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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이 뭐냐고? 나를 믿어 봐! -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 오은정

“느낌 좋은 드로잉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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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도 홍대 거리는 번화하다. 늘어선 옷 가게, 여러 군데서 흘러나와 믹스된 댄스 음악, 팔짱 낀 사람들의 부산한 걸음걸이. 잠시 다른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는…

순수예술작가에게 드로잉을 배우다

평일에도 홍대 거리는 번화하다. 늘어선 옷 가게, 여러 군데서 흘러나와 믹스된 댄스 음악, 팔짱 낀 사람들의 부산한 걸음걸이. 잠시 다른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는 이내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에 채이기 십상이다. 지난 4월 13일 목요일 저녁, 여전히 부산한 홍대 거리 한편에 마련된 서교동 예술실험센터로 몇몇 사람들은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지하에 마련된 작업실. 이날의 강의실에 그림에 관심이 있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YES24 독자들이 게릴라처럼 모여들었다. 건축가, 디자이너, 학생, 직장인, 주부……. 다양한 사람들이 마련된 의자를 채워나갔다. 참석율이 높아 몇몇은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앉기도 했다. YES24와 안그라픽스가 준비한 예술 특강 릴레이,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의 저자 오은정의 ‘시크릿 드로잉’ 강연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시크릿이라니! 그것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마법이라도 부려야 할 것 같고, 놀라운 것을 보여줘야만 할 것 같아서요.” 저자인 오은정 작가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저자는 파인아트, 즉 순수예술 작가다. “여러분, 순수예술 작가들이 얼마나 폐쇄적인 지 아시죠?” 저자는 긴장한 듯 자리를 맴돌기도 하고, 써왔다는 대본을 연신 들여다보기도 하고,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응모해준 분들의 사연을 다 읽어봤어요. 하하. 웃음이 나더라고요. 제가 10년간 듣던 얘기, 하던 생각이랑 정말 똑같아서요. 공부는 각자 하는 것이지만, 어딘가 나와 비슷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힘이 되거든요. 하하.”

그래, 우리는 그곳에서 폐쇄적이고, 예민하고 섬세한 한 명의 순수예술 작가를 볼 수 있었다. 저자, 작가보다는 화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 보통의 강의가 능숙한 저자에게서 볼 수 없는 ‘진땀 흘리는 모습’이 초반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만큼의 풋풋함과 상쾌함이 지하 작업실 안에 감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살짝 목소리를 떨면서, 중간중간 마른침을 삼켜가며 하는 얘기들은, 모두 진짜였다! 진심으로 다가왔다.

“작가라고 하지만, 겉모습은 별 다를 게 없죠. 이 시간을 통해 제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거예요. 예술가가 될 수 없다면, 예술가 마인드로 살아가자고 책에서 얘기 했죠. 오늘, 여러분들이 그런 마인드를 가져 가셨으면 좋겠어요.”

시크릿 드로잉, 나를 믿어보는 것


드로잉이란 무엇인가. 드로잉이란 어떤 그림의 밑바탕이 되는 그림이나, 연필, 콩테 등을 사용해 선으로 그린 그림이 드로잉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선뿐만 아니라 찍는 것, 뿌리는 것, 바르는 것 모두 드로잉”이다.

오은정 작가는 드로잉의 준비와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기술보다는 준비가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드로잉 기술은 익숙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오은정 작가는 이때야말로 시크릿 드로잉의 비밀(secret)을 밝혔다. “시크릿 드로잉이란 결국 자신을 믿어보는 겁니다. 나만의 드로잉을 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드로잉으로 표현하면 돼요.”

가장 창의적인 것은,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창의적인 작품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창조적이라는 말이 이 세상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미 눈 앞에 나타난 걸작은 나에겐 창조적인 작품이 될 수 없는 게 아닌가. 유명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쫓아다니면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이미 했던 거잖아요. 이 재료를 이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정도로 배우면 되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면,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좀더 구체적인 조언을 구해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뭘까? 좋아하는 것은 더 환상적으로 만들어보세요. 내가 무서워하는 건 뭔가? 그건 더 낯설고 이상하게 만들어보세요. 거기서 독특한 것이 나올 겁니다.”

저자 왈, 순수예술은 철학 덩어리다. 기술 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철학을 발견하거나 만들어가기 위해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오은정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강연 이후에는 여러분이 드로잉에 대해 이제와는 다르게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드로잉, 첫 마음, 첫 느낌으로 그은 선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에서 오은정 작가는 드로잉을 이렇게 정의해두었다. ‘초심’ 그러니까 “드로잉은 머리로 그리는 게 아니에요. 첫 마음, 순수한 첫 느낌으로 대해야 돼요.” 여기서 초심이란, 처음 긋는 선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사색한 후에 그은 선”이다. 마음으로 충분히 여문 생각을 처음 꺼내는 그 마음이 초심이다. “그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첫 선을 긋는 건 소용이 없어요.”

아니, 작가님. 기술이 그저 ‘익숙함’이라지만 최소한의 기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만으로 드로잉이 되겠습니까? 성급하게 묻는 독자가 있다면, 오은정 작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기본을 닦는 두 가지 순서가 있어요. 보통 생각하듯, 기초를 닦고 깊이 있는 부분을 보충하는 방법이 있고, 깊이 있는 생각과 준비를 통해 진지한 드로잉을 하다 보니 어느 새 기초가 갖춰지게 되는 경우가 있죠.”

드로잉을 빠르게, 제대로 하고 싶다면 오은정 작가는 후자를 권한다. “웬만한 각오가 아니면, 기본기를 하나씩 익혀 무언가 완성하는 일에 엄청난 시간과 의지력이 필요해요. 일이 아닌 이상, 그럴 여유가 없잖아요. 연습을 하면서 기본이라는 것을 획득해야 합니다. 테크닉이 받쳐주지 않아도 느낌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느낌 좋은 드로잉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요.”

남들과 똑같지 않은 나만의 독특한 시점으로 다시 사물을 재해석해낼 수 있는 것은 대상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고 본질에 관하여 꿰뚫어 보려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대상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응시하기도 하고 감정을 이입해서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의 무언가를 분출해내는 행위다. (p.218)

“뭐든 좋아요. 일단 그려보세요.”


실습형 강의에 걸맞게, 우리는 직접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입장할 때 받은 연필과 노트 위에 자신의 감정을 그려보기로 했다. 불을 끄고, 어두운 작업실에 조용한 음악을 깔았다. “뭐든 좋다. 감정을 표현해보세요.”

저자 말대로 뭐든 그려내도 상관없지만, 막상 흰 종이를 맞대고 있으려니 첫 선을 떼기 어렵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고,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이래서 오은정 작가는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의 감정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짧은 순간의 기분이 꽤 특별했다.

“드로잉의 초심은 마음의 일렁임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겁니다. 끄집어 내 보세요. 분출하지 못한 감수성을. 드로잉에 대한 일렁임을” 독자들은 강연장에 모여 앉아있지만, 이 순간, 모두 각자의 방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몇 명의 독자들은 앞에 나와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종이 위에 감정을,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앞에서 그림을 그린 세 명의 독자들은 자신이 어째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해명할(!) 기회도 얻었다. 세 사람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땠는지,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떤지, 그들은 그렇게 그림을, 자신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눈물을 비춘 독자도 있었는데, 그 순간 함께 마음이 일렁이고, 슬쩍 눈시울이 붉어졌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테다.

드로잉이 초심이라는 것, 그것은 마음의 일렁임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는 걸, 이날 독자들은 이렇게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 활자로만 본다면, 초심이라는 말이, 자신을 발견하라는 말이 한갓 추상적이고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드로잉의 준비’라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마음으로 이해했다.

나만의 드로잉이라는 것이, 더 예쁘고 더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드로잉을 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지, 이날 알 수 있었다. 어떤 드로잉이 아름다운 것인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드로잉이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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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화가였다, 100여 편의 드로잉 작품을 통해 단계별 그리기 방법을 제시한 실전적 드로잉 실기서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과감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치열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드로잉 실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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