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근사한 내일을 위해 오늘 담벼락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못 본다면, 내 아이와 단 1분도 눈을 마주보지 못한다면, 불행히도 그건 버티는 삶이다. 물론, 살다보면 두 주먹 불끈 쥐고 견뎌야만 하는 시기도 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우리에겐 일상이 있다. 그 일상 속에 찾아지길 갈망하는 행복들이 있다. 너무 당연해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던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 프롤로그 옮긴이의 넋두리 중에서- (p.13~14)
어려운 책을 냈다.
정말 부끄러운 결과물이지만, 열심히 만들어주셔서 마냥 겸손해선 안 될 것 같다. 4개월 약간 못 미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원제는 ‘인생이 준비하는 것들’이다. 내 인생 가치관은 나라에서 자격증 준 사람의 말을 잘 따르자는 거다. 그래서 PD, 작가 말 잘 듣는다(웃음).
어떤 책인가, 소개해줬으면 좋겠다.
정선희: 가수, 배우, 소설가 시인인 가와카미 미에코의 에세이다. 하루를 채우는 무수한 감상, 사건, 사람 등에 대해 적고 있다. 가와카미는 2008년, 일본의 아쿠타가와상을 탔다. 문체가 특별하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이 우리나라엔 어필이 많이 돼 있는데, 그네들한테는 일본 여자 특유의 느낌이 있다면, 가와카미는 그렇지 않고 독특하다. 전형적인 일본 여성 작가 이미지가 아닌, ‘얘는 뭐지?’ 이런 똘기가 있다. 크레이지, 광기, 똘기 같은 느낌이 매력 있잖나. 상식의 선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시작부터 ‘빤쭈’ 얘기부터 한다. 에세이 첫 출발이 팬티라니(웃음). 그렇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지금 이 도시에 차고 넘치는 따스하고 친절한 ‘힐링 도서’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멘토’의 힘찬 메시지와도 거리가 멀다. 그저, 다소 엉뚱하면서도 골똘한, 가와카미 미에코라는 한 여자의(우리나라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의), 생각의 단편들이다. 그저 그녀의 일상이고 삶의 이야기다.”(p.12)
가수 린이 등장했다. 정선희는 그녀에 대해 “사랑스러움에 있어서 국내에서 따를 자가 없다”며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여성성을 갖고 있고, 섬세한 필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가창력을 갖고 있는 팜 파탈”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 어떤 사이냐. 무척 친한 것 같다.
정선희: 내가 예뻐하고, 린이 나를 많이 따라준다. 작은 무대의 호흡을 즐기는 친구다. 섬세하고, 통할 것 같아서 이 자리에 불렀다.
린: 선희 언니가 훌륭한 감성을 갖고 있는데, 번역까지 했다고 해서 더 대단해 보인다. 언어에 관심이 많고, 공부도 많이 한 걸 알고 있었지만, 책을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언니 스타일이 담겨 있더라.
책은 일상에 대한 내용이다. 두 사람 연예인으로서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언제인가?
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와서 닭발에 소주 마실 때(웃음)! ‘아, 일 끝났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마실 때가 좋다.
정선희: 대중의 환호를 뒤로 한 고독한 아티스트? 천만에 린도 겁나게 술 마신다(웃음). 린은 1분 1초도 자지러지게 즐기는 친구다. 이런 친구만 있다면 신도 인간을 만든 보람이 있겠구나 싶다. 같은 1분 1초를 쓰더라도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에겐 신도 만든 보람을 못 느낄 거다. 린은 길가에 핀 꽃을 보고 감탄할 줄 아는,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친구다.
린: 얼마 전에 우울한 날이었는데, 운전하다가 언니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었다. 전화로 청취자와 대화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친언니처럼 청취자에게 이야길 해주는데, 이런 사람 아니면 누가 DJ를 하지 싶더라. 진정한 소통을 한 거지. 그때 언니가 가진 에너지가, 말이 내게 해준 응원의 메시지 같아서 무척 좋았다. 언니가 내 이름 불러주는 것이 참 좋다. 언니의 많은 재능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린이 자신의 노래 두 곡을 불렀다. 「실화」와 「사랑했잖아」. 간간이 가사를 잊어먹고는 이를 애교로 넘기는 린의 모습에 관객들은 “귀엽다”를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노래 두 곡을 마치고 다음 일정 때문에 린은 자리를 옮겼다.
린은 정말 사랑스러운 스타일이다.
사실 내가 친해질 수 없는 스타일인데, 10년을 만났는데 한결 같다. 몇 년 동안 내가 어려운 일을 되게 많이 겪었는데, 린의 웃음을 왜 지나치고 살았지, 싶은 생각이 들더라. 소소하고 예쁜 일상을 잘 즐기는 친구다. 나도 오늘 린이 하는 걸 보고 애교를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일동, 귀여워요~)
린이 라디오를 듣다가 힐링 됐다고 했다. 책 번역하면서 뭐가 어려웠나?
번역을 했지만 저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책이 나오고 쇼케이스를 하는데, 홍진경이 묻더라. 언니가 번역자잖아, 번역자가 이렇게 판을 크게 벌려도 돼? 저자가 알고 있어?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더라(웃음). 5만 부가 팔려도 가와카미를 만나게 될지는 미지수다(웃음). 번역하다보니 내 호흡을 넣게 되더라. 그게 좀 미안하긴 했다. 윤문 작업하면서 두 가지를 병행했다. ‘한국 독자에게 어떻게 하면 편하게 다가갈까’와 ‘원작자의 기본 틀을 해치면 안 돼’. 그게 좀 까다롭더라.
요즘 중국어도 배운다고 들었다.
중국어는 내게 맞지 않는 것 같다. 4개월째 하고 있는데, 맞질 않아서 그만하고 스페인어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홍진경의 말을 빌자면, 내가 11개 국어 정도 배우다가 죽을 것 같다고 하더라. 마지막은 티벳어나 몽골어로 하면 어떨까(웃음)?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어땠나?
알다시피 내가 휘몰아치는 폭풍우도 맞았다가, 위기의 감성을 느꼈다가 넘어갔는데, 일상에서 우울한 뭔가가 확 덮치더라. 그러면서 느꼈던 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것이었다. 내게 관심을 꺼달라고 하다가도 정작 관심이 꺼지면 못 사는 것이 연예인이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와 평범한 일상이 적응이 안 되는 거지. 거칠고 험난해도 그게 낫다. 그런 순간에 이 책을 만났다.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 본 지난 3개월, 번역이라는 힘든 과제를 떠안은 기간이었음에도, 나는 삶이 고단하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도, 강하고 힘차게 긍정적으로 밝고 명랑하게 살아내면서도, 때때로 나는 사는 게 참 고단했었건만,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 나는 웃고 있었다.”(p.13)
일본어를 한 것은 스무 살부터다.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였는데, 사실 에세이 번역이라서 망설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문학작품이라 행간의 의미도 파악해야 해서 걱정하고 겁을 냈다. 그래도 도전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시 뭔가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펼치면서 번역하다보니 만만치가 않더라. 나중에 알았는데, 작가가 철학을 전공했더라. 이 사람이 우리가 쓰는 일본어를 안 쓴다. 1920년대의 언어와 에도시대 문법을 쓴다(웃음). 내가 말을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번역은 또 다른 장르라는 것을 알았다. 번역은 결코 만만하지 않더라. 번역하는 분들에게 무릎 꿇고 싶더라. 이번 번역을 하면서 내가 한국말을 잘 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국어사전을 더 많이 봤다.
번역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일본 동북부 3.11 지진을 언급한 부분을 번역하면서 내 깜냥으로는 이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더라. 액면 그대로만 전달하는 그냥 블랑카가 되는 거야(웃음). 속상해서 울었다. 한계에 부딪혀서. 그때 하루키 소설의 번역자인 김남주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접했다. “하루키 소설을 번역하면서 떠나지 않는 굵직한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김남주 선생은 “하루키의 문학을 사랑한다”는 답을 하더라. 문장이 안 풀리면 하루 종일 곱씹는다고 하면서. 그걸 보고 깨달았다. 내가 번역이 아닌 독해를 하고 있었구나. 이게 번역과 독해의 차이구나. 나는 저자와 친해질 생각을 못했구나. 그때부터 원고를 놓고 다 덮고 책을 다시 천천히 읽었다. 전작도 읽고. 의역이라고 한 것도 흉내를 냈던 거였다.
“무수히 많은 슬픔 중에는 언젠가 잊어버리게 될 것도 있겠고, 어떻게 해봐도 절대 잊지 못할 것도 있을 것이고, 그 슬픔의 맥락이라는 것도 날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변할 수도 있는 것이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p.274~275)
많은 고민을 하면서 냈는데도, 청취자와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 책이 참 재밌더라. 역주가 인상적이더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
저자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듯 역주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일본이 쓰나미로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일본 국민가수의 공연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떻게 역주를 달까 고민하다가 노사연의 만남 같은 것이라고 다가가고 싶었다. 일본에선 유명해도 우리가 모르면 살갑게 다가올 수 없으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이라면서 역주를 붙였다. 또 가와카미가 방송을 하는 분이라 팬을 만나곤 하는데, 애매한 장소에서 팬을 만난 에피소드가 있다. 속옷과 관련한 에피소드인데, 점원들이 챙겨주잖나. 탈의실에 가서 전투적인 얼굴로 사이즈에 맞는 브래지어를 입는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으로 탈의실에 함께 들어와서 점원이 계속 팬이라고 말하는데, 뭐라 리액션을 할 수 없어서 허공을 바라보며 ‘그러셨군요’하는 자질구레한 에피소드 인데, 저자가 굉장히 매력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소심하고 어떤 때는 발상이 독특하다. 그러면서도 참 따뜻하고 예쁜 사람이다. 그래서 얘기하듯 역주를 쓰고 싶었다.
인생이 알려준 것들가와카미 미에코 저/정선희 역 | M&K
2008년에 『젖과 알』이 제138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팔방미인 가수 출신 작가’로 언론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았던 기와카미 미에코의 에세이집이다. 학교 내 왕따 문제를 통해 선과 악의 근원을 묻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 『헤븐』은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일본 최대 서점 기노쿠니야 직원들이 뽑는 2010년 최고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그는 이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여성 작가에게 수여하는 무라사키 시키부 문학상까지 거머쥔다.
MBC 정오의 희망곡에 이어 SBS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라디오는 늘 우리 곁에 머문다.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동네 언니와의 수다처럼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우리를 웃겼다가 울렸다가, 고된 삶에 힘이 되어주고, 가끔은 “힘 빼!”라며 독설도 주고, ‘그냥 한 번 웃지요!’, ‘슬픈 땐 또 한 번 웃지요!’하는, 그냥, 뭐, 인생 같다. 이번 번역에세이 『인생이 알려준 것들』 역시 라디오와,..
무라카미 류의 전폭적인 지지로 제13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카미 미에코의 에세이
라디오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포근하게 풀어낸 MC 정선희 최초의 번역 에세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무수한 감상들, 사건들, 사람들, ‘일상의 한땀 한땀’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허섭하게 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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