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남진의 활약은 눈부시다. 출연섭외가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데뷔 45주년 기념 투어가 연말까지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하루에 행사와 공연이 무려 세 차례인 경우도 있다. 추석 특집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 관록이 물씬한 창법으로 「비나리」를 부른 후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 느낌이다. 새 전성기를 맞았다는 말도 나온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 트로트의 레전드. 그는 1970년대 초반을 잠식한 남진-나훈아 라이벌 전의 승자였다. 그를 만나 근황, 전성기 시절 에피소드, 히트곡 사연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 동안 그는 질문에 막힘이 없었고 단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 나는 트로트 가수다 >에서 「비나리」를 감칠 맛나게 불러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원래는 고사했던 것이에요. 안 하겠다고 한 달을 말하다가 할 수없이 하게 된 거야, 그것도. 호응이 좋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후배들이 하는 행사인데 내가 괜히 끼어들어갔다가는 분위기가 이상해 질 것 같아서 고사를 했었죠. 암튼 놀랐어요. 방송 뒤에 분위기가 좋아서.
그 이후로 새 전성기를 맞았다고 할 정도로 평가가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피부로 느끼시는지요.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은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쇼를 하니까 항상 느낄 수 있는 건 분명해요. 저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시기가 1960년도에서 1970년도에요. 데뷔를 1965년도에 했지만 제 황금의 전성기는 1971년에 월남에서 귀국을 한 뒤죠. 3년의 공백 기간을 거쳐서 1971년 가을부터 활동을 했는데 귀국을 해서 바로 대한민국에서 최초 리사이틀을 했어요.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에서. 제가 20대일 때인데 그리고 나서 1970년도 후반에 쇼가 없어졌어요. 그렇게 따지면 금년에 쇼를 했으니까 33년 만에 다시 공연을 하면서 그때 세대들을 만나게 된 거죠. 공연장 가보면 80살 넘으신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이 향수가 있기 때문에 33년 만에 다시 찾아오시는 것 같아요.
전국 투어 공연을 한 것이 근래 들어서 올해가 처음인가요.
아니요. 하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한 것은 33년 만인 이번이 처음이죠. 좋았던 것을 계속 이야기하자면, 33년 전 그러니까 1978년 이후 팬들과 헤어진 거잖아요. 그 분들이 곁을 떠나서 멀리 있다가 다시 만난 기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공연을 하면 직접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다 만나 봐요. 굉장히 흐뭇하죠.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제 공연은 한마디로 ‘재회의 공연’이라는 거예요. 이산가족도 몇 십 년 만에 만나면 반가운데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 시절에 같이 했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니까 뜨거울 수밖에 없지요.
재회의 공연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그 분들끼리도 재회에요. 뜨거워요 객석이. 추억을 모두 다 가지고 오시는 거죠. 저도 예전에 말만 들어왔지만 우리 나이 정도 되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그러잖아요? 바로 그 느낌입니다. 추억은 그리움이거든요. 공연 자체가 그리움으로 꽉 차버려요. 공연을 다 끝났는데도 사람들이 뜨지를 않아. 굉장히 드문 케이스에요. 사람이 안 가. 쇼가 다 끝났는데도.
어떤 면에서 국민들이 「비나리」로부터 감동을 받았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사를 좋아했어요. 가사가 매력이 있잖아요. (편안하게 불렀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자) 그건 모르겠어요. 듣는 사람이 들었을 때 편안한 거면 편안한 거고. 나는 즐기면서 부른 거예요. 가사가 분위기가 있으니까. 물론 가사를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죠. 내가 좋아하는 가사를 부른 것뿐이에요. 더도 덜도 없어. 받아들이는 대중이 그렇게 뜨겁게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 정도로 공감을 줬나? 저도 놀랐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비나리」를 무대마다 불러요. 신청이 쇄도하니까.
인간적인 질문인데, 선생님은 왜 안 늙는 거죠. 60대 후반으로 가시는데..
(손사래를 치며)아니에요. 실제로는 안 그래요.
조영남씨와 친구 아닌가요?
맞죠. 친구죠. 아주 친한 친구죠.
조영남씨는 나이든 기색이 역력한데, 대비됩니다.
그 놈은 요걸(술) 많이 처먹어. (웃음) 나는 술, 담배를 못해요.
술은 안 드세요? 젊었을 때도요?
술을 안 먹은 지 한 30년이 넘었고요, 담배는 한 20년 됐어요. 젊었을 때는 많이 피웠죠. 하루에 4갑 씩.
성격은 자신이 생각하시기에 어떤 것 같나요?
뭐 저는 편한 걸 좋아해요. 잘 아실 텐데? 이 바닥 50년 됐는데 사람들이 내 얘기 안 해요? 편한 걸 좋아해요. 무대에 섰을 때는 남진, 내려오면 김남진(그의 본명)으로 가요. 발 내딛는 순간부터 실제 나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해요.
데뷔곡이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인데…
첫 취입곡인 「서울 플레이보이」는 인기가 없었고, 히트곡은 역시 1965년 후반에 나온 「울려고 내가 왔나」죠. 그 다음에 「사랑하고 있어요」였고, 1966년에 「가슴 아프게」가 나왔죠.
지금 말씀하신 곡 말고 「마음이 고와야지」, 「그대여 변치마오」, 「젊은 초원」 「님과 함께」, 「어머니」, 「빈잔」, 「둥지」 등 히트곡이 수두룩한데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대박 곡은 뭔가요?
말할 것도 없이 「울려고 내가 왔나」죠.
의외의 선택이네요.
지금 대박을 이야기하셨죠? 가장 쉽게 표현할게요. 이름이 날 때가 중요해요, 아니면 이름이 나고 나서가 중요해요? 돈이 없을 때 빌려주는 게 커요, 있을 때 빌려주는 게 커요? 무(無)에서, 대한민국의 남진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내 식구밖에 없었잖아요. 대한민국에서 남진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준 노래가 「울려고 내가 왔나」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가장 큰 대박곡이죠. 그리고 또 큰 은혜와 행운이 있었던 것은 계속해서 히트곡을 냈다는 것이죠. 그 이후에 대한민국 트로트로서 큰 계보라고 할 수 있는 곡인 「가슴 아프게」가 나왔잖아요. 히트곡을 하나 내놓고 인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묻히는 게 우리나라에 수 백 명이에요. 그런데 저는 예전의 인기곡보다 더 센 곡이 나왔잖아요. 어떻게 보면 은혜죠, 은혜.
팝송도 잘 부르시더라구요. 라디오에서 한번 「Oh, Carol」 부르시는 것 보고 놀랐습니다.
「Oh, Carol」은 지금 배운 노래가 아니라 55년 전에 배운 노래에요. 중학교 2학년 때 부르기 시작했죠.
개인적 취향으로 가장 잘 불렀다는 곡이 있다면 어떤 곡인지 궁금합니다.
없어요. 저는 진짜 없어요. 노래 50년 한 놈이 겸손 떠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항시 그런 게 자신에게 아쉽고 불만이죠. 제 몸에서 연습이라는 것이 하루 종일 항상 떠나지 않아요.
자신의 노래 스타일에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미진한 면이 있다면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강점은 내 색깔이 있다는 것이랄까…
「가슴 아프게」는 남진 하면 떠오르는 미드템포의 노래와는 다르죠. 애절한 맛과 신나는 맛이 공존하는 게 남진의 강점 아닐까요.
아 맞아 맞아. 정확하게 말씀하셨네요. 한 가수를 보면 장르가 다양하지는 않잖아요. 한 틀에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저는 예를 들자면 팝 스타일이라든가 빠른 템포라든가, 라틴, 트로트 그런 모든 것을 같이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제가 어릴 때 가요와는 거리가 있었고 팝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가수를 하다 보니 가요를 듣게 되었죠. 저 역시 한국 사람이 아닙니까. 1년 정도 팝으로 노래를 배우는데 제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이놈아, 아무리 한국 사람이 팝을 불러도 외국 사람보다 더 잘 부르겠냐? 한국 놈이 한국 노래를 해야지. 가요를 한 번 배워봐라!” 말씀하시더라고. 이후 최희준 선생님의 스타일을 많이 모창했죠.
최희준 선생님은 냇 킹 콜(Nat King Cole) 스타일인데.
냇 킹 콜을 중학교 때 많이 들었어요. (직접 부르면서) 「Too young」, 「Mona Lisa」 같은 노래들.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가수가 최희준 씨에요. 제가 맨 처음 부른 가요도 「맨발의 청춘」이고. 대한민국에서 최희준씨 흉내는 절 못 쫓아올 걸요? 공연 때도 해요. 남인수 선배님, 현인 선배님, 마지막에 최희준 선배님 순으로 모창을 해요. 똑같이 따라 해서 청중에서 박수도 많이 나오지요.
갑자기 최희준 선생님의 「길 잃은 철새」와 「종점」을 듣고 싶네요.
저도 「맨발의 청춘」, 「하숙생」, 그리고 지금 말한 「종점」을 많이 불러요. 「종점」이 제 18번입니다. 최고죠. 희준이형 노래 부르면 객석이 다 까무라쳐부러요.
김범수가 「님과 함께」를 리메이크해서 불렀는데 어떻든가요.
너무 너무 좋죠. 가창력도 있고. 한 가지 더 좋았던 것은 시대에 맞춰 불렀다는 것. 나랑 똑같이 부르면 나보다 잘 부를 수는 없겠죠. 자기 색깔로 이 시대에 맞게, 너무 멋있게 소화를 잘하더라고요. 원래는 남진의 「님과 함께」인데 그 무대는 김범수의 「님과 함께」였죠. 아주 잘 부른 것 같아요. 남진의 노래를 불렀으면 멋이 없었겠죠.
아까 질문 드린 미진한 구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많아요. 많아.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요즘 후배들을 보면 많이 부러운데. 지금은 노래할 수 있는 전반적인 여건이 완벽하잖아요. 노래라는 것은 자신이 불러본 것을 들어봐야 공부가 되죠. 부르고 다시 들어보고 나서 호흡, 음정, 박자 중에 뭔가 미스다, 이렇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옛날에는 듣고 노래 부르던 사람이 어디 있어요. 녹음기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지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 선생님이 있어도 한계가 있는 거잖아요. 자신이 노력과 연습을 해야지. 옛날에 노래방이 어디 있어요? 연습을 어디서 하냐고 (웃음). 선생이 하루 종일 연습 시켜주나요. 기껏해야 30분하고 끝이죠. 그 다음에 어디 가서 녹음을 해요. 어디 반주가 있어요? 없잖아요~
역으로 그렇게 열악한 환경이니까 더 노래를 잘 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다시 말하자면 지금 보컬이라는 것이 음대에서 교수도 가르치고, 요즘에는 뮤지컬도 있으니까 창구가 더 있는데. 옛날에는 뮤지컬이 뭐에요. 뭔 말인지 알아요? 음악의 기본은 똑같아요. 클래식이나 가요나. 다를 것 같죠? 뭐가 같냐면 발성과 보컬의 기본은 같은 거예요. 우리는 옛날에 동네에서 술 한 잔 먹고 까딱까딱해져서 노래자랑 한 번 나가보는 것이지, 그것을 뭐 어디서 (손을 모으고 성악가 창법으로) ‘아에이오우’하면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아예 없었던 것이죠. 다만 나는 큰 행운이었던 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발성을 좀 배웠어요. 한동훈선생님이셨죠.
당시에 노래를 잘 부른 명인들은 누가 있었나요?
그 때 당시에 남일해 선배님이 최희준 선생님보다 위였어요. 급수가 위였다고. 시대별로 정리하면 남인수, 현인, 남일해 그 다음에 최희준, 그 다음에 남진 그리고 나훈아, 조용필로 가지요. 이게 가요계에 족보라고요. 그중 최고가 남일해예요. 그때가 고등학생일 때인데, 난 내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잖아. 그때 이미자씨도 쇼를 같이 하고 그랬는데 무대순서가 3번째였다면 그 양반(남일해)은 맨 마지막이었어요. 또 이미자 씨보다 인기 많았던 여가수가 「연평도 아가씨」 불렀던 최숙자, 통틀어서 여자의 최고가수는 박재란 씨였고요. 이 계보를 정확히 아셔야 돼. 나 나오기 바로 전인 1964년에「동백 아가씨」가 나오면서 이미자씨가 최고로 올라선 거예요. 노래 부른지는 이미 몇 십 년 됐었죠. 이미자씨가 어렸을 때부터 카바레나 바에서만 노래 부르다가 「동백 아가씨」가 히트를 치면서 스타가 됐지요.
남진을 가수로 만든 가수가 있다면.
최희준 선배님이죠. 그의 노래로부터 가요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못 느꼈어요.
고(故) 배호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매력 있죠. 매력 있죠. 이야. 그 양반이 아직도 (음악이) 살아 있는 것은, 스물아홉에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흔히 말하는 소울이 있잖아요. 흑인 가수들의 소울. 우리 가수 중에서 소울이 가장 많은 가수가 배호였다고 뽑고 싶어요. 천재적인 가수죠. 스물아홉에 돌아가셨지만 전성기는 스물다섯에서 여섯 살 때인데 나도 노래해봤지만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감정이 나올 수 있는가 지금도 의문이에요. 뭐 여러 가지 요인이야 있겠죠. 몸도 그랬고, 정신적인 면도 있고, 만약에 몸이 안 아팠으면 그런 느낌이 안 나왔을 거예요. 결국 운명이었겠죠. 「하얀 나비」불렀던 김정호도 있잖아. 그 친구 노래도 약간 공통점이 있어요. 장르가 발라드라 다르긴 하지만 느낌이 비슷한 게 있다고. 그게 억지로 안 되잖아요. 일부러 아플 수도 없는 것이고.
‘어머니 참사랑에 목이 타는 어린 자식...’하고 가는 노래 「어머니의 참사랑」은 왜 묻혔나요.
아니, 그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어머니와 관련된 노래 중에 더 히트한 곡이 있었잖아요. 알겠지만.「어머니」(어머니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가 너무 히트해서 묻혀버린 겁니다. 「어머니의 참사랑」이 신 필름 영화 주제가였어요. 그런데「어머니」가 히트해버리니까 무대에서 비슷한 두 곡을 같이 부를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는 언제 취입했나요?
월남 돌아와서 녹음했으니까 1970년대 곡이에요. 가수이셨던 고봉산 선생님의 곡이었죠. 고봉산 선생님은 「용두산 엘레지」랑 하춘화와 「잘했군 잘했어」를 부르신 분이고.
「어머니의 참사랑」을 무대에서 꼭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 곡 좋죠. 현대적인 감각이 있죠, 작사가는 「어머니의 참사랑」과 「어머니」가 똑같아요. 김중순 씨. 이 양반이 내 첫 히트곡인 「울려고 내가왔나」를 작사하신 분이에요. 단순히 작사를 했다기보다는 저에게 기회를 주신 분이라는 점에서 소중하죠. 그 분 히트곡이 상당히 많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사?은 눈물의 씨앗」(나훈아), 「여고시절」(이수미), 「부산갈매기」(김중순) 그 당시 히트곡은 거의 다 그 분 거예요.
남진, 나훈아 라이벌 구도가 생겼을 때 진정한 승자는 남진이 아니었나요? 대부분 방송사의 상은 다 받으셨죠.
에이.. 승자까지는 아니고.
그런데 나훈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훈아가 당시 라이벌 전의 승자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기라는 것은 파도라고 하잖아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제가 4~5년 선배기도 하고 먼저 인기가 많기도 했지만 월남 갔다 오고 보니 시기가 나훈아씨가 인기 있을 때였고 그와 맞물려서 라이벌이 된 거죠. 정치에서도 YS와 DJ가 그랬듯이 우리도 가요계에서 하늘이 만들어준 라이벌이죠. 정말 역사에 남을 라이벌입니다. 축복의 라이벌이지. 그런 게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도 있을 수 없죠.
2011년은 선생님의 최고의 한 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에요. 흔히 하는 이야기로 인기는 아침 이슬 같은 거에요. 어디 머물러 있습니까? 오늘은 팬이었다가 더 좋은 사람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도 갈 수 있는 것이고. 한 여자를 좋아하다가 더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 사람한테로 가지, 마냥 기다리고 있습니까? 다 그런거죠잉. 처음 가요계에서 데뷔하고 나서 많은 팬들이 있었지만 월남 갔다 온 사이에 훈아씨가 히트곡도 많이 내고 팬들도 많아지고 해서 동등한 입장도 되어서 라이벌이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또 제가 슬럼프도 있었잖아요. 미국도 가있었고. 그 때 훈아씨는 한창 피치를 올렸죠. 요즘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훈아씨가 개인적인 일도 있고 해서 쉬고 있는 중이고, 반면에 저는 다시 활동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것 같아요.
「둥지」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제가 약간 활동 공백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공백을 뚫어준 노래가 바로 「둥지」였습니다.
「빈잔」도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지요.
「빈잔」이라는 곡도 에피소드가 많죠. 제가 1979년에 미국에 가서 애도 셋을 낳고 넷이 만삭인 상황에서 귀국을 했는데 그때 박춘석 선생님을 4년 만에 다시 뵈었어요. 그 때 주신 곡이 「빈잔」이죠. 작사가이신 조운파 선생님과 만드신 곡인데 KBS 100분 쇼던가? 제가 혼자 쇼의 100분을 다 채웠어요. 방송이 나가고 나서 보니 세상이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신군부정권시대였죠. 뭔가 방송국의 분위기가 영 아니더라고. KBS가 어디 거예요? 나라 것 아니에요? 나라에서 그런 거면 활동 자체가 어렵게 되는 거죠.
호남 출신이라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아냐. 저는 1%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모르겠어요. 내가 뭔가가 활동하기 원활하지 않다는 분위기인 것만 직감했을 뿐이에요. 활동하기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 역시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잖아요. 세금도 똑같이 내고 군대도 갔다 왔고 미국 갔다 다시 돌아온 것뿐이에요.
노래 인생에 하이라이트가 되었던 노래를 엮어본다면.
「울려고 내가 왔네」랑 「가슴 아프게」, 그 다음에 군대 갔다 와서 전성기를 열어준 「님과 함께」죠.
「님과 함께」는 곡을 받았을 때 히트할 것이라고 예상 했나요?
사실은 못 부를 뻔했던 에피소드가 있는데. 「님과 함께」가 남국인 선생님 곡이에요. 제가 지구레코드 사에 전속이었잖아요. 몇 번 회사에서 연락은 왔었어요. “너한테 맞는 곡이니까 한 번 와라”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 때가 월남갔다오고 나서 1971년이었으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고 댕길 때라서 작곡가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아무리 전속 작곡가가 많아도 박춘석선생님과 인간관계가 제일 깊었어요. 아무리 백 명이 있다고 해도 제가 좋아하는 작곡가 분은 박춘석 선생님 한 분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남국인 선생님 곡이 좋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박 선생님 곡만 받게 되다보니까 안 가게 되더라고. 그리고 바빴잖아요.
지금도 바쁘긴 하지만 그 때랑 비교하면 바쁜 것도 아니지(웃음) 밥을 세 끼를 못 먹을 정도로 시간이 없었으니까. 정말 바빠서 한 번 간다고 가야지가야지 하다고 못 가버리게 되고 그렇게 반년이 지나게 되었어요. 정신이 없었던 거죠. 남국인 선생님이 그러니까 화가 난 거에요, 그래서 지구레코드의 임정수회장님(2006년 사망)에게 제일 높은 양반이니까 남국인 선생님이 찾아갔지요. “아니 남진 이 놈한테 정말 잘 맞는 곡인데 이 새끼가 오라고 해도 안 오니 나는 안 줄랍니다.” 그러시니까 회장님이 “그래? 뭔 곡인데 그러느냐?” 하신거야. 임정수회장님 그 양반이야 히트제조기였으니까 들으면 딱 될 곡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사람이라서 한 번 들어보니 아신 거야. “스톱, 알았다. 내가 연락하겠다.” 그러고 나서 저한테 전화하셔서 “야, 남진아 너 요즘 뭐하노. 너한테 딱 맞는 곡이 있는데 이리로 와라.”고 말하셨어요.
그래도 그 때가 1971년이 제 가수 생활에서 가장 바빴던 해에요. 전화 하셨는데도 못 가고 있다가 다시 전화하셔서 “야 이놈아, 너 용돈 준다 해도 안 올래? 요즘 판도 잘 나가니까 용돈 줄게 와라” 그러시니까 용돈이나 하자라는 생각에 (웃음) 얼른 갔죠. 회사에 가서 앉으니까 곡을 딱 내놓더라고 “너에게 맞는 곡인데 들어봐라” 제목 보고 회사에 피아노 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번 들려줘봐라 해서 들었는데 딱 느낌이 왔죠.
단번에 히트가능성을 확인한 거네요.
그런데 문제가 뭐였냐면 남국인 선생님이 경상도분이시라 곡을 안 주려고 하는 거예요. 남자다운 사람이고 예술가시죠. 그래서 돈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한번 틀어지면 안 하는 양반이었죠. 돈을 보따리로 줘도 틀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는 사람인 거야. 그렇게 강직한 스타일이라 아예 마음이 꺾어져 버린 거야. 임 회장님한테 안 준다고 이미 선언해버린 겁니다. 그런데 임 회장님은 장사꾼이잖아요. 들어보면 이 노래가 뜰지 안 뜰지 아니까 요 놈이 딱 불러야 하는데, 돈이 보이잖아. 회장님이 (남)국인이 형을 설득시킨 거죠. 나를 봐서는 절대 곡을 안 주는 사람인데 회장님이 자꾸 이야기하시니까 못 이기는 척 준거에요. 편곡자는 마상석 씨인데 무교동 엠파이어 극장에 밴드 마스터였다고. 편곡도 맞아 들어갔어요. 세상은 타이밍이라는 게 그런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거죠.
엘비스 프레슬리의 안무와 접목 시켰던 것은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그것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그것도 하나의 축복이지요잉. 그때까지 우리나라 가수들 중에 노래하면서 춤추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당시 춤을 추는 가수는 극장에서 팝송을 불렀던 럭키 차, 자니 리, 트위스트 김. 이런 사람들이 춤을 췄지. 제가 무명가수 때 방송국이 남산에 KBS 하나 있을 때 거기를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모던 발레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이인범 선생님에게 나를 본거야. 그러면궼 내가 스무 살 때니까 아주 귀여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앞으로 가수가 춤을 추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 때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 1963~1964년 때였는데 전화번호를 주시면서 찾아 와라 그러시더라고. 장충동 신라호텔 옆에 있는 태극당 있죠? 그 바로 옆에 옛날에 일본 집들 몇 개 있었는데 거기에 사시더라고. 거기 집 2층 올라가서 내가 스텝을 배웠어. 그걸 배운 것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몇 개 스텝 배웠던 게 밑거름이 되었던 거죠.
인기의 상당 부분이 외모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지금이야 꽃미남이 즐비하지만 당시 남진선생님의 비주얼은 특급이었죠.
가수들이 영화배우가 아닌 이상 외형이나 체격이 좋았던 경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더 옛날에는 아니었어요. 남인수 선배님. 고운봉 선배님, 그리도「청포도 사랑」, 「비의 탱고」의 도미씨. 아주 잘 생기셨죠. 그 후에는 개성이 있는 얼굴은 있었어도…
영화에도 많이 출연하셨다고 하는데.
총 62편에 참여했어요. 원래는 영화를 하려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다니면서 놀다가 술 한 잔 먹고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밴드마스터가 목소리 좋다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가수가 된 것이죠. 그날 우이동 안 놀러갔으면 영화배우 할 수도 있었지.
나훈아 씨와 같이 한 영화작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훈아씨랑은 한 편인가 두 편 같이 했어요. < 기러기 남매 >랑 또 하나가 뭐더라? 그 친구도 영화 몇 편 했을 겁니다.
남진이라는 가수의 음악이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나훈아는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머나먼 고향」 등 시골 노래가 많지요. 그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한다면, 남진의 경우 「그대여 변치마오」, 「님과 함께」 같은 곡들을 보면 뭔가 우리 경제 성장의 빛과 희망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오, 맞는 것 같네요. 오늘 처음 듣는 해석인데 의미가 연결 되는데요? 동의합니다. 훈아씨는 전형적인 트로트를 이어오면서 불러온 친구지만 저는 트로트만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친구는 오리지널 트로트를 지킨, 정말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가수에요. 트로트의 대가죠.
남진을 슈퍼스타로 만든 은인들을 꼽아본다면요.
많죠. 제일 처음으로 작사가 중순이형. 처음 노래를 저에게 가르쳐 주신 한동훈 선생님. 더 위로 올라가자면 처음 만났던 밴드 마스터. 성인 박 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색소폰을 불었어요. 김영광 작곡가님도 꼽을 수 있고. 그리고 박춘석 선생님 만난 게 가수로서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주신 계기죠. 정말 가수로서 큰 것을 심어주신 분은「님과 함께」를 주신 남국인 선생님. 그리고 최근에는 「둥지」를 작곡하신 차태일씨.
선친(김문옥)의 영향도 크죠. 언론을 오래하셨고 원래는 사업을 하셔서 전라도에서 최고가는 부자셨고, 정치에 있어서도 야당에서 가장 높은 총수여서 국회의원도 하셨고. 옛날 연예인들은 생활환경이 좋은 편이 아니었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약간 특별한 케이스였죠. 제가 가수로서 이름이 나고 돈을 벌어도 저는 우쭐대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부모님을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웃음) 단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는 그거 하나만 있었지. 또 아버님이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굉장히 강한 분이세요. 목포를 지키신 분이잖아요.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도 우리 아버지의 거의 막내 동생뻘이셨던 분이에요. 어릴 때 집에 있으면 유명한 신익희, 장면, 조병옥 박사님이 전부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그랬지요.
데뷔 50년이 다가오는데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이 없나요?
어느 분야에서든지 연륜이 쌓이면 마지막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분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총력을 다 해서 스스로 “아휴, 이제는 미련도 후회도 없이 정말 다해봤구나, 할 수 있는 거는 내가 다 해봤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열정을 바쳐서 마무리를 잘하고 싶어요. 내년쯤에 공연은 올해와 똑같은 스타일과 패턴으로 못 하거든요. 제가 다른 가수와도 많이 해봤고 외국에 나가서도 좋은 쇼를 많이 봤던 사람이라서 아는 것도 병이야. (웃음) 모르면 대충 가는데. 물론 레퍼토리는 똑같지만 음악적인 것, 연결적인 것에 변화를 주고 싶어요. 예를 들면 「님과 함께」와 「빈잔」같은 곡들을 풀 오케스트라로 편곡을 해서 할 수도 있는 것이고,「목화 아가씨」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국악적으로 한복을 입은 무용수를 배치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거는 훈아씨가 잘 하시더만. 한국적인 것을 꼭 해보고도 싶고. 하고 싶은 거는 너무 많은 거야. 그렇게 쏟아낸 뒤에 떠나고 싶어요.
아니 송해선생님도 무대 위에 서시는데...
에이, 노래라는 것은 힘이 필요한 거예요. 최근에도 제가 운동을 세 시간 동안 하고 발성연습도 하고 그러는데. 조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요즘은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가슴 아프게」를 부른지 45년이 되었잖아요. 기계도 자동차도 10년 정도 쓰면 다시 바꾸고 그러는데 내 나이가 지금 몇이오. 갈았어도 4~5번은 갈았을 나이인데. 히트곡 같은 경우에 제가 45년을 노래 불렀으니까 적어도 만 번은 불렀을 걸요. 그 노래의 가사는 45년 전 가사와 똑같지만 표현의 방법은 다르게 가야겠죠. 가사와 멜로디는 똑같은데 마음은 새 마음이니까 새 곡이 되는 거죠. 「빈잔」도 새로운 「빈잔」을 부르는 거죠. 그 때 불렀던 감정과 가사의 해석이 지금은 또 달라요. 내가 그 가사의 말이 되고 주인공이 되는 거죠. 그 주인공이 20대와 30대, 40, 50대의 사람이 다른 것처럼 노래 자체도 바뀌는 거예요. 이것은 제가 찾아야 하는 거죠. 60살의 나를 찾는 거예요. 그런데 60대의 내가 늙은 60대가 되어서는 안 돼요. 감정만 60대가 되어야지 소리가 늙거나 생각이 쳐지면 안 된다고 봐요. 인생 경험의 60은 쌓되 소리와 감각은 현대적이어야 하죠.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제대로 될 것 같아요? (웃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연습과 마음. 아직 저도 그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향해 가는 길이다 이거죠.
인터뷰: 임진모 홍혁의 황선업
사진: 윤여홍
정리: 홍혁의
글 / 홍혁의 (hyukeui1@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