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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나의 다정한 그림』 권란 도란도란 다정한 미술관 수다와 그림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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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8일,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나의 다정한 그림』의 저자 권란 기자의 만남 제안에 응답한 독자 몇몇이 모였다. 권란 기자와 함께하는 미술관 산책에 초대 받은 사람들. 서울미술관 <Love Actually>전을 함께 둘러보기 전 서울미술관 카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야말로, 다정한 만남이었다.

사는 것은 행복으로, 기쁨과 즐거움만으로 채울 순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이 힘들거나 일이 고단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로운 순간도 다가온다. 그럴 때 삶을 구원해주는 매개가 있다면, 삶은 유지된다. 찰나처럼 다가오는 기쁨과 위로의 순간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법이 없다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음악이고, 혹자에겐 영화이거나, 어떤 사람에겐 고양이일 수도 있다. 그런 매개를 통해 세상은 반짝 빛이 난다. 삶을 지키도록 지켜주는 빛이다. 권란 기자(SBS)에겐 그런 빛이 스며드는 순간엔 그림이 있었나보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이 힘들 때, 일이 고단할 때,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로울 때,
누구나 그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이 필요했던 순간을 담아 『나의 다정한 그림』을 펴냈다. 아울러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독자들과의 만남을 청했다.




미술관 내 카페, 따듯하고 다정한 만남

권란 기자의 독특한 이름은 언론계 안팎에서도 에피소드를 낳고 있었다. 같은 이름(란)의 다른 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란’의 (언론)계모임이라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다.

“뉴스는 대개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데, 이름이 독특해서인지 기억해주는 분들도 있다. 흔치 않은 외자 이름인데다 언론계에 몇 명이 있다. 같은 회사엔 문화, 영화 담당인 후배 류란 기자가 있다.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KBS에도 류란 기자가 있고, 중앙일보에는 고란 기자가 있다(웃음).”

권 기자는 현재 미술계를 출입처로 두고 있다. 방송에서는 다른 분야의 취재에 비해 빛이 덜 나고 노출도 많지 않은 분야다. 그렇지만 그는 미술계 취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좋다.

“미술을 취재 분야로 맡고 나서 기분이 좋았다. 뉴스에서는 미술 작품이 정적이라 생각해서 별로 재미없는 아이템이다. 취재해도 (방송에) 잘 나가지 않는다(웃음). 그래서 방송에 나가려면 제목이 섹시해야 한다. 가령 ‘그림 속에 소녀시대가?’처럼 말이다.”

“저는 그림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림 보는 일이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그래서 신입 기자 시절부터 문화부로 꼭 오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미술 관련 출입처를 맡고 싶었습니다. 어찌 아니 그렇겠어요. 미술 담당 기자가 되면 시간만 나면 찾아다니며 보던 그림을, 일로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업무 시간에 전시도 보고, 게다가 인터뷰를 핑계로 평소 궁금했던 작가들도 만날 수 있으니 매일 밤 바라고 또 바랄만도 하지요.”(p.5~6)
그림을 좋아하던 권 기자, 퇴근해서도 블로그에 2~3시간 매달려서 그림 관련한 포스팅을 올렸다. 회사 블로그에 포스팅 1건당 7,600원의 인센티브가 있고, 우수 아이템으로 뽑히면 10만원(세전)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포스팅을 올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것이 책으로까지 연결됐다.

미술계 취재가 보도와 늘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혹은 예술을 설명해야 하는 애로가 있을 법도 하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뉴스는 대개 40~50대 아저씨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한 번은 댄스를 주제로 한 전시가 있었다. 획기적이고 재미있는 아이템이었다. 남성 발레리노가 발레리노 복장이 아닌 트레이닝 복 팬츠에 맨발, 민소매로 춤추는 전시를 취재했다. 회사에선 방송을 나가려면 왜 트레이닝 복을 입었는지 이유를 달라는 거다. 그런데 예술에 꼭 이유가 있나. 이유는 못 달고, 이렇게 멘트가 나갔다. ‘예쁜 발레리나가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남자 발레리노가 민소매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춘다’고 보도가 나갔다(웃음).”

책에 대한 반응은 어땠을까?

“언제 이렇게 미술에 관심 있었는지 묻는 반응도 있었고. 사실 사회적으로 여기자에 대한 편견이 있다. TV에 얼굴 내고 싶어서 기자가 됐다고 보는 시선도 있고, 책 낸 것에 대해서도 일 안 하고 이름 내려고 했다는 시선도 있다. 3~4년 정도 되니까 극복이 되긴 했는데, 사회적으론 아직 (여기자가) 결혼하면 나갈 테니 그때까지는 부려먹어야지, 하는 시선도 있다.”

“‘여기자들은 결혼하고 나면 ‘파이팅’이 떨어져.‘ 여기자들은 공공연히, 종종 이런 말들을 듣고 산다. 최근 들어 언론사마다 여기자의 비중이 예전보다 훨씬 늘기는 했지만, 전체 기자 수를 따져보면 여전히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다.”(p.152)
아직 이 사회엔 남성우월주의가 곳곳에서 힘을 발하고 있다. 언론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권 기자가 전하는 얘기도 그렇다. 여성 기자가 집안일로 전화를 하면, 회사에서 집안일 한다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반면, 남성 기자가 집안일로 전화를 하면 자상한 아버지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단다. 야근하는 당직자가 여자들로만 구성된 경우가 있었다. 한 부장이 이것을 보고는 “여자들만 있어서 물 먹을 수 있으니(낙종할 수 있으니) (남자 기자를 가리키며) 잘 지켜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멘탈 붕괴(멘붕)’ 상태가 됐던 여성 기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고 사과를 받아냈다.

“여기자들을 대하는 동료 남자 기자들의 시선에는 아직 편견이 남아 있다. ‘우리 OO이 오늘 학교 잘 다녀왔어? 아빠 보고 싶었어요? 오늘 일찍 들어가서 같이 놀자.’ 아이와 이런 통화를 하는 남자는 ‘일도 잘하고, 가정적이고, 자상한 아빠’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우리 OO 밥은 먹었니? 학원은 다녀왔고? 엄마가 일찍 가게 되면 같이 저녁 먹자.’ 이런 말을 하는 여자는 ‘일은 내팽개치고, 애만 챙기는, 어쩔 수 없는 여자 직원’으로 치부된다. 때로는 이런 꽉 막힌 이분법적인 사고에 깜짝 놀라게 된다.”(p.159)
처음 책이 나올 때, 권 기자도 걱정을 많이 했다. 사적이고 문화적인 이야기가 많고, 상대적으로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원고를 쓰고 친구에게 보여줬다. 친구가 말하길, “누가 너 얘길 궁금해 해?” 친구의 말에 끄덕였는데, 바꿀 수가 없었고, 외려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렇게도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어떨까.

“영화도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다르듯, 그림도 그렇다. 책을 쓰면서 블로그에 소홀하게 되더라. 한 번 안 쓰기 시작하니까 안 쓰게 되기도 하고(웃음). 일상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미술 작품이 되게 많다. 청계광장 입구에 있는 소라기둥 조형물인 ‘스프링’은 팝아트 거장 올덴버그의 작품이다. (추천해줄만한 미술관이 있다면요?) 좋은 미술관이 많다. 신사동 호림아트센터에서 요즘 민화전을 하고 있는데, 볼만하다. 사립미술관인데, 좋다.”

“저는 그림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작품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내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에 주목해보세요. 만약 어떤 작품이 마음에 와 닿았다면 그 작품은 누가 뭐래도 ‘나만의 걸작’이지요.”(p.7)


<Love Actually>를 만나다

다정한 만남은 한 편의 로맨틱 영화처럼 달콤하고 따듯한 전시, <Love Actually>를 통해서도 이어졌다. 영화의 키스, 포옹 등 사랑 장면들을 이어붙인 프롤로그,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촤르르 돌아가고 있다. 내겐 <원 데이>가 대번에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랑해도 될까요(Shall we love)?’로 넘어간다. “사랑은 용기와 타이밍”임을 알려준 <아멜리에>를 비롯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미술작품으로 승화된다. 잊을 수 없는 이 대사까지 곁들여서. 떠나려는 샐리를 붙잡는 해리의 대사였다. 그것은, 사랑!

밖이 21도인데도 춥다는 당신을 사랑해.
샌드위치 주문에도 한 시간 걸리는 당신을 사랑해.
날 볼 때 미친놈 보듯이 인상 쓰는 당신을 사랑해.
헤어진 후 내 옷에 배어있는 향수의 주인 당신을 사랑해.
잠들기 전까지 얘기 할 수 있는 당신을 사랑해.


‘소년, 소녀를 만나다(Boy meets girl)’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첫 키스 직전의 토마스와 베이다였다. <마이 걸>. 어떻게 그들을 잊을 수가 있을까. 소녀와 소년의 이 풋풋한 사랑.

“눈 감아!”
“그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셋에 하는 거다!”
“하나” “둘” “둘 반” “셋!” 그리고 입맞춤.


“그대의 영혼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마이클은 한나와 여행을 떠나면서 그런 독백을 남겼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 이 영화를 품은 섹션은 ‘그대와 영원히(With You Forever)’였다. 같은 섹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함께 한다. 주부인 프란체스카의 일상에 일생일대의 사건처럼 다가온 사진작가 로버트의 고백이 애잔하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당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따라가지 않은 프란체스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작가 임정은은 색색 유리조각으로 만든 커다란 하트로 이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점점 농염해지는 사랑은 ‘유혹의 소나타(Sonata of Allurement)’를 통해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장지아 작가의 ‘Sitting Young Girl’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색, 계>의 왕치아즈의 고백이 아른거린다. “그는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 들어와요. 그 뱀은 심장까지 공격하죠. 하지만 언젠가 내 심장이 굴복하고 말 것 같아요.” 사랑, 그것은 누군가에겐 어쩌면 나락의 쾌감을 안겨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미친 사랑의 노래(Crazy Love Song)’라는 섹션에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글루미 선데이>의 자보는 일로나라는 사랑의 포로가 된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다. “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파멸해도 좋은 것이 사랑일까.

그러나 유혹과 파멸이 영원할 순 없는 법. 사랑은 가고, 남는 것은 우리다. ‘사랑, 그 후…(Love, and After…)’ 섹션의 <화양연화>가 방점을 찍는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돌아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가 나비가 캔버스 위에 박제된 작품 ‘무제’를 통해 사랑 후에 남은 것들을 보여준다. 박제됐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사랑 그 씁쓸함에 대하여. <냉정과 열정사이>를 건너, <러브레터>도 묻고 있었다. 설산, 잊을 수 없는 한 마디. “오겡끼데쓰까(잘 지내나요)?”

“세상에 생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 어디 있을까. 또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p.58)
에필로그는 다시 키스. <시네마천국>, 토토는 알프레도가 남긴 키스 장면만 모은 영상을 보면서 회한에 젖는다. 우리라고 아닐까. <첨밀밀>, 차 안에 있는 이요와 차 밖에 있는 소군이 나눈 키스. 가장 사랑하는 키스 장면 중의 하나다. 내 발길이 멈춰있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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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한 그림 권란 저 | 중앙북스(books)
미술을 전공한 적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지만 누구보다 미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지은이는 미술작품들을 자신만의 특별한 시선으로 읽어냈다.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고, 미술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하기보다, 자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에 주목하여 작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랑, 이별, 가족, 친구, 일, 꿈 등을 소재로 서른 즈음을 살아가며 한 번쯤은 고민해 봤을 법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 해답을 미술작품에서 찾고 있다. 힘들고 고단하지만 다시 한 번 힘을 내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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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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