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6일, 서울 서교동 상상마당에서 열린 『Let's Cinema Party? 똥파리!』 출간기념 ‘양익준 감독과 함께하는 <똥파리> 시네마 상영회’ 현장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양익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됩니다.)
나, 상훈(양익준)이야. 워워, 겁먹지 마.
<똥파리>에서처럼 ‘선빵’부터 날리고 육두문자 쓰진 않아. 영화 끝자락, 갱생하려고 노력했던 것 봤잖아. 더구나 이젠 때와 장소도 가릴 줄 알아. 품격 있는 매체에 어떻게 내가 그러겠어. 세월도 많이 흘렀잖아. 그러고 보니 그동안
<똥파리> 때문에 참 바빴네 그려. 2009년부터 많이 떠돌아다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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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의 파장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60여 군데의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2010년 4월 기준), 양익준은 이중 30여 군데의 영화제에 직접 참석해 스물네 개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각종 영화제에 초청을 받고 있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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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구름의 저편에서 보아하니, 시절이 속된 말로, 개차반이야. 컨택터스? 용역깡패도 내가 주름잡을 때와는 또 달라졌더구먼. 오늘 다시
<똥파리> 보아하니, 감회가 새롭긴 한데, 하수상한 시절과 맞물려 어째 좀 마음이 뒤숭숭하네. 컨택터스, 모르진 않지? 용역깡패의 대명사처럼 된 경비용역업체!
지난 7월27일이던가. 경기 안산의 자동차 부품업체 SJM 공장에 투입돼서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더구먼. 회사에서 고용했다던데, 내가 그 짓할 때보다 무기도 그렇고, 좀 더 악랄해졌어. 하긴 누가 더 악랄한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이날 노조원 35명이 중경상을 입었던데, 그 이후 컨택터스 행보가 더 가관이더라.
폭력사태가 널리 퍼지니까, 사과랍시고 입장을 발표했는데, 내용이 거참, 생양아치나 하는 짓을 했더라고. 나도 그 업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쪽 팔리게는 안 했거든.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기본이요. 경찰과 국회를 겁박하질 않나. 무슨 또 언론까지 만들겠대. 새로운 저널리즘 형식이라고, 무슨 네오 저널리즘? 참, 저열한 애들이야.
덕분에 내가 한 짓에 대해서도, 늦었지만 반성이 되더라. 대학생들 집회에 가서 애들 위협하고 주먹과 발로 때려서 집회를 무산시켰던 것, 기억하지? 수고비를 두둑하게 챙기긴 했는데, 결국 이런 게 내 발목을 잡았어. 폭력의 악순환과 반복이 내게 린치를 가한 셈이니까. 연희(김꽃비) 엄마만 생각하면 고개도 못 들겠고.
나 없어도, ‘철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무자비한 폭력은 여전하네, 여전해. 용산 사태로도 모자라, 이젠 사설 용역깡패들이 거침없이 설치는데, 이건 정말 이래도 돼? 정부나 국민을 지켜준다는 공권력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철거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적 야합이 더 절망적인 것 같아. 내가 아는 준수라는 친구가 상도4동 철거촌에 다녀와선 그러더라고. 자본이 배후조정하고, 폭력이 꼬붕으로 붙어서 인간의 삶을 할퀴고 간 자리가 가슴 아프더라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삶터를 놓치지 않겠다는 몸부림과 생명력이 눈물겹더라고. 그곳엔 이런 말이 벽에 쓰여 있더래.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거 없는 세상, 가능할까? 용역깡패가 없는 세상, 가능할까? 나 없다고 철거나 용역폭력이 없어지진 않는 게 좀 가슴 아프네. 철거 없는 세상이란 어떤 삶이든 세상에서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박원순 서울시장,
<두 개의 문>을 관람하곤 이런 소감을 트위터에 남겼더라.
“말할 수 없는 참혹함을 느꼈다. 제가 서울시장으로 있는 한 더 이상의 강제철거는 없을 것이다. 진정 정의롭게 시민들 편에 서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컨택터스 사태를 보곤, 나 상훈이나
<똥파리>를 떠올린 사람, 많을 거야. (용역)폭력에 환멸을 품었을 테지. 설마
<똥파리>를 보고 폭력을 조장한다고 말하는 건, 아쉬운 소리야. 폭력 장면이 많지만, 그건 다 이유나 맥락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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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똥파리>가 폭력을 조장하는 영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폭력을 쓰는 자의 불안한 심경이 그대로 느껴지는 장면들,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순간에 또 다른 자신으로부터 살해당하는 주인공, 어떻게 그런 영화를 보면서 폭력을 흉내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똥파리>는 폭력을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다. 우리 안의 폭력을, 그 폭력의 비극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힘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다.”(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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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 이상의 인터뷰, <똥파리>의 성취
사실, 나 덕분에 양익준이 1000번 이상의 인터뷰를 했더라고.
<똥파리>에 관해서라면, 더 이상 빼낼 것이 없을 만큼, 셀 수도 없을 만큼의 폭풍인터뷰.
『Let's Cinema Party? 똥파리!』는 거기에 덧붙여 나온 인터뷰 토대의 책인데, 몇 주에 걸쳐 10번 가량 지승호 작가랑 만나 많은 이야길 나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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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도 거기에 굉장히 중독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천 번도 넘게 했다고 그랬잖아요. 그 정도 되면 내가 한 말이라도 사실인지, 진심인지 모르게 돼요. 웃긴 게요. 내가 한 말의 인터뷰 글을 읽은 뒤 다음 인터뷰에 들어가서는, 앞서의 그 변조된 인터뷰 글을 제가 인용하고 있더라고요.”(p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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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사람, 그렇게 이야길 나눴을 때 각자의 사정으로 패닉(공황)상태에 가까웠나 봐. 양익준은 지 작가가 배려를 많이 해줘서 고마웠는데, 자기 하소연만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미안한 마음도 약간 좀 있고. 그럴 때 나를 끼워줬어 봐. 나도 참 할 얘기 많은데 말이야. 연희랑 만나기로 하고 할 얘기도 많았는데, 못 나가서 미안하던 참이었거든. 다만 양익준이도 약간 소극적인 부분도 있었대. 부모에 대한 건데, 다 내놓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는 거야.
<똥파리>를 다시 보니, 난 좀 무안하네. 내가 저리 살았나 싶어서. 양익준도 저걸 찍었나 싶고, 다른 사람이 한 15년 전에 찍은 영화 같았대. 그만큼 못 찍었다는 거지. 그런 아쉬움, 다음엔 더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동기가 될 거야. 헌데, 양익준은 왜 이리 오래 (장편영화를) 안 찍고 있는 거지? 작년에 부지영 감독이랑 <애정만세>에 옴니버스 영화 한 편 찍었고, 나하고도 한동안 뜸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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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로 박수를 받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반면 괴로움도 너무 컸죠.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하니까요.”(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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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니, 최근 일본에 가서 20분짜리 단편 하나 찍었대. 오는 11월 열리는 제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 출품을 해놓은 상태고. 어쨌든 지금, 장편을 찍기 쉽지 않은 마음 상태인가 봐. 하긴 내 얘길 하느라 모든 걸 쏟아 부었으니, 휴식이 필요할 만하지. 그런데 2년 전부터 2년만 쉬자고 하더니, 2년 더 쉴 거래. 완전 자기 맘이야. 하하. 영화라는 것도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건데,
<똥파리>에 파묻혀 있다 보니 일상을 살아갈 공간이 없었다는 거야. 좋은 아이디어나 소재가 생기지 않는 거지. 으응? 따지고 보니, 내 탓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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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년을 무조건 쉬겠다고 하고 지금 5개월째 소소한 일 정도만 하면서, 있는 돈 까먹으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런 게 다 번잡한 것을 없애고 깨끗해지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어쨌든 지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중입니다.”(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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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양익준에게 불만 있다!
내가 익준이한테 불만이 하나 있어. 내가 리얼하게 내뱉은 육두문자 덕분에 오늘도 대리만족한 관객도 있다고 그러고, 뭣보다
<똥파리>가 호평도 꽤 많이 받았거든. 그런데 수익 배분을 안 해줘. 한 대 맞을라고. 물론 나라는 인간이 익준이가 겪은 요소들이 결합돼 있고, 정서도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정서가 짬뽕돼 있다는 것 인정해도 그래. 우리 만식이(정만식)는 돈 하나만큼은 확실했는데 말이야.
한 번 따져볼까? 제작비 1억8000만원. 처음 1500만원으로 시작해서, 5000만원 지원을 받았지. 그 5000만원 지원받기 전까지 자금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는 바람에 익준이가 3~4개월 알코올중독처럼 지낸 적도 있었지. 사이사이 돈이 떨어져서 200명에게 전화를 돌리면서 엄청 마음 고생했던 적도 있고. 평소 해보지 않은 아버지 앞에서 아양까지 떨어가며 3500만원이라는 거금도 빌렸지. 인디영화라지만, 50회 차, 넉달 반을 찍었어. 덕분에 나도 힘들었다고! 원래 35회 차까지 찍기로 했었거든. 우리 익준이 고생한 건 인정!
2008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PIFF)에 첫 선을 보였지. 이때 영화를 본 고영재 PD가
<워낭소리>가 엄청난 관객을 모으면서 1억 원을 투자한 덕에 홍보마케팅비용을 마련했고. 총 3억원 가량 들었네. 극장 개봉해서 독립영화론 이례적으로 13만 명이 들었으니, 4억 원 가량 벌었잖아. 첫 수익금 5000만원 받은 것, 알아.
그런데 이 인간이 이걸 어떻게 했는지 알아? 은행에 가서 몽땅 1만 원짜리로 바꿔서 집에 5000만원을 깔아놓고는 편지봉투에 일일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고 돈을 넣은 거야. 그리고선 스태프들에게 밀린 임금도 갚고, 회식도 했지. 옆에서 봤는데, 되게 감동적이더라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안 줘! 내가 제일 많이 고생한 거 아냐?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촬영하면서 아버지한테 내가 돈을 뿌리는 장면이 있어. 나중에 회수해 보니, 2만원이 비는 거야. 결국 못 찾았던 거지. 이제 와서 토로하는데, 그 돈, 내가 좀 챙겼어. 누나한테 돈 다 주다보니, 담배 피울 돈이 없더라고. 하하.
누가 주제를 묻는 사람이 있던데, 그냥 잘 살고 싶었던 거 아닐까. 나 잘 살고 싶었어. 마음의 응어리 덜어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그게 잘못 된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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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없다면 영화도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 소속되어 맡은 일만 끝내면 되는 영역이라면 담당한 일 잘하고 퇴근하면 되는데요. 영화라는 놈은, 게다가 절실한 욕망을 갖고 만들고자 하는 거라면 온몸에 있는 에너지와 과거에 있던 에너지까지 다 끌어내야 하거든요.”(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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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반응도 꽤 좋았어. 익준이 덕분에 나도 외국물 좀 먹은 건, 고마운 일이지. 사실, 나 같은 양아치가 외국 갈 일이 뭐 있었겠어? 용역폭력을 해외까지 가서 할 것도 아니고. 60개 이상 해외 영화제에 갔는데, 가족 문제를 사회에서 해결해주는 나라는 없는 것 같았어. 어딜 가도 한국에서의 반응과 다르지 않고. 이탈리아의 한 영화제에선 자원봉사 하던 덩치 좋은 남자가 익준이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하더라고. 내게도 이 가족문제가 아킬레스가 됐던 것처럼. 복지가 좋은 북유럽에서도 가족의 아픔을 다룬 영화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이런 가족의 문제는 어딜 가나 존재하나 봐.
양익준 안에 나(상훈) 있다!
내 성격이 원래부터 그리 극단적인 성향인지, 익준이랑 비슷한지 묻는데, 워워. 내가 원래 익준이 안에 있긴 하지. 그렇다고 일상에서 내가 툭툭 튀어나온 건 아니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지 않았냐고? 뭐, 그런 생각, 익준이 녀석도 하긴 했는데,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생기면서 이야기틀이 바뀌었대. 그러면서 그런 결말이 나온 거지. 어떻게 보면 나와 화해하고 싶기도 해서 영화를 통해 불살랐던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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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을 떠나서 이 영화는 저한테는 화해예요. 사실 시나리오를 창작한 저라고 죽이고 싶었겠어요? 주인공이고, 나쁜 놈이지만 나름 갱생하려고 노력하잖아요. 또 상훈이는 마음속의 또 다른 나잖아. 또 다른 양익준이잖아요. 분노를 가지고 있는 양익준, 분노를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양익준인 거죠.… 저는 실제 양익준 안에 있는 감정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양익준을 산화시켜버리고 싶었던 거예요. 저한테는 그게 화해였던 거죠.”(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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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렇게 산화시키다보니, 익준의 가족 관계도 더 건강해졌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나도 힘들었던 장면인데. 정인기 씨가 아내를 때리는 남편으로 나오던 장면이었어. 장소 섭외가 안 되는 거야. 익준이 부모님 밑의 집이 마침 비어 있었는데, 익준이 자식은 어떻게든 거기서 안 찍고 싶었어.
그러다 결국 찍게 됐는데, 익준이 어머니가 조카를 데리고 구경하러 오신 거야. 그 험한 장면을! 나중에 말하던데, 익준이는 당시 멘붕 상태였다고 하더라고. 어머니와 조카를 올려보내고 2시간가량 쉰 다음에야 찍을 수 있었지. 나도 2시간 기다리느라 힘들었고. 패닉이 온 거야. 멘붕멘붕. 과거의 기억과 마구 중첩이 돼서 정서적으로 아주 힘들었대. 경험과 기억을 일부 끄집어낸 영화에 현실의 인물이 나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나도 힘들었지만, 그건 이해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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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만들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 때문에 달려들기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과 만나게 되면 그 기억 때문에 패닉에 빠질 때도 있어요.”(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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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준이 어머니는 영화를 보시곤, 이런 반응도 보이셨나봐.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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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이런 느낌은 아니었고, 뭐라고 말하기 힘든 얼굴이었어요. 엄마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웃는 얼굴로 제 팔뚝을 때리면서 얘기하시더라고요. “야, 이 상놈의 새끼. 이런 걸 다 보여주면 어떻게 하냐.”(웃음)”(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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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준이 녀석이 처음 찍었던 단편 <바라만 본다>에도 녀석이 묻은 캐릭터가 나와. 평생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을 못한 답답증이 있었는데, 그걸 영화로 만든 거지. 가만 보니, 이 녀석, 일상에서 풀지 못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려. 하하. 그런 과정을 통해 이 녀석 성격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야. 이런 말도 하더라고. 철저히 숨기지 못할 바엔 솔직하게 하자. 아마, 영화가 녀석에게 가르쳐 준 걸 거야.
그리고 익준이랑 나랑 비슷한 게 좀 있는데, 결혼관이 그래. 현재, 결혼할 생각이 없어. 나이가 더 들고, 언제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각자의 유전자를 세상에 낳고 싶질 않아. 그냥 조카를 보면 내 새끼 같아. 누나 아들 형인이에게 그렇게 잘 해주는 내 모습 봤지? 조카와의 관계가 아주 건강한 관계야. 굳이 ‘내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이미 확보된 가족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과 실천을 하는 것, 그게 더 중요하지 않겠어?
아, 좀 오래 말했군. 어쨌든 익준이도 나에게서 좀 벗어나야지. 내가 너무 깊숙이 개입하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져. 하하. 익준이가 2년 전부터 2년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노래를 불렀어. 올해 2년 마지막인데, 일상에서 뭔가를 채워서 영화적 욕망을 꿈꾸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 그리고 이 사회, 나도 거기에 책임이 있지만, 익준이가 말한 것처럼,
<똥파리>와 같은 영화가 덜 나왔으면 좋겠어. 그게 좀 더 바람직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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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훨씬 좆같은 세상인데, 세상을 즐기세요.(웃음) 지금은 세상 자체가 너무 다급하니까요. 제가 그런 속이 시원해지는 영화를 내놓으면 좋겠지만, 당분간은 아닐 것 같아요. 말씀드렸듯이 모티프는 있지만, 엔간히 개입하려고 하면 얘들이 저한테 짜증낼 것 같거든요.”(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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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생의 기록? 그래,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그리 하소. 갱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변했다고 느낀다면, 그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싶었기 때문이야. 컨택터스. 제발, 이런 용역깡패들이 함부로 삶을 철거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사회가 아녔으면 좋겠어. 나도 구름의 저편에서 반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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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의 폭력성이 세대에 걸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중요한 소스로서 폭력을 표현한 것이지, 중심 테마가 폭력이 아닙니다.”(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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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렛츠 시네마 파티? 똥파리! 양익준,지승호 공저 | 알마
양익준에게 영화는 일이라기보단 삶이다. 한창 방황하던 십대 때에도 배우의 꿈을 결코 놓지 않았고, 6년봉 1,500만원의 시절에도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 어두움을 돌파하는 좌표로 삼아왔다. 그것은 영화가 그에게 보여준 자유의 힘, 치유의 힘 때문이었다. 현실의 폭력에 억눌려 있던 한 영혼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욕망을 건강하게 분출하고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배우에서 시작된 영화 작업이 연출로까지 이어진 것도, 어떻게 하면 좀더 자신의 욕망을 후련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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