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겸허하게 성찰하는 자에게만 역사는 미래의 문을 살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7월 22일 저녁 예스24와 위즈덤 하우스 주최로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한가람문화역사연구소 소장 이덕일 저자가 독자들을 만났다. 주제는 역사 속에서 왕을 만든 김유신, 정도전, 김육 세 신하였다. 이덕일은 역사를 해석할 때 그 시대 속에 들어가서 사건을 조명할 수 있는 ‘당대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사와 한국사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중국사는 참모사다. 반면 한국사는 군주사다. 유방이 항우보다 뛰어났던 것은 참모를 영입하고 활용한 능력이 뛰어난 덕택이다. 스승 사(師)가 붙는 왕사와 국사들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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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출처: 위키피디아] |
김춘추와 김유신, 새로운 아젠다 ‘삼국통일’을 제시
김유신은 가야계 김서현과 진흥왕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사회에 존재하던 가야계에 대한 유리 천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라사회의 주류로 성장하기 위해, 왕족 출신이었지만 약점이 있는 김춘추를 세우는 방법을 택한다. 김춘추는 왕족 출신이었지만 조부 진지왕이 사람들에게 폐위되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왕족 출신이지만 진골이었다.
김유신은 누이였던 문희를 춘추의 첩실로 들이게 함으로써 신라사회의 주류로 발돋움 하려 하지만, 정실이었던 부인과의 두터운 정 때문에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김유신은 진평왕 51년인 35세부터 선덕여왕 11년인 48세까지 역사 속에서 공백기를 보이게 된다. 김춘추의 정실부인 사이에서 난 딸 고타소 부부가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김유신을 찾아가 백제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삽혈동맹을 맺고 이 둘의 결합은 ‘삼국통일’이라는 새 어젠다로 이어졌다. 후에 김춘추는 신라의 제 29대 태종무열왕위에 오른다.
유신이 유리천장을 극복하는 과정 가운데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김춘추를 끌어들였다. 또 성별보다는 출신 성분이 중요했던 시기의 첫 여왕이었던 선덕이 이들을 등용하면서 하나씩 부족했던 세 사람의 만남이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한편 이덕일은 견훤과 궁예가 꿈꿨던 통일,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사례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견훤과 궁예는 신라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왕건은 신라가 자발적으로 투항하도록 유도했다. 이덕일은 전자와 후자 중, 지금 우리는 남북 통일에 어떤 것을 취해야 하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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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출처: 위키피디아] |
정도전, 혁명과 개혁 사이에서
유교문화권에서 혁명사상의 뿌리는 공자가 주창한 대동(大同)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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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로지 밭에 있을 뿐이다. 몇 무밖에 안 되는 밭을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갈아봤자 부모와 처자를 먹여 살릴 만큼도 안 되는데 소작료를 걷는 자들은 이미 와 있다. 밭주인이 한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적은 곳은 서너 명이요 많은 곳은 일고여덟 명이다. 어찌해보려 해도 할 수 없으니 누가 기꺼이 소작료를 갖다 바칠 것인가. 밭의 소출로는 소작료도 다 바칠 형편이 못 되는데 어디에서 이자를 낼 것이며, 무엇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먹여 살릴 것인가.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이다.
-《고려사》 〈이색열전〉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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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체제 변화는 극심한 양극화에서 시작한다. 이때 사회는 혁명과 개혁이라는 갈림길에 놓인다. 크게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1987년 민주화 이래로 30년 동안 개혁을 외치지만 지금까지도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정도전을 거론했다.
정도전이 내세웠던 혁명 이론은 토지제도의 혁명적인 개혁이었다
“나는 참 유배가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한 마디에 강연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정도전은 지금의 나주인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 곳은 하층민이었던 부곡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정도전은 이때 직접 농사를 짓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깨닫게 되면서 “백성의 수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겠다는 ‘계민수전’을 구상하게 된다. 정도전과 함께 역성혁명파였던 조준의 토지 개혁 상소는 정도전이 구상한 ‘계민수전’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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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시중(고려의 최고위직)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관에 있는 자는 물론, 군역에 종사하는 모든 자와 백성 및 공사천인公社賤人으로 적에 올라 국역을 맡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고려사》 〈조준열전〉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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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과 함께 역성혁명파는 권력을 장악했고, 공양왕 2년(1391년) 9월 고려사 식화지에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서울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그리고 난 후에 공양왕 3년인 1392년에 과전법이 시행되었고 조선이 개창되었다. 비록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지만 중, 후로 갈수록 군역과 공납 문제가 심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인 사람은 병역의 의무를 돈 주고 피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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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출처: 위키피디아] |
정책으로 군주를 보좌한 잠곡 김육.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
저자는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배지에 가 있던 김육이 ‘대동법 시행’의 약속을 받고 효종의 우의정 승진을 받아들인 과정을 설명했다. 대동법은 부자 양반이 반대했다. 기존의 세금 부과방식이 재산에 상관없이 비슷한 액수를 내야했던 데 비해 대동법은 농지 크기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부자에게는 불리한 제도였다. 하지만 경기도에 시범실시를 한 결과 백성들에게 좋은 제도임이 판명이 났다.
서인세력은 대동법의 실시를 놓고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하는 한당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산당으로 분당되어 갈등을 겪었다. 한당의 당수는 잠곡 김육이었고 산당의 당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었다.
“대동법은 기록에 의하면 두 가지 중요한 영향을 가지고 왔다. 첫 번째로는 현종 11-12년에 있었던 경신대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고, 두 번째로는 선대제로 수공업자를 지배하여 현대 상업주의가 시작된 기원으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했다.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이덕일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우선 요새 말하는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인문학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대학의 위기는 곧 분과 학문 체계의 위기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분과 학문으로 나누어 놓으면 사람들이 통합적으로 사회를 볼 수 없다. 그가 역사를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덕일은 자신이 쓴 역사책이현재 사회에 잘 적용하고 독자가 사회를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역사학에서 일제의 잔재를 걱정했다. 강점기에 일본이 조작한 역사가 많은데, 이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자민당의 압승은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 및 역사 문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우리 모두 유심히 지켜보기를 권했다.
저자는 역사가 ‘옛날에 있었던 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1차적 사료를 해석할 것인가로 시작해서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조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며 강연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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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나 이덕일 저 | 역사의아침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저자 이덕일이 이번에는 권력의 2인자, 왕을 만든 사람들을 재조명했다. 김유신부터 홍국영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꿰뚫은 킹메이커들을 살펴보면서, 시대의 변화를 이끈 핵심 코드가 무엇인지 하나씩 밝히고 있으며, 한 시대의 권력은 단지 군주의 선택과 결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저자 특유의 이야기처럼 읽히는 문체와 군주사 중심으로 보는 한국사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한국사 전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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