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닝이 아니라 커머닝 해야 잘 산다 - 『마그나카르타 선언』 역자 정남영 강연회
인류는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재화를 함께 공유하는 공통체 구성원이다
현대는 모든 재화가 사적 소유의 대상인 사회다. 이러한 사회는 인류 문명에서 극히 예외이고, 실은 대부분 사회에서 공통적인 영역은 존재했다. 특히 인류 역사 초기에는 공통적인 영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리라고 역자는 받아들인다.
9월 15일, 다중 지성의 정원에서 『마그나카르타 선언』(피터 라인보우 저, 갈무리)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연사는 번역자 정남영 박사(전 경원대 영문과 교수). 그는 피터 라인보우의 다른 책 『히드라』를 번역하기도 했다.
마그나 카르타, 게임이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우리말로 하면 ‘대헌장’이다. 이 단어는 소프트맥스가 만든 게임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215년 영국에서 탄생한 대헌장은 총 63개 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헌장은 영국 왕과 그에 맞선 귀족 간에 벌어진 치열한 권력투쟁을 반영한다.
당시 치열한 역학 관계를 증명하듯 대헌장은 여러 가지 내용을 담았다. 초기에는 귀족의 권리를 입증하는 봉건적 측면이 강조되었지만 근대로 갈수록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개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기초다. 그 예로 최근 이라크 포로 학대 논란에 등장한 39조는 자유민을 재판 없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규정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한다.
피터 라인보우는 ‘마그나 카르타’를 다른 시선에서 본다. 그는 미국의 역사가로, 1994년부터 현재까지 톨레도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E. P. 톰슨의 제자이기도 하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화폐와 권력이 만들어 온 서사가 아니라, 그에 대항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역사가다.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라인보우는 삼림헌장에 주목한다.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읽은 ‘마그나 카르타’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서였다. 삼림헌장은 개인의 자유와 관련하여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집단 구성원 누구나 숲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 삼림헌장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공통권(common rights)과 관계있다. 더 나아가, 라인보우는 ‘마그나 카르타’가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문서가 아니라 반란의 성과이며 내전을 치른 세력 간 협정이라고 주장한다. 공통권을 선언한 삼람헌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다.
근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인류의 유산, 커먼즈
이날 연사로 나선 정남영 박사는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심했다고 털어놓았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생기는 게 번역 문제다. 직역인가, 의역인가 논쟁은 탈식민주의와 결합하여 뜨거운 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다. 역자는 ‘공유지’와 같이 한국어에 대응하는 단어가 있으면 한국어를 살렸고, 그렇지 않으면 커먼즈, 커머닝 등으로 그대로 옮겼다.
커먼즈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이 어려운 이유로 역자는 “우리가 커먼즈라는 개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커먼즈는 존재했다. 서구 근대가 만들어 놓은 모습으로 인류 문명이 수렴하면서 커먼즈를 망각했을 뿐이다. 서구 근대는 자본주의와 민족국가라는 2개의 큰 틀로 구성된다. 근대에서 사적 영역은 자본주의가, 공적 영역은 민족국가가 관할한다. 커먼즈가 공적 영역과 혼동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 근대 공사 영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와 다른 개념으로 네그리는 ‘공통체’라는 표현을 썼다. ‘공통체’의 구성원은 다중으로써, 다중은 다름 속에서도 함께 할 수 있다.
“커머닝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기에 법과 국가의 시간성으로부터도 독립적이다.” 『마그나카르타 선언』 2장
컨닝이 아닌 커머닝이 현대에 필요한 이유
커머닝 논의는 현대와 어떻게 연결될까. 정남영 씨는 2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미국 주도의 일방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 둘째, 공적인 영역에 의존하는 사회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 공통체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위기에 봉착한 현대 사회에 필요한 작업이다.
역자에 따르면, 공통적인 영역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물질문명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반면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다. 공통적인 영역이 사적 소유물로 바뀌면서 생산과정과 소비과정에서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했다.
생산성 증대도 공통적인 영역의 필요성을 높인다. 기계화가 진전되며 생산력이 높아졌다. 인간의 육체 노동은 줄어든 반면, 정신 노동은 증가했다. 현대 사회에서 정신 노동은 인터넷이라는 공간 위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인터넷은 공통체적인 속성이 강하다.
대통령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나
곳곳에 여전히 공통적인 영역이 존재하지만 현대는 재화 대부분이 사적 소유의 대상인 사회다. 이러한 사회는 인류 문명에서 극히 예외고, 실은 대부분 사회에서 공통적인 영역은 존재했다. 특히 인류 역사 초기에는 공통적인 영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리라고 역자는 받아들인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토지는 사적 소유물이며, 공유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고 하우스푸어가 급증하며 공유지로써 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미비하다.
곧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번 대선에 대해서 정남영 박사는 강의 주제와 연결지어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씨가 되든, 안철수 씨가 되든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바로 자신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5년이 지났지만, 그 사람들이 크게 변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특정 후보를 찍겠지만,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역자는 참여한 청중에게 ‘과거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에는 인류의 과오도 있지만 자랑할 만한 유산도 존재한다. 커먼즈는 후자다. 커먼즈가 이전에 존재했다면 현대에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자본주의의 병폐나 소비에트의 실패는 모두 커먼즈를 무시했거나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생겼다. 커먼즈의 재발견, 21세기 인류 미래를 위해 던져야 할 화두가 아닐까 싶다.
저명한 역사가 E. P. 톰슨의 제자인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의 대표작.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전제(專制)를 제한해 온 방책들 ― 인신보호영장, 배심재판, 법의 적정 절차, 고문 금지 그리고 커먼즈(the commons) ― 이 어떻게 축소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215년 이후 이러한 방책들의 원천인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적 궤적을 제시하면서, 사유화의 탐욕, 권력욕, 제국의 야망이 국가를 사로잡을 때마다 예의 오래된 권리들이 어떻게 무시되는가를 분석했다.
티끌 모아 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