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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참 행복한 직업이다. 고맙다” - 정우영 『시는 벅차다』

詩와 노래가 있는 어느 겨울밤의 풍경, 포엠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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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詩는 詩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詩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詩가 필요했다. 지난 12월 14일, 서울 숙명여대를 찾은 이유다. 詩가 흐르는 겨울밤. 『시는 벅차다』 출간 기념 시인 정우영 포엠 콘서트가 열렸다.


『시는 벅차다』는 포엠 에세이다. 건강이 악화됐던 시인 정우영, 詩에서 위안과 위무를 받아 완쾌됐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들과 이를 함께 나누고자 싶은 마음결을 따라 간 흔적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정우영 시인의 완쾌를 축하함과 동시에 ‘시 읽는 겨울밤’을 위해 마련됐다. 많은 시인들이 찾았고, 그 시인의 입을 통해 詩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의 詩, 우리의 음악, 겨울밤은 그것으로 충만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시간. 그러니까, 詩가 있어서 다행이다.

김응교 시인의 사회로, 정우영 시인의 책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이은규, 손병걸 시인이 등장한다. 이은규 시인의 「애콩」(『다정한 호칭』 중에서)이 흘러나온다.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
생의 우기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
(중략…)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꼬투리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
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나는 닫힌다, 한 철
이은규 시인이 말한다. “나에게 특별한 詩다. 이 책에 담긴 것을 보고 뭉클했다. 정우영 시인이 이런 자리가 있다고 전화 주셨을 때 오고 싶었다. 이유는, 정우영 시인 몸이 많이 아팠는데,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詩는 약이라고 했는데, 절반쯤 나은 것 같다.(웃음)”

손병걸 시인에게 마이크가 넘어간다. 손 시인은 시력이 나쁘다. 시각장애 1급이다. 전혀 빛을 감지할 수가 없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중에서)의 낭송이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정우영 시인, 손 시인을 시집을 통해 만난 드문 경우다. 두 사람, 서로에게 서슴없이 돌직구를 날리는데, 그 속엔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이어, 손 시인의 연주와 노래가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 말속에 갇혀 있는 것만이 아님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詩와 노래가 어우러진 어느 따듯한 겨울밤의 풍경이다. 뭉클하다. 「여러분」이 울려퍼진다.

연주가 끝나고, 사회는 맨 뒤페이지를 읽는다. 현기영 소설가의 글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인간의 고향이 자연이라는 것을 감동적인 언어로 일깨워 준다. 이 시들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벅찬 감동은 왜곡되지 않은, 진솔한 언어의 힘에 의한 것이다.” 현기영 소설가, 등장과 함께 말을 잇는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목소리가 잠겼다. 오늘 아침에 못가겠다고 전화했더니, 약속을 했으니 무조건 오라고 해서 결국 왔다. 손병걸 시인의 시 잘 들었다. 실명했을 때 우리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을 거다. 그것을 치유한 것은 詩였다. 詩의 아름다움. 거기에서 치유를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약 외의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힐링이 아닐까. 정우영 시인이 암에 걸렸을 때 봤었는데, 너무 창백했다. 어떻게 될 건가 했더니, 암 치료를 받고 詩에서 치료법을 발견했다고 하더라고. 예전에는 좋은 詩를 써서 문학사에 남기겠다는 욕심으로 썼겠지? 그런데 앓고 나서는 경쟁보다 동시대 다른 시인과 그들의 詩를 읽고 즐겨야겠다고 바뀐 것 같다. 지금 얼굴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詩의 효과다. 오늘 이렇게 시낭송을 접하니, 감동적이다. 이것으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치유하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예술위원회 같은 곳에서 이런 것을 많이 지원해야 한다. 이런 이벤트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

정우영 시인의 딸 정벼리가 축하공연을 가진다. 음악을 계속 해온 딸이 축하공연을 준비했다. 래퍼와 함께 부른 노래에 이어, 아버지를 향한 애정을 담은 곡처럼 느껴지는 「LOVE」(냇 킹 콜)를 부른다.


정우영 시인과 또 특별한 인연을 가진 문인수 시인의 등장이다. 문 시인, 그 인연을 말한다.

“지금은 40~50대 시인 데뷔가 일반화돼 있지만, 내가 마흔에 데뷔했을 때는 신문에 날 일이었다. 데뷔하고 보니 문단에 친구가 없더라. 홀연히 친구가 나타났는데, 박찬 시인이다. 데뷔도 비슷하고 동년배인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간이 안 좋아서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대신 이 친구가 나에게 사람 하나를 보내줬다. 젊은 친구였는데, 형 같은 분위기도 있더라. 정우영 시인이다. 정 시인도 건강이 나빠서 약간 염려가 되지만, 걱정하진 않을 거다. 먼저 간 박찬 시인이 초록의 애교머리, 즉 브리지를 했었다. 그걸 삼손 머리카락이라고 불렀다. 또 카키색 머플러를 하고 다녔다. 박찬 시인에게 바치는 詩가 다섯 편정도, 산문이 칠십 편정도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박찬 시인을 위해, 문 시인이 추모시를 읊었다.
「흰 머플러! - 시인 박찬 여기 마음을 놓다」



그는 끝내 그가 정한 대로 따스하게 실천해 놓았다.

화장한 몸. 그 뼈를 빻아 한 끼 더운밥에 비벼놓았다.

정읍의 선영 볕바른 데다 정성껏 뿌려놓는 일.

어라, 그의 겨드랑이가 벌서 겨울나기 중인 땅속 개미 몇 마리의 촉수에 건들리는 것인지,

내게도 간지럽게 통하는 것 같다. 들짐승, 날짐승.
(중략…)


머플러!

그의 것은 카키색이지만 사실은 요러코롬 희디희다.





다음으로 백무산, 김혜자 시인이 정우영 시인과 무대에 함께 섰다.

제일 오래된 만남이지?
(정우영) 오래 됐다. 백무산 시인은 해방문학을 같이 만들던 동지다.

백무산 시인도 할 얘기 있을 것 같은데.
(백무산) 정우영 시인과 오래됐다. 어려운 시대, 어려운 시기를 거쳤고, 아직까지 연락이 끊어진 적 없이 지속되고 있다. 원래 나는 이런 자리에 안 나오는 체질이다. 낭송하는 자리에 두어 번 나온 적은 있지만, 작가는 무대 뒤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무대는 배우가 나오는 곳이지. 서양 속담에 ‘작가와 주방장은 얼굴이 안 보이는데 있는 게 낫다’는 것이 있다. 그런데, 정우영 시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더라. 나름 사람 사귀는 것이 까다로운 편인데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관계가 내겐 흔치 않다. 정 시인이 최근 몸이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슬픔은 여기서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해자 시인도 정 시인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
(김해자) 많이 고맙고 머리가 좋으면서도 심장이 따뜻하기가 힘든데, 정 시인을 보면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쓴다. 후배나 어려운 사람도 잘 챙겨준다. 여기 오신 분들도 같은 마음으로 오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무산 시인의 낭송이다.
「슬픈 인사」(『그 모든 가장자리』 중에서)를 읊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사
잘 살아요-

여기서 따로 가면서
당신은 내일을 살 수 없고
내일은 나 혼자 가면서
아무도 뒤에서 지켜보는 이 없는 거리를 혼자 가야 하는
가서는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는
뒤가 텅 비어버리는 그 인사
잘 살아요-
(중략)


푸른 나무가 공중에 던져지는
아, 자유라는 이 공포!

이어 김해자 시인의 「승천」(『축제』중에서)도 잇따른다.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중략)


방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두 분에 얽힌 추억도 듣고 싶다.
(정우영) 백무산 시인, 정말 모시기 힘든데, 어울려 주니 참 기쁘다. 한강에서 함께 천진하게 놀던 때도 있었고, 신혼 단칸방에 불쑥 와서 묵어가기도 했다. 불도 안 들어오던 엄혹한 시절을 함께 보낸 기억이 있다. 김해자 시인은, 존경하는 친구다. 모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갖고 있는 목포 여자다. 목포 여자로서 노래 한 자락 하라고 하면, 집에 가기 힘들 정도로 부른다. 목포 여자의 목포 노래를 청한다. (청중 박수)

김해자 시인의 노래와 치유음악가이자 생태음악가 봄눈별(봄눈이 흩날리는 밤의 홀로 빛나는 별)의 음악이 겨울밤을 따스하게 감싼다. 정우영 시인의 마지막 멘트가 흘러나온다.


“고맙다. 지루하지 않았지? 신나지도 않았지? 시라고 하는 게, 신나지는 않는다. 지루하지도 않다. 여기 모신 시인들, 내 시평 에세이에 나와 주신 시인들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다. 나는 좋은 詩, 귀한 詩, 그 詩를 통해 받은 느낌을 독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모자란 내 글을 동원한 것이다. 좋은 詩들이 없었다면 시평 에세이를 어찌 할 수 있었겠나. 지나간 시간이 지금까지 나와의 오래된 만남이었다면, 오늘은 내일을 위한 새로운 만남의 시간이었다. 궂은 날씨에게 기꺼이 찾아준 여러분, 고맙다. 아내에게도 참 고맙다. 내가 지금 뭔가 극복한 것처럼 얼굴이 해사해진 건 아내 덕분이다. 얼굴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웃음) 얼마 전 나한테 찾아왔던 삿댄 기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책도 내고 이런 시간도 갖게 된 것이고. 詩를 쓴다는 것, 참 행복하다. 시인, 참 행복한 직업이다. 고맙다. 이걸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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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벅차다 정우영 저 | 우리학교
시인 정우영이 우리와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시인들의 도타운 마음을 귀 담아 마음 담아 차근차근 펼쳐 내었다. 암 투병 중인 시인은 시의 온기에 몸과 마음이 감싸이는 경험을 통해 죽음과 소멸에의 공포를 쫓았음을, 꽃그늘 속 피어오르는 설렘처럼 시의 자연 에너지와 다사로운 시심이 시인에게로 와서 넘치는 힘이 되었음을 가만히 고백한다. ‘나를 넘어 너에게로 가서 너와 함께 나를 되세우는’ 마음이라면 어떤 절망도 견뎌낼 수 있다는 시인의 헤아림, 시에서 받은 뜨거운 위안과 위무를 읽는 이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결이 독자를 한껏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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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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