 빛날 때나 상관없이 언제나. 따라서 사랑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랑의 기술은 연애의 기술도, 섹스의 기술도 아니다. 사랑은 전면적인 관계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되는 기술과 다르지 않다.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랑을 믿고 있다. 외국인에게 커플링, 커플룩이 제일 신기하다더라. 또 우리처럼 기념일 많은 나라도 없다. 끝없이 확인하고 드러내는 안정감 말고 다른 사랑은 없을까를 상상하면서 생을 바꿔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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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의 낭만적 사랑은 20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문화적 혁명을 포괄한다. 하나는 생활방식의 철저한 개인주의화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자신의 감정을 가장 우선시하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사회관계의 경제화로 자아와 심지어 그 감정을 꾸미는 일까지 경제모델이 장악했음을 뜻한다. (중략) 이는 자본주의 문화의 문법이 권력을 가지고 이성애라는 낭만적 관계의 영역으로 침투해 장악한 결과다.”(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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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저/김희상 역 | 돌베개
세계적인 학자답게 에바 일루즈는 사랑을 주제로 다룬 이 책에서도 놀라운 박학다식함과 특유의 성실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여러 소설들에서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과 잡지 기사,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올라온 숱한 고백담과 댓글들, 연애와 불륜을 포함한 여러 부류의 ‘사랑’ 경험자들과 나눈 실제 인터뷰를 토대로 ‘오늘날’, 즉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들이 만들어낸 ‘사랑의 현장’으로 곧장 파고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 그토록 많은 고통과 상실과 아픔과 눈물이 차고 넘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단히 치밀하게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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