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이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졸업식에서 행했던 축사 중 한 마디. “연봉을 베이스로 직업을 선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즉,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고액연봉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것.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통 크게 돈을 다룰 양반의 이 말,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버냉키 의장의 이 말을 꺼냈다. 어떤 가치와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내 삶을 꾸리고 있는지 점검해보고 반성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 그는 그것을 강조했다.
직업을 고르는 기준으로 연봉이 된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 혹은 ‘얼마를 받을 것인가’를 따지는 시대. 그러다보니, 마음은 지옥을 불러낸다. 남과의 비교나 경쟁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가치를 매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인 법(法)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거나 높이는 일도 생긴다. 그렇게 실재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마음이 왜곡하는 세계가 있다. 관심과 욕망 때문에 일그러지는 실재.
‘공(空)’은 그런 마음의 해방을 꾀하는 일이다. 연봉을 베이스로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것. 타인의 잣대에 끼워 맞추지 않는 것. 연봉이나 지위는 주관적 환상이며 편견이다. 그것에 의지해 삶으로써 언제나 마음은 지옥이 된다. 공은 그런 것에서 해방된 상태다. 주관적 환상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며, 주관적 환상에 집착하는 자기로부터 떠난다는 것.
한 교수가 그런 불교의 다양한 이야기와 가르침을 담은 두 권의 책을 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허접한 꽃들의 축제』. 이 책들은 2004년부터 2년 반 동안 주간<현대불교>에 연재한 것을 묶었다. 대승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을 바탕으로 삼았다.
이 책들은 각기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붓다의 치명적 농담』)와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별기는 본문에 덧붙여진 기록으로,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을 전체적으로 해설하는 것을 말한다. 소는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글귀를 풀이한 것이다. 과감함과 꼼꼼함의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효가 <대승기론>을 별기로 썼다가 소도 다시 썼는데, 한 교수는 별기와 소를 한 품에 안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창전동 마포구립서강도서관에서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가 열렸다. ‘발랄한 금강경 당신에게 말을 걸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 강연, 현대적으로 풀어낸 금강경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종교적이라기보다 인문학적으로 접근했던 시간을 함께 나눈다.
나는 그래서 불교가 좋다. 비억압과 관용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더 이상 근엄하거나 딱딱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수행자는 이제 비로소 불교를,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투리’를 말하기 시작한다. 역사상 뛰어난 선지식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만의 언어를 독창적이고 개성적으로 발휘해나갔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p.19)
<1. 각성> 어느 날 엄습하는 ‘낯선 느낌’!
사람들은 왜 불교를 찾을까. 그 계기는 각자 다르고 여럿일 것이나, 한형조 교수는 이렇게도 말한다.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 사람들이 불교를 찾는다.” 즉, 삶에 굴곡이 있다면 불교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그는 불교를 도구라고 단정한다.
“불교는 싫으면 마음대로 차라, 이거다.”
그가 말하는 설법 역시 뗏목과 같단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미친 존재감은 언감생심. 강을 건넌 뒤 누구도 짊어지고 가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그런 뗏목과 같다.
“불교는 방편적 지식이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강요하거나, 감방에 넣지 않는다. 이게 대단한 매력이다. 필요하면 와라.”
불교는 구경(究竟)이 아니라 방편(方便)이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쓰지만,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금강경』이 구구절절 토로하듯이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p.19)
살다가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애인이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을 때. 애인 얼굴의 여드름 자국이 싫어질 때.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다가온다. 헌데, 어떤 낯섦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풍경이 봉합되지 않으면?
“그 불안을 삶을 불안정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송곳의 질문을 들이댄다. 그때 존재의 물음에 부딪힌다.”
<2. 착각>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다?”
한 교수는 현대(인)의 삶이 잘못된 기조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근대는 인간은 무한한 욕구를 갖고 있고, 산업과 기술은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전제위에 형성됐다. 허나, 그것은 선각자의 말로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음을 한 교수는 강조했다.
“위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욕망의 무제한한 충족이 인간에게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고타마 붓다 ‘유성출가(踰城出家)’ 중에서)
인간의 욕구에 대한 한 교수의 고찰.
“먹고 입는 ‘동물적 욕구’뿐만 아니라, 의미와 유대의 ‘인간적 욕구’가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나뿐 아니라 타인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의미가 흔들리면 바닥 빠진 함정 비슷하게 된다.” 유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동물과 혹은 무생물사이에 맺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등은 관계와의 절연 때문에 혹은 대화나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까. 한 교수는 아니라고 도리질친다.
“우리가 얻은 자유는 환상이다.” CCTV 등을 통해 감시는 일상화되고, 광고와 미디어는 넘쳐난다. 그것이 또한 우리 삶을 좌우한다. 물론 즐겁게 끌려 다니는 사람도 있다. 노예의 편안이자 즐거움이다.
양극화는 또 어떤가.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뭣보다 생태적 위기와 핵전쟁의 긴장 또한 가공할 위협이다. 위험사회다.
“에리히 프롬은 이 모든 요소들이 ‘지구적 종말’을 예비하고 있다는 음울한 경고를 했다. 이제 지구의 생존 자체는 인간의 정신혁명에 달려 있다.” 길을 잘못된 인류에게 가해진 위험 게이지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얘기다.
<3. 진단>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위험사회는 왜 잉태된 것일까. 결국 그것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형성됐다. 따라서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된 비극이다.
한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지적을 언급했다.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불쌍한 시계추와 같다.” 말하자면, 인간은 욕망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한 교수에 의하면, 붓다는 인간의 현실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표현했다. 팔리어 경전에 쓰인 두카(dukka)는 직접적 고통을 뜻하는 단어로, 세계의 무상함과 불완전함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나는 분열과 갈등으로 추악하고 잔인해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것을 만드는데 책임이 있다.” 나는 곧,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뜻한다.
<4. 과정>
한 교수도 강조한다.
“우리가 사고 있는 삶이 불안전하고 위험하게 된, 이런 세계는 우리 자신이 만든다.” 불교 역시 그런 가르침을 품고 있단다. 우리 자신이 이런 불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인했고, 원인이고 추동자다.
그렇다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다. 한 교수는 불교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모든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다.” 그런 메커니즘을 다룬 것이 12연기다. 화정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육도 윤회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자아가 이 불행한 삶을 만들고 있는가의 메커니즘을 도식화한 것이다. 바깥쪽 원의 12연기(緣起) 혹은 苦의 연쇄 고리, 욕망의 지도가 각자의 세계다.”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는 고를 느끼고, 대상과 접촉하면서 느낌을 갖는다. 불교는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가르침을 내세운다. ‘삼라만상이 다 마음의 반영이요, 세상 모든 것이 다 의식의 결과일 뿐이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신 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의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의식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라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마음이 만든 세계라고 말했다.
“감각기관과 대상과 접촉을 통해 형성된 것이 각자의 세계인데, 마음과 의지가 만든 것이다.” 마음과 의지가 만든 세계를 보여주는 예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1)을 든다.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남편, 아내, 산적, 나무꾼 등 4명이 있다. 이 4명의 이야기가 각자 다르다. 단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자기만의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펼쳐놓고, 자존심을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기억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냐면, 전혀 없었던 사태도 세뇌시켜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꼭 겪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기억도 못 믿을 일이다.”
<라쇼몽> 또한 그 기만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이 어떻게 남과 나를 ‘기만’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붓다의 치명적 농담』, p.150)
즉,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태라는 것도 개인의 이해관계와 관심에 치중돼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도 즉, 만든 세상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즉, 무릇 있는바 상은 모두 허망하므로 모든 상이 상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곧 여래를 보리라.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제가 아니라 사적 의지와 관심의 투영, 다시 말해 그림자일 뿐이다. 이 사태를 선명히 자각할 때, 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베이컨의 4대 우상론(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다. 한 교수가 말하는 불교의 모토는 이것이다.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으로 만들어졌으니, 마음을 수련함으로써 이 감옥(우상)을 벗어나자. 마음 다스리기. 불교뾽 그래서 수단이다.
<5. 현실> 우리가 이토록 불행한 이유 : 一切皆苦의 현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다. 즉,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말았다. 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 도피와 자기기만이 일상화 됐다. 술, 도박, 외도, 책과 TV 등도 이런 혐의가 있을 수도 있다. 책도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대상을 수단으로 보면, 그 대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상대방이 아니고 자신이 문제라고 말한다.”
불교는 이런 자아의 감독을 부수는 것이다. ‘나의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그래서 실천적이라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자아는 아날로그이며, 자기 이해와 관심의 관성을 멈추는 것이 불도(佛道).
“강의를 듣고 있을 땐 자아를 못 느끼나 나를 때리려하거나 사기를 치려고 하면 자아가 깨어난다. 일상적으로도 자아가 강해졌다가 약해진다. 자아가 강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자아가 없어야 진정 타인과 말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 입장을 배려하는 사람이 무아(無我)다. 그때 자기를 비움으로써 타인을 통해 충만할 수 있다는 역설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6. 언어>
“말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결핍돼 있거나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에서 묵언수행을 말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다. 말을 줄이고,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일수록 불도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말은 객관적 사태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과 욕구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7. 췌언> - “모든 ‘언어, 발언’은 자신의 그림자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조차 결국 이야기다. 곧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단재 신채호가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고 하면서 진시황을 원망하는 것(역사 인식)도, 세수를 할 때 일본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억울한데 세숫대야에까지 고개를 숙일 수 없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수하는 것(삶의 태도)도, 식민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역사도 그렇지만 글을 읽을 때도 사태를 따라가면 안 된다. 신문을 보면 같은 사태를 놓고도 신문끼리 논조가 다르다. 글을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신문기사든, 어떤 글이든 글 쓴 사람의 마음과 의도, 꿈과 좌절을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날 한형조식 금강경 강의의 핵심은 ‘공(空)’이다.
“공이란 인간의 집단적 환상에서 벗어난 세계를 가리킨다. 불교는 이 공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법적 장치들의 변주들이다.”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공(空)이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이참에 말인데, 제발 공을 설하면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 세계의 내부 공간의 휑한 공간 운운하는 논법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씀은 불교의 적절한 이해를 심각하게 그르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 주관적 세계(我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붓다의 치명적 농담』, pp.151~152)
“모든 세계는 아(我)에 물들어 있는데, 소승 아비달마는 나를 지우는 방식으로 말하고 글을 쓴다. 아비달마의 지혜다.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라는 문장은 틀렸다. 나를 통해 구성된 불완전한 문장을 나를 해체한 순수한 세계로 해석한다. 이것을 분석적 지혜라고 한다.”
즉, 사태에 개입하는 나를 떼어내고, 이를 계속 체크해야 한다는 것. 불교는 그래서 반성의 작업이다. 다른 사람을 그대로 봐주고, 관용해줄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불교는 시시콜콜 다루지 않고 근본적으로 다룬다.
몳?심은 단순하다. 불교는 세계는 곧 나의 이미지의 투영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이다.”
요컨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아직 불교가 아니다. 대신에, “내가 본 진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곳에 불교가 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p.20)
Q & A
모든 인간사 고통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어린 아이가 죽는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또 개인적으론 세계에 객관적 체계가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성철스님에게 한 학자가 대들었던 적이 있다더라. 이기적이라고. 이렇게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 먹고. 그러자 성철스님이 그랬다. 야, 이놈아 이기적인 건 너만 한 놈이 없다. 너와 네 새끼를 빼고 생각해 본 적 있냐?
이 얘길 한 이유는, 객관적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모든 문제를 내가 가로막고 있어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나의 관심에 따라 모든 걸 아전인수로 해석하잖나.
의미 있는 일을 하자면 내 자신부터 넘어서야 한다. 온 천지가 문제투성이인데, 스스로에게 갇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넘어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첫 질문에 대해선 스토아적 해석을 한다고 말씀드리겠다.”
반성하고 있는데도, 생활이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은데, 실제 바뀔 수 있을까? 또 지혜를 얻기 위해, 깨치기 위해서 책 읽는 것이 좋은 도구가 되는지 알고 싶다.
“나는 책밖에 안 읽었다. 참선을 본격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불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보라고 한다. 나는 늘 보기 위해 애써왔다. 뭐가 달라졌는지, 내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웃음) 판타지 소설을 읽어도, 새로운 세상의 장이 열리잖나.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몰입하는데, 고전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주는 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거지.
도올 김용옥이 혜화동에 서당을 연 적이 있다. 그때 총무에게 들었다. ‘논어’를 한 달 강의할 때와 ‘장자’를 할 때, 학생들이 완전히 바뀐다더라. 논어를 하면, 예의를 차리고 달리 살려고 하는데, 장자를 하면 밤 새워 술을 마시거나, 고무신 신고 다니고. (웃음)
책이 삶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 책은 기본 코드를 안고 있는데, 코드를 모르고 구절만 들고 있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 불교의 모든 언설은 수많은 맥락을 깔고 있다. 그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남의 얘기 안 듣는다. (웃음) 직접 한문을 보고, 고전을 보고, 경전을 보면서 터득한 아마추어다. 책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건 믿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