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아버지의 만화방 덕분에 언제나 문화충격 속에 살았지요”
『아버지의 일기장』 출간한 박재동 화백 아버지 때문에 내가 구제된 게 아닌가 싶어요
박재동 화백, 아버지가 만홧가게로 생계를 꾸린 까닭에 들은 만화가가 된 걸까.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장을 읽으며 고단했던 아버지의 세월을 감히 측량해보았다.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던 아버지는 일기장 속에서는 한없이 따뜻했다.
“재주 있는 사람은 덕을 상하기 쉽다. 항상 손을 보는 사람이 돼라.” 소년 박재동이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자녀들의 교육만큼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생각하는 삶’을 강조했다. 좀처럼 만사태평인 날은 찾아 오지 않았지만, 항상 현재에 충실했던 아버지는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마흔이 되던 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그리고 아들 박재동은 환갑이 되어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냈다.
박재동이 엮은 고 박일호의 일기 『아버지의 일기장』는 대한민국 1970, 80년대를 살아간 서민들의 녹취록이다. “자식은 옆에 있어도 부모가 하는 일은 모른다”며 부모가 살아온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자 한 아버지의 기록이다. 박재동은 “아버지는 자신의 일기장이 세상의 책으로 나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아팠던 아버지가 일기를 쓰셨다는 건 알았지만 차마 모두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양이었다. 『아버지의 일기장』를 엮으며 진짜 내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이 출간되고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아버지는 어머니의 꿈 속에 나타나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일기장을 통해 아버지의 맨 얼굴을 마주한 박재동 화백을 만나, 켜켜이 쌓인 부정(父情)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자란 아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신 아버지의 기록이에요. 아버지가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하시다 몸이 편찮으셔서 만홧가게를 열게 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평범하게 교사를 계속 하시거나 회사원을 하셨더라면 만화가 박재동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홧가게 덕분에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문화충격을 받았으니까요. 제가 방황 끝에 민중미술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을 거예요. 매일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두 몇 봉, 떡볶이 몇 봉, 하면서 동전 하나하나를 세며 계산을 하셨고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거든요.”
책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쓰셨던 아버지,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책과 화구만큼은 꼭 사주셨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라며 좀처럼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아들이 고등학교 때 전교 꼴찌를 하자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이라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셨다.
“어렸을 때 송곳으로 장판을 쪼개도 ‘잘 그렸다’며 혼내지 않던 아버지셨어요. 할아버지는 땅을 갖는 게 소원이셔서 자식들에게 땅을 물려주셨는데 아버지는 공부를 하겠다고 지게를 부숴 버리셨다고 해요. 농사를 지으면 공부를 못하니까요. 결국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되셨는데 몸이 아파 꿈이 좌절되니까, 자식들만큼은 건강하게 자기 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셨어요. 그 꿈을 향해서 평생을 살아오신 거죠. 아버지는 매일같이 점포에서 매상 걱정을 하셨는데 저는 그걸 안 했잖아요. 결국 아버지께서 희생을 해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다는 생각도 들지요.”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내며 박재동은 아버지에게 퍽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네 평범한 인생사를 뭐 그리 열심히 적으실까 생각했는데, 20년 세월이 빼곡히 들어있는 일기장을 제대로 펼쳐보니 이제서야 아버지의 고단함을 깨닫는다.
“만홧가게를 하면서도 신문을 그렇게나 꼼꼼히 보셨는데,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어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데 뭘 저렇게 열심히 보시나 싶었죠. 그런데 꼭 사회적 영향이 있어야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의식 자체가 사회를 튼튼하게 만든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죠. 아버지 생활신조가 ‘금전을 잃으면 작은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였어요.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으셨으니 청렴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아버지를 닮은 까닭일까. 박재동은 오랫동안 그림 일기를 쓰고 있다. 간혹 바빠서 빼먹을 때가 있지만 기록의 힘을 느낀다. 그는 “꿀 같은 시간이 랄까. 일기를 안 쓰면 삶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자성하기도 하고 내 생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그러죠. 어느 날 시간이 있어서 일기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마냥 재밌어요. 사실 부모의 삶이란 힘들기 마련인데, 자식들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다 보면 잔소리가 되고, 또 대화할 시간 자체가 없을 때가 많잖아요. 아버님의 일기가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조상들이 성실히 살아왔던 그 기초 위에 내가 있고 또 그 우위에 자식이 있다는 걸 몰랐을 거예요.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1971년 4월 5일,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식목일을 맞아 비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해도 마음속에나마 나무를 심듯 삶의 기록을 심을까 한다. 13년간의 투병 속에 또는 생활의 궁핍 속에 그날 그날의 생활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때문에 기록을 남긴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차라리 당시의 기록이라고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러 있다. 내 13년간의 생활은 그야말로 붓으로 또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병마와 가난이 겹친 힘든 생활은 우리 가족, 특히 내 아내가 아니고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굽이치는 물결처럼 사납고도 억센 지난 인생의 역사가 있다. (p.19)
(1976년 7월 7일, 피곤한 재동) 재동이는 오늘 피로한 듯하다. 군복무 마치고 화실로 가니 고된 일과다. 성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놀라운 일이며 나를 감동케 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있어 믿음직하다. 격무에 몸이 지탱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비노니 부디 건강한 몸으로 뜻을 이루기를. 오늘도 수강료로 받은 1만 1,000원을 갖고 왔다. (p.81) | ||
다시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예전과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병약하기만 한 모습 대신 가난과 병고와 싸워 이긴 한 사람의 모습으로, 절망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으로, 불의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으로,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한 사람으로 다시 떠오른다. 피지 못한 꿈을 안고 자식들만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해야겠다는 염원으로 끝까지 살아낸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우리가 지금 이 정도로 살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모두 그분들이 자신들의 꿈을 키우지 못하고 접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p.9~10) | ||
<박일호> 저/<박재동> 편13,500원(10% + 5%)
일기장 속에서 만나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같은 부모이기는 해도, 태속에서부터 태어나 성장하는 내내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쪽은 주로 엄마, 또는 어머니다. 그 때문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 사랑은 주로 모성을 전제로 그려지곤 했다. 그동안 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