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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지금, 당신 마음이 어떠세요?”

정신과의사 정혜신 『당신으로 충분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감을 말하다 치유의 핵심은 공감, 누구라도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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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마포의 한 도서관 강의실에서 ‘정신과의사 정혜신과 함께하는 공개 상담실’이 열렸다.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그녀의 말에 독자들은 스스럼없이 심경을 토로했다.

정혜신 박사의 저자 강연회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 박사가 독자에게 치유에 대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 독자 모두가 치유자가 되도록 한 것이다. “치유의 핵심은 공감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도 치유자가 될 수 있다”라며 말문을 연 정 박사는 미리 준비해 온 사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사연 속 인물과 나이대가 맞는 한 여성을 일으켜, 그 인물이 되어달라고 주문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사연을 읽던 그 여성은 감정이 이입되며 곧 사연 속 인물이 됐다. 다른 독자들 역시 사연 속 인물에게 질문하듯 여성에게 물었고, 여성은 진심을 담아 답했다.




모든 인간은 치유자이다

정혜신: 치유의 핵심은 공감이에요. 여러분도 충분히 치유자가 될 수 있죠. 오늘 여러분은 한 사연을 듣게 될 거예요. 누가 써서 보냈는지,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왔는지 안 왔는지는 알 수 없어요. 저는 이곳에 자기 사연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될 한 분을 모시려고 해요. 네, 거기 여자 분, 나오시겠어요? 자기소개 부탁해요.

A: 저는 한남동에서 온 서른네 살 여성입니다.

정혜신: 이제부터는 이 사연 속 인물이 되는 거예요. A씨가 저에게 보내 준 사연이라고 가정하는 거죠. 자, A씨가 여러분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이 자리에 왔어요. 사연을 한번 들어볼까요?

A: 저는 서른한 살 여성입니다. 몇 년간 공무원 준비를 하다 포기했습니다. 작년에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회의감이 들었거든요. ‘공부만 하다 내 청춘이 이렇게 가겠구나’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1년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에 갔습니다. 한국에서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호주 생활을 내내 즐거웠습니다. 사실 호주로 떠나기 전 가족과 떨어진다는 걱정도 컸습니다. 특히 전 엄마와 친구이자 자매 같은 사이거든요. 다행히 호주에서의 생활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내가 엄마 없이도 이렇게 잘 사는구나! 이런 게 정신적인 독립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죠. 6개월을 신나게 보내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유방암 3기,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라 수술도 하지 못하고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사흘 만에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호주에 가기 전 옆구리가 결린다고 했던 말을 흘려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간으로 전이됐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호주가 그리워서 정말 우울했어요. 갑작스럽게 떠나온 게 너무 속상하기도 했고요. 요즘 제 일과는 엄마와 산책하고, 밥 먹고, TV보는 게 다예요. 그 외에는 낮잠을 자거나 그냥 누워있는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죠. 엄마가 아프니까 잠깐 외출을 하려고 해도 죄책감이 들어요. 내 인생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은 내 인생보다 엄마를 위해 희생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빨리 자리를 잡아서 안정된 상태에서 엄마를 돌보는 게 맞는지, 엄마를 위해 희생하는 게 맞는지, 절충안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혼란스럽네요. 도와주세요.

정혜신: A씨가 사연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했는데, 어떤 마음이 들어 그랬던 거예요? 엄마가 요즘 어떠세요?

A: 엄마는 유방암 투병 중이세요. 항암 치료 받으셔서 힘드시고 제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시죠. 제가 가장 슬펐던 건 엄마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정혜신: 엄마와 자매처럼,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다른 형제는 있어요? 엄마와 그 형제의 관계는 좋나요?

A: 남동생이 있어요. 관계도 괜찮고요. 하지만 저와 엄마가 더 친해요. 아무래도 동성이니까 서로 마음을 더 잘 터놓는 것 같아요.

정혜신: 여러분도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주세요.

질문자1: 딸이 모든 생활을 접고 엄마에게 매달리고 있는데, 그런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 것 같나요?

A: 미안해하죠. 한편으론 기뻐하는 것도 같아요. 여러 가지 감정이 들 테지만, 가장 큰 마음은 미안함 아닐까요.




정혜신: 질문자1님,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예요? 어떤 게 궁금하셨던 거예요?

질문자1: 전 A씨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하던 공부도 계속 했으면 해요. 그게 엄마를 위해서도, A씨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닐까요. 제가 엄마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정혜신: A씨는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가는 게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확 편해지죠?

A: 그렇진 않아요. 사람이 가진 에너지는 제한적이잖아요. 저는 제가 가진 에너지를 두 갈래로 나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욕심 부리다 보면 둘 다 제대로 못 하게 되죠. 전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게 제 맘도 편하고요.

정혜신: 호주 생활을 접고 귀국해야 했을 때의 아쉬움도 크다고 말했어요.

A: 사실 그런 생활은 다시 할 수 있어요. 호주는 다시 가면 되지만, 엄마는 돌아가시면 모든 게 끝나버리니까…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혜신: 여러분 중 또 다른 생각이 있나요?

질문자2: 저도 자녀는 10여 년 간 혼자 키우고 있지만, 자식이란 존재가 가끔은 바윗돌처럼 느껴져요.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에게만 몰입해야 하니까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일 년 반 정도 아이를 떼 놓고 유학을 다녀왔었는데, 정말 살 것 같았어요. 아이가 혼자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죠.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꿈을 포기하지 않고 평소대로 행동해주길 바랄 것 같아요. 이 고민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딸이 갈 길을 가고 엄마를 지켜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혜신: A씨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질문자2: 답답해요. 대안이 없어 보이지만, ‘왜 그렇게 사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정혜신: 또 다른 생각은 없나요?

질문자3: 전 엄마가 아팠을 때 다른 형제들에게 책임을 떠넘겼어요. 사연을 들으니 제가 참 못됐었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정혜신: 솔직한 답변이네요.

질문자4: 엄마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엄마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셨나요? 혹시 엄마는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데, 딸이 함께하길 원하기 때문에 양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서요.

A: 그런 대화는 하는데요. 엄마가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최대한 엄마가 원하는 걸 해드리려고 하고요.

정혜신: 진짜 엄마가 원하는 걸 딸한테 말할 수 있냐? 혹시 눈치 보느라 말 못하고 있는 건 아니냐? 라는 질문이거든요. 이별을 목전에 둔 모녀일 수도 있잖아요. 그만큼 두 사람이 바닥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하고 있어요?

A: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이기적이었던 것만큼 엄마가 나에게 이기적이었던 적은 없었어요. 그 정도의 비율로 대화가 되는 것 같아요. 엄마의 입장에서는 바닥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혜신: 네, 다음 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질문자5: 먼저 A씨에게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도와달라고 하셨는데, A씨가 훗날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면 해요. 만약 저라면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택할 것 같아요.

정혜신: 방금 대단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질문자5: 저도 호주 생활을 해봤는데 다신 못 가질 것 같은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이었어요. 그런 것을 모두 정리하고 부모님 곁에 있고 싶은 마음 하나만 갖고 귀국한 게 저는 대단하게 느껴져요. 인생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지만, 전 어머니에게 투자하는 그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정혜신: 옆에서 엄마를 간호해주는 것, 그것 자체로 훌륭하고 인정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네요. 이 이야기를 듣고 A씨는 어떠셨어요?

A: 위안이 됐고요. 많은 분이 말씀해주셨는데, 이 말은 꼭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엄마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저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가 좀 더 이기적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일 엄마가 혼자 있길 바라더라도,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시간을 달라고 요구할 것 같아요.




정혜신: 자, 여러분 앞에 팻말이 있어요.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요’, ‘나도 그런 적 있어요’, ‘당신이 옳아요’라고 쓰여 있는데요. A씨가 볼 수 있도록 팻말을 들어 주시겠어요? 네, A씨 힘든 이야기 해주셔서 정말 고맙고요. 이제는 정말 A씨로 돌아오세요. 사연을 읽으면서,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왜 그랬던 거예요?

A: 제 직업은 암 환자를 돌보는 의사예요. 일을 하다 보면 감정의 벽을 쌓는 저를 발견해요. 환자와 보호자가 가장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 모습을 보는 저도 무척 힘들거든요. 사연자가 되어보니 나를 방어하기 위해 쳤던 감정의 벽이 무너지는 기분을 받아요. 말기암에 투병 중인 사람이 내 엄마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어요.

정혜신: 암 환자를 말하면서 울 수 있는 의사를 만나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도 막상 얘기를 하려면 도대체 어떤 얘기를 해야 하는 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해한다. 자기의 진심, 속마음을 현실의 누군가에게 제대로 말해본 경험이 전무해서 그럴 수도 있고 정신과 의사에게 말하려면 잘 정리해서 제대로 표현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고(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사가 자기를 무시하지나 않을지 염려하기도 한다) 자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아픈 얘기를 끝도 없이 하면서 위로받고 무언가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떤 이야기만큼은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둘 사이에서 말하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한발 더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상담자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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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으로 충분하다 정혜신 저 | 푸른숲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주치의로 자리 잡은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의 신간 『당신으로 충분하다』가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이 개발한 개인맞춤형 심리분석 프로그램인 ‘내 마음 보고서’ 결과 가장 평균적 모습을 보인 30대 여성 4명과 정혜신 박사가 6주간 진행한 집단 상담을 토대로 했다. 기존의 심리서가 특정 문제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법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 책은 상담참석자들이 자기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덮어둔 상처를 용기 있게 대면하며 치유에 이르는 상담실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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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현희

담백한 만남, 담백한 인생. hhpar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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