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당연히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런던일까? 기자의 ‘공연본능’이 집결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경쾌한 멜로디를 흩뿌리는, 인물까지 출중한 브리티시 팝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즐비한 곳,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공연을 운 좋으면 단돈 20파운드에 볼 수 있는 곳, 골목마다 유명 뮤지컬 공연이 불야성을 이루는 곳, 동네 펍에서도 될 성 부른 떡잎들의 공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런던 아니던가. 기자는 주어진 나흘 동안 중극장 이상에서 진행되는 이름 있는 뮤지션의 콘서트와 유명 뮤지컬 한 편, 그리고 펍에서 열리는 앳된 밴드의 공연을 보리라 막연히 다짐해 보았다.
뮤지컬은 머무는 날이 길지 않은 만큼 티켓을 예매해둘 필요가 있다. 현재 런던에서는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마> <라이온 킹> <빌리 엘리어트> <레 미제라블> <시카고> 등 세계적으로 인기 절정의 뮤지컬들이 공연되고 있다.
//www.ticketmaster.co.uk 현지에서 예매 때 많이들 이용하는 사이트다.
하지만 발로 뛰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실속 있다. 뮤지컬 공연장이 몰려 있는 레스터스퀘어에는 절반가를 내세우는 티켓 예매 창구가 많지만, 런던공연장협회가 운영하는 공식 할인부스는 ‘TKTS(
//www.tkts.co.uk)'다.
또 대부분의 뮤지컬 전용극장에서는 오전 10시, 스톨(stall)이라는 가장 비싼 1층 오케스트라 앞줄을 절반 가격인 20~30파운드에 판매한다.
물론 선착순이니 욕심나는 공연이 있다면 일찌감치 줄을 서야 한다.
런던에 머물고 있는 ‘공연 좀 본다’는 몇몇의 지인들이 <위키드>를 추천했다. 기자 역시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을 강타한 <위키드>가 궁금했다. 오전 9시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에 도착했고, 1시간 동안 줄을 선 보답으로 가장 앞줄의 정중앙 자리를 27.5파운드에 구입했다.
뮤지컬 <위키드>는 소설 <오즈의 마법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소설 <위키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즈의 마법사… 책 보다는 어렸을 때 TV 만화로 봤던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위키드>는 그러니까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오즈 세계에 오기 전, 이미 그곳에서 우정을 쌓은 초록마녀 엘파바와 금발마녀 글린다의 이야기다. 무대는 서쪽 나라 악한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오즈인들의 축제로 막을 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착한 마녀 글린다는 초록마녀 엘파바와 친구. 무대는 엘파바가 초록색 몸을 갖고 태어나게 된 과거부터 엘파바와 글린다가 친구가 된 계기, 다시 그녀들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사연과 억울하게 서쪽나라의 악한 마녀로 인식된 엘파바의 이야기를 담는다.
화려한 의상, 아기자기한 무대 장치, 뛰어난 가창력, 엘파바와 글린다의 돋보이는 연기. 공연장은 환호와 박수갈채로 시종일관 떠들썩했다. 특히 엘파바(Rachel Tucker)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글린다(Louise Dearman)의 폭소를 자아내는 공주 연주는 가히 명품이었다. 물론 홀로 맨 앞자리에 앉아 남의 나라 말로 뮤지컬을 보고 있자課, 그네들처럼 마음껏 이해하고 실컷 웃을 수는 없었지만, <위키드>가 국내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과연 국내에서는 어떤 배우가 엘파바와 글린다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혼자 점쳐 보기까지.
지난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국내에서 흥행했기 때문일까?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은 대부분 <빌리 엘리어트>를 봤다며 만족해했다. <라이온킹>은 화려한 무대연출, <맘마미아>는 노래의 익숙함, <시카고>는 현란한 춤사위에 다들 만족해한다. 런던에서 웬만한 작품은 다 봤다면 <워 호스(War Horse)>를 추천한다. 업계 관계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강력 추천하더란 말씀. 세계 1차대전을 배경으로 소년과 말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소 식상하지만, 3명이 무대에서 직접 조정하는 실제 크기의 말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섬세해 감동을 배가한다.
공연장 구경도 큰 재미다. 골목마다 떡하니 자리 잡은 인기 뮤지컬의 전용 공연장은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뮤지컬 마니아라면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낮 공연도 있으니 시간을 잘 쪼개 사용하면 원하는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겠다.
계획과 달리 공연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그룹 디어헌터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암표를 구하는 대신 템즈강을 거닐었고, 금요일 밤 펍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기로 했으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친구의 외로움을 더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시 비빔밥을 뚝딱 해치우고 영화 ‘콘서트’를 보고 난 뒤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 일 때문에 공연을 허겁지겁 보느라 작품 자체는 즐기지 못했음을. 공연이든 삶이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기쁨이 끼어들 틈이 필요한가 보다. 그래서 수첩에 ‘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 ‘미뤄둬야 할 일들’을 적었다. 세상이 끝난 듯 신용카드를 긁어댄 탓에 지금은 일상으로 복귀, 새벽에 벌떡 일어나 출근하고 있다. <위키드>가 국내에서 공연될 때는 더욱 재밌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놓친 공연들이 아른거려 런던행 비행기는 조만간 다시 탈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