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도시인들에게 지금은 그런 시대다. 일에 치여서 마음을 돌볼 틈이 없다. 마음이야 어떻든 일이 우선이다. 뒷방으로 밀린 마음, 우리는 나중에 마음의 역습을 받는다. 철학자 니컬러스 머리의 말을 되새겨보자. “‘30세에 죽었으나 60세에 묻혔다’라고 묘비에 써야할 사람이 많다.” 마음의 앞선 죽음, 그리고 육체는 마음 없는 세월을 살아가다가 묻힌다. 과연 지금-여기, 30세에 죽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임종을 앞둔 저널리스트 티찌아노 테르짜니가 아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담은,
『네 마음껏 살아라』 의 한 구절도 되새겨보자. “고작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매일 아침 사무실에 나가 주가 변동 그래프의 움직임을 쳐다보면서 ‘샀다 팔았다 샀다 팔았다’ 한단 말이냐? 무슨 인생이 그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는 이유를 아니? 제일 똑똑하다는 애들이 그런 걸 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지난 8월24일, 김천 직지사로 향해 떠나는 길은 그런 마음의 풍경이 떠올랐다. 흥선스님을 뵙기 위함이었다. 바람 불고 꽃 피고, 눈 내리고 구름 피어나는 때마다 그에 어울리는 옛시를 골라 번역하고, 소소한 일상과 감흥을 붙인 에세이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흥선 지음/눌와 펴냄) 출간기념으로 흥선 스님이 독자들을 직지사로 초대했다. 그러니까, ‘직지사에서의 일 줄이고 마음 고요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한 시간.
이 책, 흥선스님이 박물관장을 지냈던 직지성보박물관 홈페이지 <한시 한 소절>에 올렸던 글을 추리고 가다듬었다. 그 시간이 무려 7년 반이란다. 마음을 고요히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녔을까. 그 꾸준함도 놀랍지만, 스님에겐 이것이 일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으리라. 책을 다소곳이 품고 집결한 독자들이 한결 밝은 표정이다. 일을 줄이고 마음 고요한 하루를 만나기 위한 행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한데 버스를 올라타고, 직지사로 향하는 길. 일정표, 책갈피, 물과 간식 꾸러미 등을 받아들고 보니, 짧은 하루지만 서울을 떠난다는 것에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진다. 아무렴, 도시에서의 삶은 늘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일에 함몰되고 지배당하지 않고 내 마음의 행로를 돌아봐야 한다. 마음을 놓칠 때, 삶도 덩달아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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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장구름이 산을 채 가리기도 전에 소나기 퍼붓다가 한바탕 바람 불어 반짝 해가 나면 호수가 하늘이고 하늘이 호수 되는 게 우리네 삶, 깊든 얕든 골짜기와 마루를 오가는 것이 세상살이라면 어느 때인들 장마 구멍 같은 숨 고르기가 필요치 않겠습니까?”(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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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고요 직지사
직지사 가는 버스 안, 출판사에서 한 가지 비화(?)를 알려준다. ‘눌와’라는 출판사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흥선스님이라는 것. 출판사가 세워진 것이 1999년이라면서, 출판사와 흥선스님의 오래된 인연도 언급된다. 오래 묵혀둔 인연 덕분에 독자들도 직지사를 향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천에 다가갈수록 여름의 끝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아마도, 우리는 곧 계절의 흔들림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 김천사.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가득하다. 서울과는 확연히 다른, 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직지사 일주문에서부터 걷는다. 천왕문을 지나 직지사 경내,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우선은 여지껏 보아온 절 가운데 손에 꼽을 만큼 규모가 컸기 때문이고, 경내 전체가 주는 아우라 덕분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했다. 주말임에도, 독자 일행을 제외하면 스님 몇 분, 방문객 몇 분만이 한가로이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왠지 직지사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안내를 따라 약간은 구석진 곳의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뜰이 있는 작은 집 한 채. 직지사 주지스님인 흥선스님의 처소라고 한다. 이렇게 큰 절의 주지스님이 지낸다고 하기에는 소박한 느낌이다. 살짝 들여다 본 그 처소엔 벽마다 빼곡히 책 가득한 책장, 작은 좌식 책상 하나가 전부다. 흥선스님이 이곳에서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의 초고가 된 글을 썼단다. 글을 쓰고 계시는 스님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글과 하나 된 저자의 마음이 조금 느껴진다.
대웅전과 천불전 구역을 지나면서 직지사의 마음 또한 살짝 헤아려본다. 고구려 때 지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국가체제를 정비한 신라 눌지왕 때인 418년, 묵호자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 때인 936년 중건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시절 복구에 들어가 60년 동안 지어졌다. 직지사라는 이름,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토록 오랜 세월 앞에 고개를 절로 숙일 수밖에 없다.
절에서도 배는 고픈 법. 점심공양 차 설법전으로 향했다. 절간음식이자 사찰음식. 깍두기, 나물무침, 오이지, 양배추 절임, 된장국 등에 어우러져 곶감 장아찌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북돋운다. 절에서 먹는 사찰음식, 특별한 느낌이다. 음식에 담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일에 치여 식사를 하는지, 사료를 먹는지 알 수 없는 도시에서의 것과는 분명 다르다. 식사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리라. 우리만의 소셜다이닝이다.
그렇게 점심공양을 하고 자유로이 직지사 경내를 둘러봤다. 흥선스님의 방이 재차 궁금했다. 더 많은 느낌을 받고 싶었나 보다. 스님의 처소에 다시 둘러 글을 접할 때의 흥선스님의 시선으로 뜰을 바라보며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아주 어렴풋하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일부 독자들은 산중다실에서 차를 마시거나 법당으로 향해 직지사를 느낀다. 국보, 보물로 지정된 불교 문화재가 여럿 전시되어 성보박물관을 둘러보기도 했다.
마침내, 흥선스님과 만나는 시간. 성보박물관 앞으로 오셨다. 원래는 직지사에 도착했을 때, 스님과 함께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마침 전국 행자 교육이 있어서 늦게 합류했다는 말씀을 건네신다. 아무렴, 어떻게 만나도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는 법. 약간 늦어졌다손, 스님과의 해후가 그저 반갑다.
대신 흥선스님이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신다.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천불암이라는 법당을 내어주신 것. 주변에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고, 계곡물소리와 매미소리가 운치 있게 들리는 큰 법당이다. 사실 그렇다보니 조심스럽다. 줄 맞춰 앉지 말고 편하게 자리하라는 스님의 정겨운 말씀이 없었다면 그 조심스런 마음은 쉬이 풀리지 못했을 것이다. 각자 편하게 흩어져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 속 생활이 별거 있습니까? 주변 나무, 자연 속에서 살다보니 도시보다 계절 변화를 잘 느낄 수 있어서 그런 소회들을 쓴 글입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먼저 『맑은 바람 드는 집』을 내고, 이어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를 출간하게 됐어요.”
아 그렇구나. 이곳에 있으면, 앞서 처소에서도 느꼈듯이, 글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님, 노래 한 곡 불러주세요.” 출판사 대표님의 대뜸 요청한다. 우와, 스님의 노래? 그건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다. 몇 번을 겸양하시던 스님, 초나라 굴원의 낙향 심정을 담은 <어부가>와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담은 <적벽가>를 직접 읊어주신다. 예전 답사 모임에서도 저녁시간, 詩를 읊어 주시곤 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눈을 감고 듣는다. 특유의 은율이 느껴진다. 천불암 바깥에서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에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부가>에 대해선 여러 고사를 인용하여 뜻풀이도 해주신다. 이어 스님의 속세에서 경험한 군대이야기, 일본으로 떠난 순례이야기, 첫사랑이야기 등 다양한 말씀이 어우러진 가운데, “스님이 되고 나서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은 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런 말씀을 건네신다.
“사실 불편한 점은 많다. 하지만, 불교의 첫 번째 교리인 살생을 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변을 보살피는 것에도 마음을 줄 수 있게 됐다. 주변에서 풀 한포기라도 함부로 꺾지 않게 되는 마음가짐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점이 아닐까.”
‘빨리빨리’ 대신 ‘삶을 삶답게’
산사에서의 마음 고요한 하루,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은 함께 한 모든 독자의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삶의 터전이 있는 도시로 돌아가는 길. 모든 것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을 배우고 돌아간다. 물론 도시에서의 삶이 그것을 매번 길어 올릴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짧은 추억이 남은 삶의 한 자리에서 빛을 발하듯, 일 줄이고 마음 고요한 하루를 선사한 직지사에서의 풍경이 함께 한 모든 이들의 마음에서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곧 다가올 계절의 변화에도 마음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 역시.
한국의 일상을 대표하는 말은 ‘빨리빨리’다. 도시의 삶 또한 그렇다. 반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일상의 결에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은, ‘사부아 비브르(Savior Vivre)’란다. ‘삶을 삶답게’, 즉 삶을 즐기며 삶답게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삶을 삶답게. 잘 먹고 잘 자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거기에 진짜 삶이 있고, 사랑도 예술도 있을 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나눠먹고 커피 한 잔으로 눈빛을 마주치며,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 싱거운 이야기에도 배를 잡고 실컷 웃는 것. 헤어지면서 ‘안녕 또 봐’라고 건네는 것, 이것이 삶이고 이것보다 좋은 게 있을라고. 스마트폰의 카톡에는 이런 것이 없다. 가을이다. 가을. 그리움의 계절. 책에 나온 스님 말씀대로 올 가을에는 편지를 써야겠다. 내 그리움을 향해, 그리고 삶을 위해. 내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사부아 비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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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쓰겠다고 했던가요? 쓰십시오, 친지에게, 벗에게, 그대에게, 그 밖의 누구에게. 띄우세요, 부친 뒤 하고픈 말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런 편지를. 가을이라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쓰니까 가을인지도 모르잖겠어요?”(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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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 흥선 저 | 눌와
바람 불고 꽃 피고, 눈 내리고 구름 피어나는 때마다 그에 어울리는 옛시를 골라 번역하고, 거기에 소소한 일상과 감흥을 붙인 흥선 스님의 에세이집이다. 지은이가 박물관장을 지냈던 직지성보박물관 홈페이지 [한시 한 소절]에 올렸던 글들을 추리고 가다듬은 것으로,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 삶에 대한 성찰이 옛시를 통해 걸러진 정갈하면서 단단한 글에 담겨 있다. 일에 쫓겨 동동거리는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잠시나마 ‘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옛시의 숲에 든다면 휴식이자 충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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