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고요한 밤, 라디오 주파수를 KBS 89.1에 맞추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가 흐른다. 음악 위로 도마에서 재료를 써는 정갈한 소리.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심야식당>이 열린다. “심야식당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심야식당> 프로그램의 연출자이자 DJ, 윤성현 PD.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의 연출도 함께 맡고 있는 그가
『라디오지옥-신청곡 안틀어드립니다』라는 책을 냈다. ‘까칠하고 시크한 라디오 피디의 라디오 이야기’인 이 책에는 그가 라디오 피디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와 그의 일상이 담겨 있다.
<심야식당>의 윤이모, 막말하는 DJ, <라디오천국>의 변태, <올댓차트>의 대한민국 최초 사이버 디제이 윌슨 등등. 그가 많은 수식어, 별명을 이끌고 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캐릭터가 독특하기 때문일 터. 방송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었던 그의 거침없는 말투, 도발적인 마인드가 책 속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뿐만 아니라, 이 자리.
『라디오 지옥』 출간을 기념해 갖게 된 독자와의 만남 행사장에서도 윤이모, 윤성현은 여전했다.
“방송출연이 많은 편이다. 외모 때문이겠지.” “얼굴로 PD됐다.” “밴드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에게 알려드릴 생각은 없다.” “못하는 게 거의 없다.” “<파스타>의 버럭쉐프, 김주원 캐릭터의 모델이 나다” 등등. 이날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이거나, 혹시 이 지면에서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다소(혹은 상당히) 반발심이 들 수 있는 멘트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사람이 바로 윤성현 PD다.
처음 방송을 직접 진행하게 되었을 때 다른 것보다도 우선 내 스스로 듣기 싫은 프로그램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청취자 입장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프로그램은 착한 혹은 착한 척 하는 DJ가 하나마나한 착하고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방송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말하면서 스스로 민망하지 않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방송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보니 취업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청년백수에겐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부분을 꼬집어 말하게 되고,(…)그 시간에 같이 붙어있는 혈기왕성한 자취하는 남녀 대학생들에겐 피임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게 되고,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찌질한 청취자들에게는 그 따위로 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살라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p.46)
오늘은 신청곡 안 틀어드립니다
홍대 카페 ‘벨로주’에서 진행된 윤성현 PD의 독자만남 행사는 그야말로 <심야식당>의 공개방송 같았다. 윤성현 PD는 한쪽에 마련된 부스에 앉아 음악을 선곡했고, “게시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있는 것 같다.”며 중간중간 멘트를 넣기도 했다.
“처음 30분은 내가 음악을 틀고 수다를 떠는 시간이다. 일본 음악만 틀 거다. 일본 음악은 가사 때문에 공중파에서는 틀 수가 없다. 혹시 2010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때 오신 분들은 그때 들은 음악도 있을지 모르겠다.”
첫 곡은 심벌즈(Cymbals)의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
평소 일본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윤PD는 일본 음악을 라디오 방송에서 틀 수 없는 규정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일본 대중문화가 TV와 라디오에는 ‘부분 개방’ 되어 있어서, 일본 가수가 우리 방송에서 노래는 불러도 되는데, 라디오에서는 틀 수 없다는 규제가 있다는 것.
“어쩌다 실수로라도 일본어 가사가 담긴 노래가 방송을 타게 되면 PD들은 주의나 경고 같은 제재를 받게 되는데, 일본 음악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는 것보다 그런 제재 때문에 21세기 라디오에서 특정한 어느 나라의 음악을 방송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훨씬 더 슬프고 부끄럽다.(p.57)” 그리고 한마디 더.
“그렇다고 짜증내진 말고 MP3로 들으세요.”
“많은 여가수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나카시마 미카의 「Star」도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정통 발라드 곡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쓸쓸한 듯 다정한 듯 들을 때마다 아련한 이런 노래를 방송에서 틀 수 없어 아쉽다”고도 덧붙였다.
윤PD의 트위터에 글을 올리면, 현장에서 읽어주기도 했다.
“잘생긴 얼굴 좀 보여주세요…? 어제 <라디오천국> 송년회가 있어서,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하고 오전 7시에 퇴근했다. 실제로는 굉장히 잘생겼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안된다.”
트위터로 신청곡을 보낸 독자도 있었다. 제목처럼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오늘은 신청곡 안튼다. <심야식당>이 한 시간에 열두 곡을 트는데 대부분이 신청곡이다. 대한민국에서 신청곡을 가장 많이 트는 방송일 거다. 그러니 오늘은 안튼다.”
그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 미시아의 「everything」이 이어졌다.
“날씨도 좋으니 이렇게 따뜻한 곡이 좋을 것 같아요.” 노래를 서너 곡 들었을까. 벌써 예정된 30분이 흘렀다. 일본 음악은 한 곡 길이가 긴 편이다.
“음악 하는 사람 위주로 편곡되어서 한 곡에 6분 정도 된다.”
유희열은 국내 최고, 아마 세계 최고 일 거다
드디어 윤PD가 잘생긴 얼굴을 독자들 앞에 내보였다. 무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 윤성현 PD는 책과 라디오, 그리고 그 자신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옮기기 멋쩍은 몇 개의 대답은 생략한다.
첫 책을 냈다. 소감이 어떤가?
“제의를 받았을 때는 ‘내주겠다는데 안 쓸 리가 없잖아’ 싶었다. 쉽게 시작했다. 하지만 책 쓰는 과정은 정말 즐겁지 않았고 귀찮았다. 바빠서 그랬다. 책 쓰는 일은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같다. 또 하나의 소통 매체를 만든 다는 점이 즐거운 일이었다고 할까. 나는 평소 라디오 듣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여러분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 자리도 만들어 주겠다니까 재미있겠다 싶어 나온 거다.”
원래 차도남이었나?
“차도남의 원조라는 얘기를 들었다. <파스타> 이선균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다 나를 벤치마킹한거다. 몰랐나? 평소 냉소적이고 불친절한 스타일이긴 하다. 다른 사람들은 친절하거나 친절한 척 하는데 나는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막대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DJ로서 유희열을 평가한다면?
“국내 최고, 아마 세계 최고일 거다. 방송만 들어도 잘하는 구나, 알 수 있잖나. 실제로도 이제껏 어떤 DJ보다 잘하고,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고, 영리하다.”
영감을 주는 DJ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건 PD로서 정말 행운이고 행복한 일이다. 저쪽에서 ‘쿵’하면 이쪽에서 ‘짝’하는 느낌. 그저 ‘호흡이 잘 맞는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라디오 부스 안에서만 느낄 수 잇는 이 희열감을 알게 해준 나의 재규어, 유희열씨가 참 고맙다.
행여나 이 글을 유희열씨가 읽게 된다면, “희열감이라니… 역시 변태야.” 할 것만 같군.(p.51)
DJ로 키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카라의 강지영. 음악을 다양하게 듣고 있더라. 넬도 그렇고. 좋은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다. 보드카레인도 방송을 잘하더라.”
요즘엔 어떤 책 읽고 있나?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진보집권플랜』이다. 진보가 집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답답한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잘 짚고 있는 책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자서전』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
DJ 앞에서 라디오 듣는 특권. 이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다
밤샘 공부하면서 들은 <라디오천국>, 늘 감사했다. 윤PD에게 진짜 음악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인지? 특별히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공감하면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역시 가요다. 윤상, 토이 음악을 좋아한다. 이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약간 경외심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렇게는 못 만들겠다 싶은 음악이 있다. 그런 존경심이 들어야 진짜 좋아하는 음악이다.”
이전과 직후, 라디오 PD 일을 해보니까 어떤가? 하고 나서 무엇이 바뀌었나?
“라디오 PD가 되기 전에는 이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라디오 PD하면서 음악을 더 열심히 듣게 됐다. 예전에는 재미 없으면 확 돌려버렸는데 지금은 DJ나 음악을 굉장히 주의 깊게 듣는다. 라디오 PD의 본질적인 일은 잘 듣는 일 같다. 들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판단하기도 하고, 잘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필요하다.”
아무리 일이 많고 고민거리가 많을지라도 내가 하는 고민은 결국 어떻게 하면 이 방송을 듣는 사람들과 더 재밌는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고민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배가 부르지 않은가? (p.17)
라디오 PD가 되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
“라디오 피디가 되고 나서, 라디오를 재미있게 듣는 법을 깨달았다. 현장에 가서 DJ 앞에서 라디오를 듣는 거다. PD의 특권 아닌가. 표정을 읽으면서 라디오를 듣는 일보다 재미있는 건 없다.”
제작과 진행은 어떻게 다른가?
“PD로서는 행운이다. 제작만 할 때는 DJ를 보고 ‘왜 이렇게밖에 못하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진행을 직접 해보고 나니까 마이크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다. ‘이렇게 하라’고 얘기하는 것과, 실제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디렉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
직업병이 있다면?
“음악을 항상 듣는데, 지금은 일 때문에 듣는 경우가 있다. 시간 없을 때는 도입부, 중간부, 끊어서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 음악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음악을 듣는 일은 일 같지도 않은 일이다. 와, 좋다. 이런 음악이 있어서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
<심야식당>을 만들고 나면 애초에 피곤하고 짜증났던 몸과 마음이 자양강장제 한 박스를 마신 것처럼 가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다 그 수상쩍게 빨간색으로 빛나는 ‘ON AIR’ 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무슨 방송에 미친 놈도 아니고…….(p.83)