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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혈과 중풍에 시달리던 다산 정약용, 차를 마셔 해결했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정민

우리시대 인문학자 정민 교수가 읽어주는 ‘다산과 초의, 추사의 차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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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인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던 우리 시대 대표 인문학자 정민 교수. 그가 이번에는 조선의 차 문화를 ‘새로’ 썼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등 조선의 지식인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던 우리 시대 대표 인문학자 정민 교수. 그가 이번에는 조선의 차 문화를 ‘새로’ 썼다. 왜, 차(茶)이며, 왜 새로 써야 했을까? 좀처럼 외부 강연을 하지 않는 저자가 지난 16일 독자들과 만났다.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가 차와 인연을 맺은 건 2006년 가을, 강진에서였습니다. 강진군에서 개최한 다산 선생 유물특별전에 출품되었던 친필 편지를 직접 보려는 것이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죠. 월출산 옥판봉 아래 백운동 계곡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볼 수 있었던 다산의 친필에는 떡차 제조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어요.

열람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주인이 이번에는 필사본 한 권을 꺼냈습니다.『강심(江心)』이란 표제의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는 차에 관해 쓴「기다(記茶)」란 글이 있었죠. 현장에서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어요. 복사본 한 부를 얻어 와서 여러 번 들여다보고 나서야 낯이 익은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초의의『동다송』에 인용된『동다기』의 한 단락이었습니다.『동다기』는 다산의 저작으로 알려졌을 뿐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던 책이었죠.

차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이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다산의 떡차 관련 논의와 새로 찾은『동다기』를 주제로 몇 차례쯤 써볼 요량이었어요. 조선의 후기 차 문화를 더듬어보는 일이 다산과 초의, 추사까지 두루 살피는 등 이처럼 긴 여정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려고 기존 연구 성과를 검토했지만 자료는 많지 않았고, 오류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류는 수십 년째 답습 누적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후손가를 방문해 자료를 열람하고, 소장가를 만나 공개를 요청하기를 수차례. 문집을 뒤져 감춰져 있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만난 우리 차 문화의 기록은 결코 빈약하지 않았습니다.”


『동다기』는 다산의 저작이 아니다


“『동다기』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근대 이능화나 최남선 같은 유명한 학자들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이 책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작이라고 했습니다. 초의는『동다기』의 저자를 그저 ‘고인(古人)’으로 적어두었죠.『동다기』가 다산 정약용의 저작이었다면 초의가 살아 있는 스승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고인이라고 적은 데에는 자신과 시대적 거리가 있다는 뜻이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겠죠. 법진본『다기』에서도 저자를 ‘전의리’라고만 했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반면 앞서 이야기한『강심』에 수록된「기다」에는 끝 부분에 필사자가 남긴 기록에서 ‘이덕리’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산의 저작으로만 알고 있던『동다기』가 이덕리의 저술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덕리는 무슨 의도로 『동다기』를 저술했을까요? 이 책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도입서설에서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차가 국부 창출의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둘째로 중국 차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역대 중국 왕조가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한 일을 기술하죠. 북방인, 그러니까 몽골인은 육식만 하므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데, 그런 까닭에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남방의 차를 사 마시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여 그 수요의 일부를 우리 차로 감당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셋째로 차에 무지한 조선의 실정과, 발상 전환을 통한 차 무역 제안을 담습니다. 나라 살림에 큰 힘이 되고, 다급한 민생에도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국가 전매 정책의 강화를 통한 유통 구조 개선과 가격 조절 정책을 제안합니다.

이덕리는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과감하게 주장했던 것이죠.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자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오늘날 보더라도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이었죠.”



쇠락하던 조선시대 차 문화


“신라와 고려 때 흥했던 우리 차 문화는 조선조로 접어들며 거의 멸절의 수준으로 내몰렸습니다. 차는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상비약이었을 뿐, 기호음료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습니다. 역대 문집 속에 차에 관한 시문이 실려 있긴 해도, 중국차를 마시는 호사로운 취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공물로 바쳐지는 차는 일반 사람들이 마실 만큼 생산되지 않았죠.

조선 후기 차 문화는 다산과 초의, 추사에 의해 다시 일어났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차 문화를 논할 때, 이 세 사람을 중심에 두게 되는 것이죠. 대부분의 기록은 다산에서 출발하여 초의로 수렴됩니다. 그 사이에 추사의 존재가 없었다면 초의차의 명성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들이 마신 차는 대개 떡차였습니다. 잎차가 없지 않았지만 소량이었죠.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 식습관으로 인해, 차의 강한 성질을 눅이기 위해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제다법이 발달한 것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이들이 마신 차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녹차와는 다른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으로 접어들며 차 문화는 급격한 쇠락을 맞습니다. 중국을 통한 차 보급의 통로가 막힌 데다, 국내 생산은 저조했기 때문이죠. 세종은 중국의 차 전매제도에 대해 신하들과 얘기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어찌 차를 좋아하면서 엄히 금하는가? 우리나라는 궐내에서도 차를 쓰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또한 저마다 이처럼 다르단 말이냐.” 이미 조선 초기에 왕실에서조차 차 문화는 시들해졌던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산과 초의


“차에 관한 저술들이 잇달아 나왔어도, 차 문화 중흥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역시 다산이었습니다.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과 늘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생활은 신체 기능의 저하를 불러왔고 답답한 현실로 울화가 쌓여 어쩌다 고기 몇 점만 먹어도 체증이 되기 일쑤였기가 영양 상태는 부실했습니다. 나중에는 빈혈과 중풍까지 왔죠. 다산은 차를 마셔 이를 해결합니다.

다산은 명실 공히 우리 차 문화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혜장과 초의의 제다법 또한 다산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산은 언제부터, 왜 차를 마셨을까요. ‘걸명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산의 걸명 시문 이래 걸명의 풍조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갔던 듯하다. 차를 구걸하면서도 이들 시문 속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과 풍류와 해학이 오롯이 살아 있죠.

기존의 논의에서는 다산이 초의에게 차를 배운 것으로 적은 글이 뜻 밖에 많습니다. 그도 아니면 아암 혜장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이도 있지만, 그 반대입니다. 다산은 귀양 오기 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이미 높았습니다. 내려와서 병 때문에 차를 찾았는데, 1805년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 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이죠. 아암 혜장과 그 제자가 다산이 일러준 제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다산께 드립니다. 차가 떨어지면 다산은「걸명소」와 같은 글을 보내 차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식이었죠.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보림사와 대둔사의 승려들에게까지 퍼져 나갑니다. 이는 이규경의「도차변증설」, 이유원이 쓴 장시「죽로차」와 『임하필기』중의「호남사종」외 여러 기록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아예 차를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나갑니다. 잇달아 발견된 다산의 차시와 차 편지는 그러한 정황을 세세하게 잘 알려주죠. 다산초당에는 약천뿐 아니라 차 맷돌과 차 바구니, 차 화로와 다조 등 각종 차 도구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과 합심하여 찻잎을 따고 1810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차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1815년에 호의 스님에게 떡차 10개를, 1816년에 우이도로 떡차 50개를 보낸 내용의 편지가 친필로 남아 있습니다.

다산에게 차는 체증을 내리는 데 쓰는 약용이었지, 기호음료는 아니었습니다. 1810년 다산이 장흥 정수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차가 원기를 손상시키므로 절대로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두 번 세 번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다산은 차에 정기를 고갈케 하는 강한 성질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체증을 뚫어주는 신통한 약효 때문에 차를 늘 아껴 마셔야 했습니다.


다산이 마셨던 차는 일반적으로 떡차였습니다. 1830년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떡차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삼증삼쇄, 즉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 가루를 낸 후, 돌샘물에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크기의 떡차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다산은 유배 이전에 지은 시에서 이미 차의 독한 성질을 눅게 하려고 구증구포를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구증구포든 삼증삼쇄든 다산차가 찻잎을 쪄서 말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차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가는 분말로 빻아 반죽해 말린 떡차였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을 선호하지 않고 채식 위주의 담백한 식단이었기 때문에 독한 차를 그대로 마시면 위장에 큰 부담을 줍니다. 다산은 차의 독성을 눅여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게끔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떡차 제조법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초의는 다산이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초의가 다산초당을 처음 찾은 것은 1809년이었죠. 당시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였습니다. 초의가 차를 배운 것은 물론 다산에게서 입니다. 15세 때 출가한 이후, 초의는 9년이 지나 다산을 만납니다. 초의가 초당을 드나들 당시, 다산은 이미 차를 만들고 있었으므로 그 제법이 초의에게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초의가 만든 차, 즉 초의차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30년의 일입니다. 초의는 그해에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는데, 그때 예물로 준비한 것이 보림백모 떡차였습니다.

이후 초의는 1834년과 1838년에 잇달아 상경하여 차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초의가『동다송』을 짓는데, 초의는 이 한 편의 장시에서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합니다.

초의차는 다산차와 제법이 같습니다. 초의는 떡차를 만들었고, 그 모양도 떡살에 네모지고 둥글게 찍어낸 작은 것부터, 큰 덩어리의 떡차와 벽돌차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는 대껍질로 차를 단단히 포장해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선물했죠. 초의는『다경』과『만보전서』등 각종 차 이론서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실제에 적용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죠. 찻잎을 짓찧어 가루 내지 않고 엇짜인 형태로 뭉쳐 떡차를 만들기도 했으며, 댓잎을 함께 섞어 그 향이 스미게 하는 실험도 했습니다. 조선의 차 문화가 깃든 여러 사람의 시를 종합하면 초의차의 제다 방법뿐 아니라 포장법, 차 이름까지도 거의 선명하게 복원됩니다.”


저자는 조선의 차 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고 말한다. 어렵게 자료를 확인하면 “공개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공유하겠다는 원칙을 집필 내내 지켰다”는 그는 인터넷 세상에서 “자료는 더 이상 경쟁거리가 못 된다”고 말한다. “관점과 해석의 논리로 경쟁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차 문화를 새로 쓰면서 그는 “차학을 전공하는 전문인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원문 해독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차를 알면 한문을 모르고, 한문을 알면 차를 모르니” 문제가 생겼던 것. 저자는 자료를 수집하면서 초창기 차 문화사를 연구했던 1세대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열정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고, 그 “오류를 수십 년 동안 반복해오면서 누적되어가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며 책 제목에 ‘새로 쓰는’을 붙여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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