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일본에서 열린 ‘2012년 아시아 도시경관상’ 시상식에서 감천문화마을은 감투를 썼다.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민관 공동으로 지역발전을 이룬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 감투는 허투루 받은 것이 아니다. 독특한 풍광과 문화 덕분. 감천문화마을은 달동네다. 산지 비탈면에 자리 잡고 있다. 토건업자들은 재개발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그림도 안 나오고, 계산이 서질 않아서다. 결국 주민 주도로 재생사업이 전개됐다.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 이색적인 계단식 마을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고 미로 같은 골목길이 살아남았다. 고유의 풍광을 살린 채 예술이 틈입, 활력을 불어넣었다. 해외 곳곳에서 풍광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연간 7만 여명이 찾는 부산의 자랑이 되어 버린, 마을공동체의 좋은 예 중 하나다. 달동네의 변신, 놀랍고 아름답다.
평소 건축가 승효상은 부산바람을 쇠며 기력을 회복한다. 무엇보다 그는 ‘골목길 문화’ 예찬론자다. ‘아시아의 산토리니’라는 감천문화마을의 별칭처럼, 그는 산토리니 마을의 아름다움, 한국 달동네에도 있다고 설파한다. 주민 스스로 나누면서 살 수밖에 없는, 그래서 마을공동체를 이루는 공간에 대한 무한애정. 그는 금호동의 달동네를 좋아했다고 토로한다. 승효상은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 출간기념 강연회에서 건축과 여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거주풍경(domestic landscape)
승효상 선생은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말부터 꺼낸다.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의 평화로운 조화다. 인간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며, 거주는 건축함으로 장소에 새겨진다.” 하이데거의 말은 이성이 장악했던 시대, 놀라운 발언이었다. 인간이 이성 아닌 땅 위에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거의 처음이자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전까지 인간은 땅 없이도 존재한다고 봤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땅에 비롯된 담론을 내세운 것이다. 승효상은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다. 건축설계는 곧 ‘어떻게 사는가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어 그가 꺼낸 것은 ‘독락당(獨樂堂)’. 성리학의 거두였던 회재 이언적의 집이다. 회재는 정쟁에 휘말려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났다. 헌데 고향인 경북 양동마을에 가지 않고, 첩이 사는 인근 안강에 가서 집을 지었다. ‘홀로 즐기는 집’, 즉 독락당으로 지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있을 요소는 다 있다. 헌데 집이 왠지 낯선 감이 있다. 담장도 낮고, 여느 건축보다 낮다. 사랑채도 여느 집과 달리 상당히 낮다. 반면 마당의 존재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독락당 곳곳의 마당이 다 그렇다. 마당은 반듯하며, 마당의 비움이 주인인지, 나무가 주인인지 모를 정도다.
“이 집의 건물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철저히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한낱 도구였으며, 각기 다른 마당은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앞둔 회재는 그런 마당 어디에서도 은둔하며 ‘독락’하려 한 것이다.”(p.48)
“굉장히 놀라운 것이 있다. 이 집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정자다. 정자가 벽채의 연장선상처럼 존재한다. 바깥 계곡과도 연결돼 있는데, 정자는 마당의 한 요소로 존재한다. 정자 밖으로 나오면 아름다운 정자가 나온다. 안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회재는 디테일에 관심이 없다. 이 집은 공간의 조직을 읽어야 회재가 설계한 집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이게 우리의 건축이다.”
승효상은 정반대의 건축도 언급한다.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이탈리아 비첸차 교외에 세운 빌라 로툰다. 독락당과 불과 38년 차이 나는 집으로 서양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서양건축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이 집, 언덕 정상에 있다. 높게 지어져 주변을 지배할 듯 보인다. 단일 중심적으로 빨려 들어갈 듯 설계됐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어깨가 움츠러들어 스스로를 집주인의 명령 처분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로 자아 중심적이고 세계 중심적이다.
“이 집이 지어진지 450년이 지난 지금도, 서양건축은 여전하다. 자연은 적이고, 지배해야 할 대상처럼 다룬다. 이런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 집뿐만 아니라 도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도시계획도를 보면 자연을 적으로 본다. 안에는 높은 성벽을 쌓는다. 외부는 방사형으로 만든 봉건영주가 산다. 모든 것이 봉건 영주의 영향권 안에 복속된 단일도시다. 이런 도시가 르네상스 유럽 곳곳에 이상도시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이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영향도 있었다. ‘토피아’는 땅이며, 유(EU)는 좋다는 뜻이다. 유토피아 그림이 도시계획도라는 이름으로, 유럽 곳곳에서 재현됐는데, 평지에만 건설될 수 있는 도시였다. 유럽의 계획도시는 죄다 평지에 있다. 산지에 있는 도시는 자연발생적이거나 군사적 목적이 있다. 그것이 유럽 도시의 전통이다. 이 땅에 건설되는 도시와 지리적 지형적 성향이 다름을 의미한다.”
모더니즘의 폐기: 다원적 민주주의의 필요성
승효상은 위계적으로 만들어진 모더니즘 건축의 이야기를 잇는다. 자연과 무관하게 고층 아파트와 인위적인 녹지공간을 만들고, 건축(도시)을 효율과 용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모더니즘의 시대, 건축이었다. 1956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11층 33개동으로 이뤄진 ‘프로이토 이고 아파트 단지’로 절정을 이뤘다. 이 단지, 당시 각종 건축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것, 오래가지 않았다. 익명성에 의한 범죄 등 각종 흉악범죄가 발생하고, 이 단지는 세인트루이스의 우범지역이 됐다. 세운지 17년, 1972년 시 정부는 단지를 폭파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마스터플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고, 모더니즘은 폐기됐다. 모더니즘의 종말이었다.
문제는 이 땅이다. 폐기된 모더니즘(근대건축)이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서구가 폐기한 ‘마스터플랜’을 여전히 따른다. 불순한 음모가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100여 년 전 서울의 마포 모습만 봐도, 산과 물, 집이 조화를 이뤄 평화롭다. 그러나 지금 대학로 지도만 봐도, 조화는커녕 타협을 이루지 못한다. 승 선생, 이런 풍경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갈등의 폭발은 곧, 우리가 짠 공간구도 때문이라는 것.
“옛 르네상스 그림이나 투시도를 보면 세계를 독차지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라파엘로 그림을 봐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싫은 세계. 르네상스 시대의 시각이었다. 이것과 다른 시각으로 우리 선조가 그린 19세기 민화로, 8장의 책장을 그린 그림이 있다. 각 칸마다 자기의 소실점이 있고, 사물은 자기중심을 향한다. 엉망진창이다. 그림은 그린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다원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건축과 도시의 이야기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을 품은 도시는 어딜까. 승효상은 모로코의 도시 페즈를 우선 든다. 이슬람의 도시인 이곳, 열채 정도의 집이 하나의 단위로 묶여 있다. 빵집 하나, 우물 하나를 공동시설로 하는 최소 단위로 묶인 이 도시, 열채만 있어도 하나의 도시가 된다. 승효상은 발터 베냐민의 말을 인용한다.
“다원적 민주주의 도시는 부분이 전체와 똑같은 가치를 가질 때 이뤄지는 도시다.” 즉, 도시 한 구석에 가도 전체를 알 수 있는 도시가 민주주의 도시다.
“여기는 주작대로, 중앙도로, 대로와 같은 위계와 계급, 봉건시대의 잔재가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784년에 세워진 이 도시는 1,200년이 지났는데, 굉장히 아름답다. 이런 도시가 지속가능한 도시다. 1,000년은 더 지속될 수 있다. 이런 도시가 다원적 민주주의의 도시다.”
“어떤 도시의 어느 장소에 있을 때 그 모퉁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전체를 알 수 있게 하는 곳이 좋은 도시라고 하였다. 무슨 소린가. 부분만으로 도시 전체를 알 수 있으려면 그 부분 자체가 도시의 모든 성격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도시의 모든 부분들이 다 독립적이어야 하고 서로 대등한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p.209)
이런 곳을 보려면 모로코까지 가야 할까? 아니다. 승효상은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있단다. 달동네! 주민 스스로 세운 달동네, 가파른 산비탈에 있어서 공간의 다이내믹이 더 크다. 가진 것이 적어서 나누면서 살 수밖에 없다. 달동네의 길, 통행뿐 아니라 빨래도 하고, 놀이터도 되며, 시장이 된다. 공동체를 이루는 공간이다. 금호동 달동네가 그런 곳이었고, 감천문화마을이 그렇다. 지중해 산토리니의 마을 풍경, 우리의 달동네와 다를 바 없는 공간구조다. 건축이라고 특별히 아름답지 않다. 이런 동네, ‘하늘아래 가장 아름다운 동네’로 알려져 있다. 공동체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랫집의 지붕이 윗집의 테라스가 된다. 집들은 서로 벽을 공유하고 골목길은 모두의 공간이다. 모여 사는 삶의 아름다움. 그것에 반해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온다.
“이 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외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방법과 그를 위한 공간의 구조적 풍경에 있었다. (중략) 모여서 나누면서 삶을 사는 풍경. 이를 위한 공간을 백색의 대리석 가루로 감싸고 코발트 빛 하늘을 바탕으로 빛나게 한 풍경이 지독한 아름다움을 준 것이었다. (중략)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므로 가지고 있는 게 작을 수밖에 없어서 많은 부분을 이웃과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 집 밖의 공간들은 단순히 통행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p.218)
“물론 금호동 달동네는 위생 등의 이유로 재개발이 돼야 했다. 그런데, 모여 살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금 재개발은 건축이 아니라, 범죄다. 공동체에 가한 테러다.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상당히 뜨악했다. 서양건축문화사에서 윤리라는 말은 찾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윤리는 나와 남의 관계다. ‘관계’는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였다. 집을 지을 때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걸 잇기 위해 건축을 했다.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를 부정하며 미학을 쫓아서 황망해졌다. 서양은 그러나 한계를 깨달아서 윤리를 주장한다. 이 비엔날레에서 서양 건축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윤리적 건축은 아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내가 좋아했던 금호동 달동네는 숨 막힐 듯한 아파트가 빽빽하게 산비탈을 헤집고 들어서서 도시 속의 암 같은 덩이로 나타났다. 이것은 건축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심각한 테러 행위이며 범죄다. 분개할 수밖에 없다.”(p.222)
그것은 ‘불확정적 비움’이었다. 압축해서 말해, 건축가가 나서지 말고 거주자의 뜻에 맡기자는 것. 승효상은 우리 선조가 만든 아름다운 비움을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마당이라는 공간이 그랬다. 모든 것을 해도 괜찮고, 행위가 끝난 다음, 고요하게 비워져서 인간을 사유의 세계로 인도했다. 지극히 아름다운 공간.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마당은 고기를 굽는 공간이 됐다.
“마당은 대개는 비어있지만 언제든지 삶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어린이들이 놀든, 잔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든 그 공간은 늘 관대하게 우리 공동체의 삶을 받아들였고 그 행위가 끝나면 다시 비움이 되어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게 불확정적 비움이었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우리에게 전한 아름다움이었다.”(p.40)
비움과 죽음, 우리가 되찾아야 할 건축의 조건
우리에게 자랑스런 비움이 있다. 종묘 종전. 시라이 세이이치 일본 건축가가 동양의 ‘파르테논’으로 칭한 뒤, 세계에 알려졌다. 목조건축인데, 종묘의 진짜 아름다움은 ‘월대’라는 마당에 있다고 승 선생은 설명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 여전히 에너지가 들끓고 있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안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이다. (중략) 종묘는 일그러진 서울의 중심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경건한 장소이며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는 건축이다.”(p.23)
미국 샌디에이고 루이스 칸이 만든, 생물학연구소가 ‘소크 연구소’도 아름다운 비움의 공간이 있다. 빌딩을 설계하지 않고 빌딩을 두 개로 나눠 마당을 설계했다. 마당의 표정이 모든 것을 담는, 불확정적 비움의 표본이다. 승 선생은 무한한 잠재성을 느끼게 하는 걸작이라고 칭했다.
“건축은 일본 사람이 만든 단어다. 우리는 ‘造家’라는 단어를 버렸다. 나는 건축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키텍처는 으뜸이 되는 기술, 큰 학문을 뜻한다. 중국도 옛날에 영조(營造)로 썼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건축은 대단한 사유 과정의 결과물이다. 처칠이 그랬다. 건축이 우리를 만들지만, 우리가 건축을 만든다(We shape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왜 우리 대통령들은 말년에 비참할까. 나쁜 건축에서 5년을 살면 민주적인 사람도, 허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전두환이 정통성을 강변하려고 조선왕조 건축양식을 빌어 청와대를 지었다. 내부는 더 허무하다. 사는 사람은 허무의 공간에서 스스로 허무해져서 말도, 행동도 센다. 끝내는 비참하게 나온다. 독재자 옆엔 유능한 건축가가 있었다.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알베르토 슈페어가 대표적이다. 히틀러는 원래 건축가가 되려고 했으나 떨어지고, 군대에 가서 독재자가 됐다. 히틀러가 건축가가 됐으면 세상은 달라졌겠지만, 권좌를 잡자마자 슈페어를 옆에 두고 건축의 힘을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프로젝트를 했다.”
“본래 우리의 건축은 건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어떻게 배치하여 주위와 관계를 갖게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에서 건축은 지형과 더불어 비로소 완성되는 영조(營造, 가꾸어 지어 내는 일)의 작업이었다.”(p.194)
승효상은 ‘기억의 의무’에 대해 빠트리지 않는다. 베를린의 ‘전쟁과 학정에 대한 독일연방공화국 중앙기념관’에는 케테 콜비츠라는 예술가가 만든 피에타 상이 덩그러니 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기념탑, 이곳도 희한하다. 칼 맑스, 토마스 만 등 유대인 학자 책을 괴벨스 지시로 2만권을 불사른 야만의 현장. 광장의 바닥 1미터 사방의 사각을 덮은 유리 속에 빈 서가가 들어서 있다. 시인 하이네가 쓴 “책을 불태우는 자는 인간도 불태운다”는 가슴 저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베를린은 사람을 사유하게 하는 시설이 많다. 그 이유로, 승 선생은 책을 통해 이런 말도 던진다.
“베를린을 여럿이 여행하는 것, 그것은 야만이다.” 같은 맥락에서 승효상은 묘지가 도시 안에 함께 있어야 삶이 경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도, 사회적 공동체도 아니다. 우리가 도시를 보는 시선은 ‘부동산 공동체’다. 땅값이 떨어진다며 묘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묘지가 없는 도시는 찾기 힘들다. 이탈리아 베니스를 가면 묘지 섬이 있는데, 아름답다. 스톡홀름의 우드랜드 묘지공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묘지다. 시구르트 레베렌츠라고 하는 건축가가 설계했는데,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증명한다. 인생을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려준다.”
“집값의 하락만을 걱정하는 천박한 물신주의는 죽음의 형식을 우리 주변에서 내쫓아 우리의 도시에서 경건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였다. 저 멀리 외진 곳으로 몰린 묘지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돌 장식으로 범벅이 되어, 그 천박함에 절망하였다.”(p.94)
그는 노무현 묘역을 설계했다. 관습적 묘역을 따르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을 주제로 평범한 마을의 길을 그렸다. 길도 있고, 물길도 있고, 마당도 만들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의 작은 마을 하르부르크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언급했다. 이 기념비, 1986년 요한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라는 부부에 의해 세워졌다. 12미터의 이 탑이 범상치 않은 건, 매년 2미터씩 꺼지도록 설계됐다. 건축가가 의도한 바는 지나갈 때마다 나치즘, 파시스트에 당한 기억을 낙서로 남겨달라는 것. 탑의 표면은 1993년 11월 10일 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져도 모든 건축과 도시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고, 그것만 진실하다. 그걸 생각하면, 건축과 도시가 어떤 거주풍경을 만들어야 하는지 자명하다.”
“모든 도시와 건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고 해도, 중력의 힘에 의해 반드시 건축과 도시는 무너지고 만다. (중략)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다.”(p.275)
우리나라는 어쩌다 건축과 안 친한 나라가 됐을까?
정부 잘못이다. 국민은 잘못이 없다. 우리나라 건축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건축 빈도가 가장 많은 한국인데도, 한국 건축은 세계 건축의 변방이다. 한국 땅에 와서 일하는 외국 건축가가 많은데, 자기가 지은 한국의 건축물을 꺼내지 않는다. 정부가 건축에 대해 무지하고 오해하는 부분이 그대로 나타난 게 정부 조직이다. 한국은 건설이 드라이브를 하지, 건축이 드라이브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건축이 문화부에 속해 있다. 건설부에서 건축을 떼어내 문화부에 이관해서 경쟁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관에서 발주할 땐 거의 턴키시스템이다. 건축가와 시공사가 짜고 들어오라는 건데, 검사와 변호사가 한 팀이 되라는 불륜과도 같다. 그런 불륜의 대가가 서울시 신청사다. 그런 결과가 우리나라 건축을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고 본다.
“거의 모든 행정의 결과는 건축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 그래서 건축에 대한 정부의 의식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그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국가에서 발주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턴키’라는 이름으로 건축가와 시공자를 짝짓기 하여 뽑게 한다. 세계에 유래가 없다. 검사와 변호사의 관계처럼 서로 감시하는 직능인 이 둘더러 한 팀이 되라는 것은 불륜을 노골적으로 저지르라는 말이어서 이를 맹비난했지만 그 먹이사슬은 너무도 완강하다.”(p.64)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도 영감을 얻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여행 노하우를 들려 달라.
여행은 혼자 하는 게 제일 좋다. 둘은 싸우고, 셋은 한 명이 왕따가 된다. 넷이 가면 편이 갈리고, 다섯이면 식탁에 앉기 불편하며 숙박도 난감하니, 여섯이 가장 좋다. 토론이 가능하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 이상은 단체훈련이다. 혼자 가면 자유스럽고, 객관화할 수 있어서 좋다.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 된다. ‘스테이 아웃, 스테이 얼론’이라는 말이 있다. 밖에 서기를 즐기고 혼자 있기를 즐기라는 말이다. 건축가, 여행을 잘한다. 도면을 잘 봐서 그렇다. 도면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이 말은 자기를 객관화시킨다는 것이다. 건축가는 도면상에서 미리 여행을 한다. 실제로 가서 맞는지 아닌지, 판타지를 깨기 위해 여행을 한다. 여행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서 가라.
아파트에 삶의 진실이 없다는 말을 했다. 아파트에 살면 다 이상해지는 건가? 마음대로 집을 택할 순 없으니, 서울에 정을 붙일 수 있는 요령이 있을까?
어느 도시에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서울이라고 답한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도시다. 세계에서 1천만 이상의 인구가 있는 곳이 스무 개인데, 유일하게 산이 있다. 나쁘게 가꿔왔다 해도 서울은 산과 물이 있어서 회복이 가능한 도시다. 산을 깎거나 청계천과 같은 인공하천을 만드는 짓만 않으면 돌아갈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불안한 조짐이 있다. 평지에 집을 짓는 나쁜 예가 아파트인데,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해서 도시를 만든다. 그 전에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토론해야 하는데, 모든 터의 무늬를 지우고 백지처럼 만드는 것이 아파트다. 터에 있는 무늬를 지웠으니, 터무니가 없는 것이 아파트다. 아파트 사는 사람, 터무니없이 산다. 터에 새겨진 무늬, 자연과 선조가 새긴 무늬들이 지금도 기억처럼 남아 있으니,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무늬를 만드는 게 건축이요, 도시다. 그게 터무니 있는 도시요, 건축이다. 터무니 있는 집을 지으면 터무니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존재가 땅과 무관한 삶을 사는 한 공고해질 수 없다. 그건 유목민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적으로 거주할 수가 없다.
건축가들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정부 잘못이라고 답변 해놓고 풀리지 않았었는데, 정부 잘못만은 아니다. 건축가의 잘못이다. 모든 건축물은 건축가들만 잘하면 터무니없는 아파트가 지어지지도 않고, 그런 건물도 지어지지 않는다. 건축가는 건축주에게 복무하는 직능이 아니다. 건축이 단순히 건축주의 소유물이 될 수도 없다. 그 건축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용권을 얻을 뿐이지, 소유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건축가는 시민과 사회에 복무하는 직능이다. 건축이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는 공공성이다. 공공적 가치가 건축가의 윤리다. 건축가들이 공공재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모든 건축이 제대로 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도 책임을 무겁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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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 저 | 컬처그라퍼
‘빈자의 미학’이라는 건축철학으로 유명한 우리시대 대표 건축가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 승효상이 여행길에서 만난 건축과 그것이 이루는 삶의 풍경들을 기록한 인문 에세이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간 여러 지면에 연재했던 글들과 이전의 기록들을 묶어서 새롭게 정리한 내용으로, 지금까지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설파해 온 승효상의 건축철학이 집약되어 있는 동시에 문필가로도 이름 높은 저자의 문학적 향취를 만날 수 있다. 간결하고 담담히 써내려 간 문장 안에 담긴 사유의 묵직함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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