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클래식 선율이 흐르고 있다. 그 음악에 따라 마음도 흐른다. 나는 음악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을 모른다. 그 힘에 나는 굴복하지만, 그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은 세상을 달리 보이게 만든다. 그 음악이 만들어낸 풍경은 오롯이 내 마음이 만든 풍경이다. 詩는 詩를 만든 사람이 아닌, 詩를 사람의 것이듯, 음악도 그렇다. 음악도 만든 사람의 것도 아니다. 그 음악가를 품은 나라의 것도 아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의 것이다. 클래식이 잠 오는, 재미없는 음악이라고 멀리하는 것, 결국 클래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클래식도 비록 21세기 사람들의 정서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인류의 가장 뛰어난 음악적 능력을 보여주기에 사랑 받아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클래식은 과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이지만 그 시대, 한 계층의 음악만이 아닌, 인류를 대표하는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것이지요.”(pp.26~28)
지휘자 금난새, “브람스는 독일사람 것이 아니라 그걸 이해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모든 문화가 그렇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0월2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예스24 책 읽는 풍경’이 펼쳐졌다. ‘금난새와 함께하는 콘서트 토크’의 시간,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개정판 출간기념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에서 금난새는 “클래식은 행복이다”라는 주제로 클래식을 즐기는 법을 이야기했다.
최근 근황을 묻고 싶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비밀인데. (웃음) 몰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연주라는 것이 몰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알려지니까,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하고 있고, 2년 전부터 인천시립교향악단을 맡고 있다. 두 오케스트라를 가진 지휘자다. 어떤 게 더 좋은지 물으면 곤란하다. (웃음) 인천시립교향악단은 제도권 오케스트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생력을 키우는 음악가들의 샘플로 2000년부터 시작했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보람된 일이고, 우리 음악계에 어떤 좋은 시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권 오케스트라의 문제라면, 노력을 안 해도 예산이 책정돼서 안일해 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예술단체는 그런 지원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원을 받기 전에는 노력을 많이 하나, 지원을 받으면 노력을 덜 한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런 면에서 고아인 셈이지. 지원이 없으니 지원을 일궈야 하고, 존중과 사랑을 받는 오케스트라가 돼야 한다. 그렇게 전혀 다른 오케스트라를 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좇고 있다고나 할까. (웃음)
농어촌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했고, 지난여름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던 공연이 큰 이슈가 됐다.그보다 먼저 얘기할 것이 있다. 2년 전 대학생 10명이 날 찾아왔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날 구슬려서 예술의 전당에서 힘든 레퍼토리로 도전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기특하더라. 내가 젊을 때는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시대가 변해서 음악으로 화합하고 도전하겠다니, 거절할 수가 없더라. 작년 1월에 예술의 전당 대강당을 빌려서 연주회를 하자고 했다.
무엇을 연주할 것인지 물었더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 2곡을 하기로 하고, 그렇게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그게 ‘쿠코(KUCO?Korea United College Orchestra?대학생 연합 오케스트라)’였다. 25개 대학 100명의 학생이 작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를 했다. 반응이 엄청 좋았다. 그들이 금난새를 생각하고 찾아왔는데, 나만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게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15명의 코치가 함께 연습을 시켰다. 이 친구들이 하고자 하는 게 있었는데,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코치가 있으니 흥분한 거다.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그런 것이 합쳐져서 연주를 꽤 잘했다.
문제는 잘 됐을 때다. 사람들은 좋았을 때, 대개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가 않다. (웃음) 원래는 나랑 꼭 한 번 하고 싶다더니, 연주가 끝난 뒤 내년에도 하자고 하더라. 나도 속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원하니까, 올해 2회째를 했다. 30개 대학이 모여서 2기가 됐고, 연주회를 가졌다.
그런 것을 하니까, 마사회에서 연락이 왔다. 재단에 관계하는 담당자가 농촌에 오케스트라를 만들면 어떨까 하더라. 그래서 10억 원으로 오케스트라를 지원하자고 했다. 60군데서 신청을 했고, 20군데를 택했다. 농어촌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고, 나에게 멘토링을 받겠다고 왔더라. 고맙긴 하지만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하겠다고 했다. (웃음)
이름을 ‘꿈나무 오케스트라(키도?KYDO)’라고 지었다. 20개의 작은 마을에 그렇게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생겼다. 아이들에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를 하게 하면 어떨까 해서, 8월13일 날짜를 잡고 20군데 10명씩, 200명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했다. 이들을 지도한 것이 유라시아 오케스트라 단원 20명이었고, 쿠코가 코치를 했다.
또 6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국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이 친구들이 뉴스를 보고, 우리도 농어촌에 가서 하고 싶다며 10명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시골에 가서 음악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치겠다고 하는 거라. 얼마나 기특한가. 결국 세종문화회관에 250명이 올라가서 연주를 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동 박수)
내년에도 아이들이 다 올 수 있도록 스폰서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업이 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것은, 연주를 앞두고 어느 한 지역의 10명이 1악장만 연습했다는 거다. 괜찮다고 했다. 1악장만 연주하고 들어가라고 했다. 실제로 연주할 때 그 친구들은 1악장만 했는데, 그것을 청중들에게 얘기를 했고, 박수도 쳐 주더라.
금난새에게 멘토는 누구였나?별로 없는데, 어떡하지. (웃음) 사실 내가 지휘자가 된 것은 번스타인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번스타인이 1960년대 카네기홀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했다. 번스타인은 미국인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그 전에는 전부 유럽인이었거든. 번스타인이 청중을 넓히겠다며 청소년 음악회를 열었는데, 내가 그것을 우연히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 프로그램이 큰 선물을 준 거지. 그때 지휘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번스타인이 나의 멘토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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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중학생이었던 저는 우연히 주한 미군 방송인 AFKN을 통해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게 된 프로그램이었지만 번스타인이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해설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를 빼놓지 않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릴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테이프가 닳도록 반복해서 듣곤 했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과 지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를 통한 번스타인과의 만남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p.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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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독일에 유학할 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나의 멘토였다. 무척 훌륭했다. 내가 오케스트라 연습하는 것을 굉장히 많이 봤다. 원래는 못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연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됐느냐면, 하루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습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갔다. 문지기가 날 보고 인사를 하는데, 나도 그 인사를 받아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시간이 연주자들이 연습하러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문지기가 날 연주자로 착각해서 들여보낸 거지. 그렇게 연습하는 장면을 봤고, 매일 ‘구텐모르겐’ 인사를 하면서 들어갔다. (웃음) 베를린 필은 홀에서 연습했는데, 2600석에서 청중은 혼자였다. 난 무척 행복한 사람이었던 거지. 가까이 보면 들킬 것 같아서 멀리서 봤다. 카라얀 뿐 아니라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연습을 봤다. 그렇게 연습을 보고 실연을 보면서 엄청난 공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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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연주회에서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200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이 살아서 훌륭하게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이처럼 위대한 음악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행복에 눈물이 흘렀습니다.”(p.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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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또 있나?내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고은 시인이 TV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자신의 방에 소년 한 명을 집어넣었다더라. 고은 시인이 감옥에 있는 게 화가 나서 투덜대고 있는데, 소년은 뭔가 연습을 하더란다. 뭐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소매치기라며 나가면 또 해야 하니까, 연습하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때 고은 시인이 느낀 게, 자신은 인텔리전트 지식인인데, 감옥에 왔다고 투덜대고 있는 순간에, 저 소년은 직업정신이 얼마나 투철하면 감옥에서도 연습을 할까. 그 순간, 고은 시인은 생각을 새로 했다고 하더라. 작가라면 감옥에서도 작품을 쓰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더 걸작인 건, 그 소년이 고은 시인에게 사회에 나가서 수입이 생기면 만년필을 하나 사 보내겠다고 했다는 거다. 우연히 고은 시인을 한 모임에서 만났는데, (TV에서 언급한) 그 이야기가 생각나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가 만년필을 보냈냐고 물었더니 아직 못 받았다며, 사업이 안 좋은 모양이라고 하더라. (웃음)
음악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금난새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말하기 너무 힘든데. 다른 질문 없나? (웃음) 지금 나의 생각, 내가 하고 있는 활동, 이 모든 것이 음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음악이 있어서 행복하고, 또 다른 사람도 음악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나 혼자만 들을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함께 듣고 나눴으면 좋겠다는 게, 바로 내 음악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돈키호테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도 내게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다. 브람스, 베토벤 등 독일에서 공부할 때 그 음악가들이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공부하면서 어떤 순간엔 브람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더라. 브람스 심포니 악보를 보고 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나 날씨 같은 게 음악과 어울리면 마치 브람스 음악이 내 몸에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
내가 생각하기로, 브람스는 독일사람 것이 아니라 그걸 이해하는 사람의 것이다. 독일사람 중에도 브람스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 사람인 내가 브람스와 대화한다는 착각이 나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도 영국사람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것이다. 세계의 모든 문화유산은 이해하고 즐기고 대화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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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음악을 감상할 때 작곡가의 설명이나 전문가의 해석에만 의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껏 음미하고 자유롭게 상상할 때 비로소 음악의 참된 맛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p.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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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있을 때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거지였다. (웃음) 근데, 독일 사회는 그런 돈 없는 유학생에게 거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해줬다. 위대한 연주를 들을 수 있게 해줬고, 기숙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 그게 돈으로 살 수 있겠는가. 도서관에 책이 엄청 많았는데, 그걸 살 필요가 없었다. 돈 한 푼 없는데,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나. 그때 느낀 건, 훌륭한 사회는 보이지 않는 재산이 얼마나 있는가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 그들이 있으니까, 나는 연주를 할 수 있고, 지휘를 할 수 있는 거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콜로세움 등 선조들이 엄청난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줬다. 그리스도 마찬가지고. 그들처럼 나도 차이코프스키 덕분에 살고 있는 거다. 그래서 고마워하고 있다. 나는 엄청 부자라고 생각하는 거지. 왜냐 모차르트가 있었으니까. 모차르트에게 인세를 낸 적도 없고. (전원 박수)
추억이든 음악이든 갖고 싶은 것과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내가 용감하거나 도전정신이 있는 게 아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보니, 다른 사람과 다르게 예민한 부분이 있더라. 한 다큐를 봤었는데, 밧줄 없이 암벽을 타는 사람이 있더라. 정말 불가능한 얘기잖나. 나도 무명의 학생인데,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를 지휘하는 건 불가능하잖나. 암벽타기를 하면 그게 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떤 일이든 어려움이 온다고 생각할 게 아니고 암벽타기를 계속 열심히 해야겠다고 여겼다. 어려움은 당연히 오지만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각오를 한 거지.
그래서 나는 일에 대해 고마워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내가 웃는 건, 일이 잘 돼서 그런 게 아니고, 해결할 준비를 늘 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음악가들을 보는 관점은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유명한 학교를 나온 것에 초점을 잡는다. 그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나는 반대로도 생각해 본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했을 때, 포스코 로비에서였다. 누구도 그런 생각을 못했을 때 베토벤 교향곡 9번을 1999년 12월31일 새천년 제야 때 연주하자고 했다.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포스코 로비에 의자를 놓으니 1천석이더라. 천 명이 연주를 듣고 기립박수를 쳤다. 로비에서 연 첫 번째 연주회에 연주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우리 음악가들이 앵콜, 브라보, 기립박수도 좋아하는데, 진짜 좋아하는 게 있다. 다음 연주 언제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 연주가 끝나고 3일 후 포스코 담당 임원에게 전화를 해서 반응이 어땠는지 물었다. 그런 좋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냈느냐며 말을 하는데,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더라. (웃음) 모를 때는 가르쳐 줘야 한다. 거기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더니, 그 임원도 반가이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그 로비에서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다 연주하게 됐다.(박수) 누가 로비에서 연주하고, 전곡을 연주하겠나.
기업은 정부나 지자체와 다르다. 보람이 없거나 이익이 없다면 계속 하지 않는다. 연주할 때 반응이 좋았는데, 이 사람들도 조사를 한 모양이더라. 포스코에서 다음에는 어떤 작곡가를 할 것인지 묻더라. 당연히 기쁘지만 냉정해야 한다. 문득 떠오른 것이 하이든이었다. 교향곡 104곡을 썼거든. (웃음) 너무 넘치면 안 되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말했다. 6개.
다음해, 6개 심포니를 포스코 로비에서 했다. 그걸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음악회를 열었다. 음악은 어디서든 해야 한다. 번스타인이 청소년 음악회를 해서 청중을 넓힌 것처럼 여러 곳에서 음악회를 열어서 사람들이 음악을 사랑하게 해야 한다. 참, 암벽타기를 하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다. 질문과 다른 답이 됐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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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을 느끼지만 끈기로 싸워나갈 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니까요.”(p.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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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 금난새 저 | 아트북스
지난 10여 년간 쇄를 거듭하며 클래식 음악 입문서로서 큰 사랑을 받아온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의 개정판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1』과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를 한 권으로 합치고 전체적으로 도판을 보완해 펴냈 것이다. 이전 판본에서는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를 마지막으로 20세기 초중반까지의 음악사를 정리했지만, 개정판에서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진보주의자들」 장을 추가해 20세기 중후반 음악사까지 살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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